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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북 Jun 03. 2017

그리운 명랑 이발관 시절

[1호·창간호] 성북동 이야기│글 최성수

 내일이 옮긴 학교의 아이들과 첫 대면을 하는 날이라 이발이라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집을 나서는데 퍼뜩 그 이발관이 떠올랐다. 서울로 전학 와 처음 살던 동네, 남들은 이름만 대면 부잣집이니 도둑골이니 하며 눈이 휘둥그레지는 동네, 그러나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은 ‘아, 비둘기’하며 시를 떠올리는 동네, 성북동에도 이런 곳이 있을까 싶게 좁은 골목 끝에 자리잡은 이발관. 양철로 여러 번 덧칠해 삐뚤빼뚤 적어 놓았던 ‘명랑 이발관’이라는 간판조차 촌스러워 정겹던 그 이발관.


 그 이발관에 발길을 끊은 것이 벌써 20년이 넘는다. 같은 성북동이지만, 이사를 하고 나자 발길이 뜸해지게 되었고, 급기야는 단골 이발소를 옮기게 된 것이다.


'아직도 그 자리에 남아 있을까?'


 나는 자주 가던 이발소를 뒤로 하고, 그 옛날 동네를 찾아가 본다. 명랑 이발관으로 가는 길은 두 갈래다. 하나는 성북동 큰길에서 자동차 두어 대가 다닐 만한 언덕을 따라 올라가는 길이다. 그러나 그 길도 이내 좁아져서 차 한 대가 겨우 드나들 정도로 좁아지고, 마침내는 명랑 이발관 초입에서는 차는 다닐 수 없고 사람만 드나들 수 있는 길로 바뀐다.


 다른 길은 평지에서 좁은 골목을 따라 꼬불꼬불 돌아 올라가야 한다. 좀 뚱뚱한 사람 둘이 마주치면 한 사람은 몸을 벽에 밀착시켜야만 지나다닐 수 있을 만큼 좁은 골목이다. 몇 번 굽이를 튼 이 골목은 낮은 축대 위에 지어진 집들과 마주하게 되는데, 그 축대 위에 지어진 집의 제일 끝에 ‘명랑 이발관’이 이름과는 달리 아슬아슬하게 자리 잡고 있다.

 나는 언덕길을 통해 이발관 앞으로 갔다가, 이발관에 들어서지 않고 골목을 따라 다시 큰길까지 걸어본다. 이 길은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서울로 전학을 온 내가 날마다 휘젓고 다녔던 곳이다.



 그때 나는 고등학생이던 둘째 누나와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우리집이 바로 명랑 이발관과 처마를 마주대고 있는 축대 위의 서너 채 집 중의 하나였다. 대낮에도 불을 켜야 사물 분간이 가능했던 그 방, 그러나 전기요금 때문에 웬만하면 캄캄한 채로 지내야 했던 골방이 누나와 나의 자취방이었다.


 그 당시 우리가 주로 먹던 반찬은 통멸치가 서너 마리 들어간 김치찌개와 라면이었다. 아침 일찍 학교에 가는 누나가 재래식 부엌에서 곤로에 끓여 들여 놓아준 찌개를, 나는 마치 겨울잠에서 막 깨어난 어린 짐승처럼 일어나 부스스 대며 먹고 등교하곤 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내가 먹을 것은 라면이었다. 역시 까맣게 때가 전 곤로에 끓여 먹던 라면. 한 봉지에 다섯 개씩 들어 있던 그 라면은 점심인 때도 있었고, 더 자주는 누나와 나의 저녁이었다. 


 사람의 식성이란 경험에 의존하면서도 동시에 일정한 규칙이 없는 법인지, 나는 지금도 라면은 잘 먹지 않는다. 그때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가 하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론 김치찌개도 물리도록 먹었지만 여전히 지금도 김치찌개를 좋아하는 걸 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닌 듯싶다.


 통멸치가 들어 있는 김치찌개를 마주하면 나는 언제나 멸치부터 건져 먹곤 하는데, 아내는 그런 나를 보고 촌스럽다고 하지만, 나는 여전히 김치찌개에 들어 있는 통멸치가 가장 맛있다. 그 덤덤하고 무미한 멸치의 맛은 아마도 기억 때문에 더 내 입맛에 닿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시절, 봄 소풍이던가 아니면 가을 소풍 때였을 게다. 지금은 기억할 수조차 없는 무슨 일 때문에 나는 누나에게 된통 혼이 나게 되었다. 누나는 내 아랫도리를 벗기고 엉덩이를 짝짝 소리가 나게 때렸는데, 아픔보다는 내 엉덩이에서 울리던 소리와 어린 나이에 엄마와 떨어져 살아야 한다는 내 설움 때문에 엉엉 소리를 내어 울었다.


 한참 때리던 누나도 마침내는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는데, 누나 역시 겨우 고등학교 이학년이었고, 부모와 떨어져 동생을 책임져야 할 짐까지 지고 있었으니 자기 설움이 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동안 울던 누나는 갑자기 내 손목을 끌고 그 좁은 골목을 지나 가게로 가더니 이것저것 과자를 한아름 사주었다. 물론 내가 늘 먹고 싶어하던 사이다 한 병까지 산 누나는 아직도 눅진한 울음 끝이 남아있는 소리로 내게 말을 건넸다.


  "내일 소풍이지. 이거 너 다 싸가지고 가라."


 지금은 오십이 훌쩍 넘어버린 누나와 마흔 중반의 나는 가끔 그 시절 이야기를 하곤 하는데, 누나는 무엇 때문에 야단을 쳤는지, 나는 왜 야단을 맞았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그 날의 일들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선명하게 기억하곤 한다.

 우리 집에서 좁다란 길을 따라 명랑 이발관으로 이어지는 길은 우리들의 놀이터였다. 초등학교 학생인 내 또래 동네 아이들은 그 골목 좁은 곳에서 딱지치기를 하기도 했고, 그 좁은 곳을 휘저으며 구슬치기까지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의 놀이터는 명랑 이발관 앞이었는데, 제법 넓직한(지금 보면 손바닥만한 곳이지만) 그곳에서는 숨바꼭질이나 ‘다방구’와 같은 놀이를 하기에 적격이었다.


 해가 저물도록 놀다가 친구들은 엄마들의 저녁 먹으라는 소리에 모두 들어가고 말았는데, 불러 줄 엄마가 없는 나는 혼자 남겨지는 적이 많았다. 그러면 나는 괜히 쓸쓸해져서 시골에 계신 엄마를 떠올리며 눈물을 글썽이기도 하는 여린 성격의 아이였다.


 어쩌다 시골에서 아버지가 오시면 나는 그제서야 의기양양한 그 또래의 소년들 모습으로 돌아오곤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아이들에게는 부모만한 버팀목은 없는 것 같다.


 어느 날인가, 아버지가 오신 때였는데, 나는 우리 골방에서 주인집 아들과 마주앉아 알지도 못할 주문을 외워야 했다.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우리가 외워야 했던 것은 저 끔찍하고 유명한 국민교육헌장이었다.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 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 공영에 이바지 할 때다..."로 이어지는 그 암호 같고 의미를 알 수 없던 문장은 당시 이 땅에서 교육을 받는 모든 아이들이 다 강제로 외워야 하는 고문과 같은 과제였는데, 우리가 서로 마주보며 그것을 외우자 아버지는 그것도 중요한 숙제인 줄 아셨는지(하긴 중요한 숙제였다. 제대로 외우지 않으면 매를 맞아야 했으니까) 먼저 외우는 아이에게 맛있는 것을 사주겠다는 약속을 하셨고, 그 바람에 우리는 의미도 모르는 그 글을 목소리 높여 외우게 된 것이었다.


 명랑 이발관의 키가 크고 잘 생긴 아저씨는 우리 또래가 머리를 깎으러 가면 사람 좋은 웃음을 띤 채 사각사각 머리를 깎아주곤 했는데, 나는 그 이발소 창 밖으로 보이는 성북동 아랫동네 풍경의 낮고 잔잔한 모습을 좋아했다. 그래서 이발소에서 차례를 기다릴 때면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밖을 구경하곤 했는데, 특히 비 오는 날의 눅눅하고 가라앉은 풍경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이제 그 시절을 지나 먼 길을 걸어왔다. 지금 고등학교 3학년인 큰아이를 데리고 그 동네에 가 본 적이 있었다. 아이는 좁은 골목과 다닥다닥한 집들에 낯선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마치 오래 된 앨범 속에 숨겨져 있던 흑백의 사진을 보는 것처럼 마음이 착잡하고 쓸쓸해 졌었다. ‘얼마나 먼 길을 걸어야 소년들은 어른 되나’하는 밥 딜런의 노랫말이 떠오르는 그 동네를 지나, 나는 이제 정말 어른이 된 것일까?


 내 마음처럼 흐린 언덕길을 올라서자 아직도 명랑 이발관이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렇다. 그 집은 오래도록 그 자리에 앉아 어린 날의 나를 기다리며 세월을 견뎌온 것 같다. 여전히 낡은 간판에 멋없이 ‘명랑 이발관’이라는 문패를 내 단 채, 낮은 지붕을 머리에 이고, 어린 날 창 밖을 내다보던 나를 위해 세상을 향한 그 문을 열어 둔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닫이 문을 밀고 들어서자 이발사인 할머니가 느릿느릿 일어나 자리를 내주는데, 그 모습도 정지 화면처럼 시간에서 벗어나 있다. 머리를 깎는 이덕훈(69) 할머니는 이발사가 아니라 이웃집 할머니처럼 사각거리는 이발 가위 속에서 옛날 이야기를 들려준다.


 내가 기억하는 멋쟁이 이발사 아저씨의 뒤를 이어 가게를 맡게 된 것이 28년째라는 할머니는 북만주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지역에서 이발사인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이야기부터 시작해, 자신의 가족 이야기와 이발에 대한 경험과 철학까지 들려주는 이야기꾼이기도 하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자꾸 창 밖을 내다보았다. 때때로 그 창가에 매달려 바깥 세상을 내다보는 초등학교 5학년짜리 어린 내 모습이 그 창가에 어른거렸다.


 낡아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것 같은 이발의자와, 청테이프의 힘으로 벽에 간신히 붙어 있는 것 같은 유리 거울과, 할머니의 손가락에 닳고 달아 세월이 휘휘청청 감겨 있는 것 같은 이발 가위와, 나직나직한 말투로 어린 날로 안내해주는 할머니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이발관을 나서자 꽃샘 바람이 내 얼굴을 향해 달려왔다. 그 바람은 한동안 지워졌던 시간 속에서 불어오는 것 같았다.


 나는 언덕길을 내려오면서 자꾸 뒤돌아보곤 했다. 거기 낡아 스륵스륵대며 돌아가는 이발관 표시등이 있었고, 이름은 명랑하지만 그러나 풍경은 오히려 쓸쓸하거나 아련한 명랑 이발관이 있었고, 1960년대의 어느 해, 서울의 풍경 속에서 낯설어 하던 내 어린 날이, 뒤돌아보는 나를 향해 ‘너 지금 어디쯤 가고 있느냐?’고 묻고 있었다.



* 이 글은 <오 마이 뉴스>에 발표했던 것입니다. 명랑이발관은 지금은 없어지고, 할머니는 큰 길 쪽으로 이발관을 옮겨 ‘새 이용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최성수 시인 / 성북동 주민



※ <성북동 사람들의 마을 이야기> 1호·창간호는 성북구청 2013 성북구 마을만들기 공모사업에 선정되어 사업비를 지원받아 간행되었습니다. 소개된 글은 2013년도에 쓰여져 잡지에 실렸으며, 서울마을미디어지원센터 2017 마을미디어 활성화사업을 통해 웹진으로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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