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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북 Jun 04. 2017

성북동, 이렇게 걸어요

[1호·창간호] 글 신현수

 지난 5월 13일 일요일 성북구 투어에 나섰다. 진작부터 길상사와 심우장과 최순우 옛집 등 성북구 일대를 한번 둘러보고 싶었는데 좀처럼 기회를 갖지 못하다가 친한 친구와 함께 큰 맘 먹고 나섰다.

한성대입구역에서 내려 6번 출구로 나와 걸었다. 성북동길을 따라 걷다보니 가로등 위에서 성북구다문화축제를 한다는 밀러천 배너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성북구와 다문화라, 뭔가 연결이 잘 안됐다.

물론 성북구 답사를 마친 뒤에는 알게 됐지만. 천주교한국외방선교회 간판이 있어서 골목을 따라 올라가 봤다. 고색창연한 건물을 기대했는데 아쉽게도 신축 건물이다. 그런데 이 골목에 수녀회, 수사회 등천주교 관련 건물이 많았고 기독교 계통인 경신고등학교도 있었다. 그래서 다문화인가?


 골목을 내려와 성북동 길을 다시 걸었다. 간간이 외국인들이 눈에 띈다. 선잠단지를 구경했다. 선잠단지는 길가에 있었다. 선잠단은 잠신으로 알려진 서릉씨를 배향하는 단을 쌓고 제사 지내던 곳이다. 조선시대 왕비들이 누에를 길러 명주를 생산하기 위해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다. 제사는 매년 3월에 거행했는데 1908년 제기동에 있던 선농단과 함께 사직단으로 옮겼고,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다. 그래서 선잠단‘지(址)’다.


 준비해 간 지도를 보니 최순우 옛집을 지나쳐왔다. 한성대역쪽으로 다시 내려갔는데 눈에 잘 안 띈다. 팻말이 너무 작다.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냈고,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란 책으로 널리 알려진 최순우 선생이 작고할 때까지 8년가량 머물렀던 집이다. 그런데 안타깝게 일요일과 월요일은 문을 안 연다. 일요일 문을 안 열면 못 올 사람이 많을 텐데 아쉽다. 다시 와야겠다.


 길에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따져보니 13일이 간송미술관 봄 특별전 개관일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우연히 날짜는 잘 맞춰 왔는데 줄이 너무 길다. 워낙 유명한 전시회라 아마도 이 계통 매니어들은 이 날을 손꼽아 기다렸을 것이다. 간송은 전형필의 호다.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오세창 선생이다. 오세창은 기자 출신으로 갑신정변 때는 일본에 망명하기도 했고 기미독립선언 때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3년간 옥고를 치른 애국지사다. 그는 서화에도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었는데 전형필은 이 오세창의 적극적인 권유로 일본으로 빠져나가는 우리 민족문화재를 수집했다. 그래서 간송미술관은 국보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미술관 중의 하나다. 1943년 ‘훈민정음’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전형필이 당시 집 다섯 채 값에 해당하는 2천 원을 지불하고 훈민정음을 입수한 얘기는 유명한 일화다. 간송의 뜻에 따라 지금도 간송미술관은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언제 들어갈지 몰라 아쉽지만 간송미술관 관람은 포기했다.


 선잠단지에서 길상사 쪽으로 방향을 잡아 걸으니 성락원이 나오고 성락원 주택단지도 나왔는데 자세히 보니 각국의 대사관저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아프가니스탄, 호주, 캐나다, 중국, 콜롬비아, 그리스, 앙골라, 스웨덴, 베네수엘라, 아일랜드 등의 대사관저가 모여 있다. 비로소 성북구다문화축제가 이해됐다. 그럼 왜 하필 성북동에 대사관저가 많지? 인터넷을 뒤져보니, 대사의 업무는 대부분 정치적인 것이 많은데 청와대 및 정부종합청사, 강대국의 대사관이 성북동에 가까이 있어 편리하다는 점과, 성북동이 있는 북악산은 청와대가 있어서 군 부대 및 경찰의 집중 경비지역이라 치안 유지가 비교적 잘 되어 있기 때문이란다. 그렇구나. 이제 성북구의 다문화축제에 대한 의문이 거의 풀렸다. 아마도 ‘다문화’ 하면 동남아 노동자를 떠올리던 버릇 때문에 더 이해가 안됐었나 보다. 성락원은 공사 중이라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조선 고종의 아들 의친왕이 살던 별궁의 정원이다.


 서울은 지금 소위 뉴타운, 재개발, 재건축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다. 물론 성북동도 예외가 아니다. 곳곳에 플랜카드를 붙여놓았다. 


 드디어 길상사에 도착했다. 한 사람의 나눔 정신으로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누리는 곳 길상사.


 다 아는 것처럼 길상사는 원래 권력자들이 드나들던 ‘대원각’이라는 고급요정 이었는데 이 요정을 운영하던 김영한(법명 길상화)님이 아무 조건 없이 송광사에 시주하였고, 1997년 길상사라는 절로 새롭게 탄생하게 되었다. 김영안은 시인 백석과의 이루어지지 않은 러브스토리로도 유명한데, 이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으로부터 무려 70년 후, 백석과의 사랑을 잊지 못한 그녀는 출판사 창비에 나머지 재산을 모두 처분한 돈을 기금으로 내놓았고, 출판사는 백석문학상을 제정했다. 건물 중 일부는 개보수 하였으나 대부분 대원각 시절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길상사는 법정스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계시던 절로도 유명한데 법정스님이 주도해 만든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의 근본도량이기도 하다. 서울 도심에 이토록 깊은 숲이 있다니, 그리고 이 좋은 곳에 아무나 와서 쉬어갈 수 있다니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절 곳곳에 연등을 매달아 놓았다. 부처님 오신 날이 멀지 않다. 몇몇 스님들의 일탈 행위로 불교계 형편이 말이 아니다. 그러나 아마도 대부분의 스님들은 나라 곳곳에서 도를 깨치기 위해 오늘도 수행정진에 힘쓰고 있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차를 한잔 마시고 한국가구박물관에 갔는데 역시 일요일은 휴관. 안타깝다. 삼청터널 쪽으로 길을 잡으니 아예 도로 이름이 대사관로다. 어느 나라 대사관저인지 건물이 으리으리하다.

 대사관로를 내려와 외교관 사택을 지나니 만해 한용운이 직접 지어살던 ‘심우장’이 나왔다. 1933년부터 돌아가신 1944년까지 살았던 집이다. 명색이 ‘선생님과 함께 읽는 한용운’이라는 책까지 펴냈으면서 심우장에 이제야 오게 되다니 민망하다.


 그런데 심우장 올라가는 길은 서울의 골목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허름하다. 마치 70년대 우리 동네를 걷고 있는 느낌이다. 길양쪽의 풍경이 이토록 극명하게 대비된다. 심우장은 북향집인데 남쪽을 향하면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게 돼 북향으로 지었다는 일화가 널리 알려져 있다. 심우장 이라는 글씨는 앞에서 말한 오세창 선생이 썼다.


 ‘심우’는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열 가지 수행 단계중 하나인 ‘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심우(尋牛)에서 유래한 것이다. 오랜만에 내가 쓴 책을 다시 꺼내 들어보니 기분이 새롭다. 내가 책에 쓴 해설은 다음과 같은 글로 마무리 된다.

  “만해는 <님의 침묵> 군말에서 ‘맛치니의 님은 이태리’라고 말했다. 만일 만해가 현재로 다시 살아 돌아온다면, 만해는 이 시대의 과제를 무엇으로 생각할까 참으로 궁금하다. 만해의 이 시대로 다시 살아온다면 만해의 님은 과연 무엇일까? ‘자주적으로 통일된 조국’ 아닐까? 맛치니는 이태리의 민주 통일을 위하여 싸운 혁명가였으며, 만해는 일제에 대항하여 싸운 독립 투사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우리 민족은 아직도 통일되지 못하고 있다. 우리 민족의 민주와 통일은 아직도 ‘침묵’이다. 우리 모두는 이런 분단 조국 속에서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들이다. 만해의 문학과 삶은 험난한 역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용기를 주며, 현실적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신념과 희망을 불러일으켜 준다. 만해의 끊임없는 실천과 행동,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신념과 사상의 일관성이야말로 만해 정신의 위대한 덕목이 아닐 수 없다. 백낙청은 그의 글 <시민문학론>에서 만해는 옛 한국의 위대한 전통시인이며, 한국최초의 근대 시인이며, 3.1운동이 낳은 최대의 ‘시민시인’이라고 격찬한바 있다. 향가, 고려가요, 한시, 시조 등 전통 문학을 현대적으로 계승하는 한편으로 외래 문학을 비판적이고 주체적으로 수용해 바람직한 의미에서 전통의 창조적 계승을 성취하고 있는 만해, 종교와 투쟁, 그리고 문학 예술이 함께 하면서도 실천과 사상, 그리고 일관성이 함께 빛나는 만해, 강직한 기개, 고고한 절조, 비타협적 투쟁, 불의에 대한 증오, 그냥 시인이라고 부르기에는, 승려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위대했던 만해, 주위가 혼란스러울 때마다 우리는 한용운을 다시 꺼내 읽자. 그래서 오늘 다시 한용운이다.”


 심우장에서 나와 성북구립미술관으로 왔다. 구에서 미술관을 운영하다니 부럽다. 윤중식전을 하는데 입장료를 받는다. 다리도 아프고, 돈도 내기 싫고 해서 그냥 나왔다. 유명하지도 않은데 무슨 관람료를 받느냐는 억하심정도 있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윤중식은 박수근 이중섭 김환기 유영국 등과 함께 활동했던 분으로, 국내 첫 상수(上壽ㆍ100세)전을 열고 있는 중이었다. 100세 생존 작가가 현역으로 활동하는 것도 드문 데 개인전까지 여는 건 국내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나의 무식함이 하늘을 찌른다.


 성북구립미술관 바로 왼쪽에 소설가 상허 이태준이 살던 ‘수연산방’이 있다.


 현재는 찻집으로 개조해 차를 팔고 있다. 김기림, 김유정, 정지용 등과 함께 구인회의 일원이었던 상허는 ‘복덕방, 까마귀, 달밤’ 등을 썼는데 해방 후 월북했다. 북카페의 이름이 구인회다.


 수연산방을 보고 요기를 하기 위해 광장시장으로 갔다. 빈대떡과 막걸리로 요기를 했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앉을 자리가 없다. 전통시장은 살아있다. 재벌이 절대로 따라 올 수 없는 콘텐츠로 승부를 봐야 한다. 광장시장은 또 육회가 유명하다고 해서 그리로 자리를 옮겼다. 아직, 서울은 돌아다녀볼 만한 곳이다.



* 이 글은 시인이 2012년 5월 성북동을 기행하고 쓴 글입니다. 글에 나오는 윤중식 화백은 2012년 7월 3일 타계하셨습니다.





신현수 시인은 충북 청원 출생으로 현재 인천의 한 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서산 가는 길>, <처음처럼>, <시간은 사랑이 지나가게 한다더니> 등의 시집을 냈습니다.


※ <성북동 사람들의 마을 이야기> 1호·창간호는 성북구청 2013 성북구 마을만들기 공모사업에 선정되어 사업비를 지원받아 간행되었습니다. 소개된 글은 2013년도에 쓰여져 잡지에 실렸으며, 서울마을미디어지원센터 2017 마을미디어 활성화사업을 통해 웹진으로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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