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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북 Jun 05. 2017

국밥과 빈대떡 맛에 하루가 즐겁다

[1호·창간호] 우리 가게를 소개합니다|글 박진하

성북동은 우리의 운명이다.


 성북동은 사람을 끄는 마력이 있다. 모든 일이 지나고 보면 처음부터 그리 되려고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 가며 운명처럼 결정되는 측면이 있다. 그렇게 보면 성북동은 우리의 운명이었다.

 식당이나 카페를 운영하려 했던 우리는 그 준비과정으로 창업교육과정을 수료하고 그에 따른 준비를 조금씩하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위치이다. 좋은 위치에 자리 잡는 것은 절반의 성공을 의미하기 때문에 신중해야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가장 먼저 한 일이 지도를 사는 것이었다. 그런 후에 좋은 점포를 찾기 위해 2개월여를 우리는 걷고 또 걸었다. 한참 무더운 여름을 우리는 그렇게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상권으로 떠오르고 있는 미아지역에서 시작하여 안암동, 종로를 거쳐 인사동과 삼청동을 훑어가며 찾아보았지만 허사이었다. 괜찮다고 생각되면 그 가게에 붙어있는 권리금이 너무나 높거나 아니면 그 장소가 가진 매력이 부족했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머물려고 했던 장소는 삼선시장이었다. 이거다 싶었다. 일차적으로 점포를 정해두고 가격 타협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놈의 권리금이다. 쉽게 조정이 안 되고 있다. 그들이 요구하는 만큼 다 주고 입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최종 결정을 하기 전에 객관적인 시야에서 그 점포의 가치를 확인해 줄 수 있는 창업 컨설턴트가 필요했다.

 그는 우리가 정한 그 점포를 계약하기 전에 성북동 일대를 좀 더 찾아볼 것을 조언하고 있었다.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 온 우리는 그 날로 성북동으로 직행했다. 그런 다음 몇 번을 거친 끝에 도달한 곳이 현 위치이다. 그렇게 뜨거운 여름을 고스란히 담아내며 찾아다닌 고행은 마감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옛날, 그 시절의 고향식당


 그 옛날 그 시절에 있음직한 그런 식당이고 싶었다. 조선의 정궁, 경복궁 후원에 위치한 민속박물관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그곳에 실물 크기로 재현한 선술집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교과서였다. 그것을 사진으로 찍어 공사업체에게 보여주며 그런 식으로 만들도록 했다. 식탁과 의자는 오랜 한옥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얻어낸 원목을 이용하여 제작했다.

 

 그런 다음 창문에는 우리가 좋아하는 한국화를 부착했다. 그 과정에서 정말 우연하게도 우리 식당과 딱 어울리는 그림을 찾게 되었다. 겸재 정선 선생님이 그리신 진경산수화이다.

 한양을 배경으로 그리신 여러 산수화를 보다가 동소문이라고 쓰여진 그림을 보게 된 것이다. 기가 막히게 딱 맞아 떨어지는 그림이었다. 당시 겸재 선생님이 그 그림을 구상했던 위치가 우리 식당 부근이라고 주장하고 싶을 만큼 우리 식당을 위한 그림이었던 것이다.


 그림 속에 보이는 성북천은 식당 앞을 가로지르는 큰 도로가 되었다. 그 그림을 중심에 두고 여러 한국화를 배치하였다.

 어느 날인가, 간송미술관에서 춘계 전시회를 개최하던 그 때였다. 수수한 옷차림을 하신 일본 여성화가 한 분이 홀로 방문하셨다. 작년 가을 전시회를 하던 시기에 처음 찾아 주시고 올 봄에 두 번째로 오신 것이다. 부족한 일본어 실력을 필담으로 메워가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 동소문 일대를 그리신 그림으로 화제가 넘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말하기를 우리 산수화는 명당을 위주로 그려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간송미술관이 위치한 장소 또한 하나의 명당이라는 것이다. 그 순간 뒤통수를 망치로 맞은 듯 큰 쇼크를 느꼈다. 의외였다.

그러고 보니 간송미술관도 그렇고 그 그림 속에 있는 성북동도 명당이었던 것이다.

 한양수도의 좌청룡은 낙산이다. 백두산의 힘찬 기운이 태백산을 타고 흘러내려와 수도 서울의 북쪽, 북악산에 머물었다가 이것이 다시 왼쪽으로 흘러 내려와 자리 잡은 곳이 성북동이다. 지금은 복개되어 볼 수 없으나 맑은 물이 앞으로 지나가고 있으니 이른바 산수가 좋은 명당일 수밖에 없다. 마을 앞으로는 맑은 물이 흐르고 뒤쪽에는 푸른 숲이 있으니 사람들이 살기 좋은 땅이었던 것이다.


디미방과 음식 그리고 맛


 나름 오래 동안 식당 창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김치 명인에게 김치를 만드는 방법도 전수 받고 소문난 식당에서 일을 하며 몇 년 동안 다져왔다. 그러나 음식 품목을 결정하는 과정만 보면 치밀한 계획보다는 그 때마다 발생한 우연에 의해 전개된 측면이 더 강하다.

 먼저 소고기 국밥이 그렇다. 이것은 어릴 때 먹던 그 국밥을 재현한 것이다. 소 잡뼈를 며칠 동안 우려낸 사골국물이 기초이다. 그런 다음 한우 목심에 대파와 무를 같이 넣어 끓여낸다. 사골 국물이 준비된 상태에서도 두세 시간이 더 필요한 작업이다. 시간이 너무 많이 소요된다. 집에서 단순하게 이 국밥 몇 그릇을 먹겠다고 끓여내는 것이 낭비이다. 그러니 식당에서의 판매품목으로는 무엇보다 적합한 것이었다. 근대적인 대중식당이 만들어지고 가장 처음 판매되기 시작한 것이 이 소고기 국밥이었다고 하니 더 그럴듯한 품목이었다.

 이 국밥은 삼계탕과 마찬가지로 여름철 보양탕이다. 우리 조상들은 그 동물이 가지고 있는 발가락이 홀수인가 짝수인가를 확인하여 음양을 결정하였다. 큼직한 발톱 하나만을 간직한 한우는 양기가 풍성한 대표적인 동물이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한우는 먹 거리보다는 농사를 짓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재산이었다. 소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 조상은 소뼈를 푸욱 고아 사골을 내고 그 속에 고기를 넣어 만든 국물을 먹는 방식을 개발한 것이다. 사실 소고기 국밥은 국물 맛이 포인트라고 해야 한다.


 국밥 외에 가장 많이 팔리는 것이 제육볶음이다. 이것은 당초 안주류로 생각해서 삽입된 메뉴인데 식사로 대용되고 있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이것은 일체의 조미료 없이 만들어지고 있다. 사실 조미료만큼 자주 논란이 되고 있는 것도 드물 것이다.

 우리는 감칠맛에 열광하고 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우리를 후원하고 계신 손님에게 들은 에피소드이다. 어떤 유명한 식당 창업 컨설턴트의 이야기라고 한다. 식당을 개업할 목적으로 모집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고가의 세미나를 개최하고 있었다. 먼저 음식을 만들어 다들 나누어주고 시식하라고 했다. “맛이 어떻습니까? 괜찮아요?”라고 했더니 하나같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니라고 하더란다. 이번에는 조미료를 넣고는 만들어 먹어보라고 했다. 그래도 반응은 그다지 다르지 아니했다. 그러자 강사는 조미료를 큰 국자로 푸욱 퍼서 세 번이나 넣고 조리를 했다. 그런 후에 다 같이 시식을 하게 했더니 모든 참가자의 입맛을 만족시킬 수 있었다 한다. 결론적으로 그는 가장 쉽고 명쾌하게 맛의 비밀을 전수한 것이다. 사실 이 조미료가 유해하다는 확실한 증거도 없다. 그러니 나쁘다고 하는 것도 아니다 싶다.

 다만 우리 식탁에 감칠맛만 남아있고 다른 맛은 다 사라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들 때도 있다. 모든 식품에는 그들이 가진 고유의 맛이 있다. 그런데 모든 음식에 조미료를 넣어 그 고유의 맛을 잃게 한다면 그것은 아니다 싶다. 마치 이 세상은 수많은 색깔로 만들어진 총천연색의 아름다운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흑백으로 바꾸어 본다면 참으로 아쉬운 일이 되고 말 것이다. 돼지고기는 달콤하고 고소한 그대로 고유의 맛이 있고 오징어에는 담백함과 씹을수록 느껴지는 독특한 맛이 있다. 그래서 우리 조상은 식재료가 가진 그 맛을 살리는 방식으로 음식을 만들었다. 다만 소금과 매실을 이용하여 맛의 풍미를 더하였던 것이다.


 다음은 막걸리 안주로 그만인 빈대떡이다. 일반적으로 판매되고 있는 빈대떡은 튀김에 가깝다. 기름을 듬뿍 넣어 튀기듯이 요리를 한다. 그에 반하여 기름을 적게 넣고 옅은 불에 오랜 시간 굽는 방식을 채택한 우리의 빈대떡은 시간이 많이 걸린다. 여기에 국산 돼지고기를 볶아 녹두 속에 넣어 굽는다. 그래서 이 빈대떡을 먹어 본 분들은 한국식 돈가스라고도 하신다.

 모든 음식이 이런 식이다. 그러다보니 조금은 늦고 효율은 떨어진다. 조금이라도 빨리 만들어 제공되는 요리를 선호하는 분들보다는 다소 늦지만 가정에서 가족을 위해 정성껏 요리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음식을 찾는 분들이 좋아할 만한 음식이 되어가고 있다.


식당은 소통하는 공간이다.


 식당은 서로 교류하고 소통하는 공간이다. 시작은 주인이 하지만 좋은 식당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좋은 손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코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듯하다.

 개업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간송미술관에서 전시회를 하게 되었다. 개관식을 하루 앞두고 관장님과 화가 한분이 오셨다. 빈대떡과 막걸리를 드시고 기분이 좋아지신 화가 분이 그림을 그려 주신단다.

이런 좋은 일이 있나 싶어 준비해 드렸더니 식탁위에는 막걸리와 빈대떡을, 그 뒤편으로는 앞 머리카락이 몽땅 빠진 주인장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리셨다. 그리고 그림 속의 당신은 외눈으로 빈대떡을 지켜보고 있다. 마치 빈대떡이 맛있어 그것 밖에 안 보인다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는 ‘이렇게만 그리면 재미없다. 우리 주인장에게 풍선이나 하나 달아드릴까?’ 하시면서 가는 실위에 메어 달린 둥근 풍선을 그린다. 그리고는 우송이라고 서명을 하셨다. 95년도에 이중섭 미술상을 수상하신 원로화가이셨던 것이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이를 계기로 또 다른 화가 분들이 오셨다. 먼저 국전 서예부문 심사위원이신 선생님이 ‘無酒不立(무주불립: 술에 취하지 않고는 일어나지 않겠다)’이라고 쓰시고 붓을 놓자 이에 호응이라도 하듯이 또 다른 화가 선생님은 ‘山歌野唱(산가야창: 산이 먼저 노래하니 앞의 뜰도 그 화음에 맞춰 노래한다)’으로 화답하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 식당 보물 1호가 만들어 진 것이다.


 그 후 예쁜 꽃들의 이야기를 고운 감성으로 전해 주시는 시인님도 오셨다. 그 다음 날 또 사모님은 직접 만드신 맛있는 물김치를 들고 오신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성북동의 인심이었고 다정한 환영인사이었다. 이처럼 분에 넘치는 사랑으로 성북동은 우리를 반겨 주셨다.


 이런 후원과 응원 속에 자라온 우리 식당도 벌써 개업한지 일주년이 되었다. 때로는 고되기도 하고 어려운 난관도 없지 않았으나 사람들 간에 오가는 따뜻한 인정을 맘껏 향유할 수 있는 그런 시간들이었다.

 과분할 정도로 많은 음식을 주문하시고 말없이 맛있게 먹고 가신 예쁜 성북동 마님들, 신분을 감추시고 오셔서는 그 옛날 동료들과 함께 송년회를 하고 가신 어르신 분들, 집에서 손수 담근 귀한 매실을 가져다주시거나 격려와 조언을 해주시던 형님들, 직접 만든 피자나 좋은 음악을 담아 선물로 남겨주신 젊은 언니들, 맛있다고 칭찬해 주시면서 작은 친절에도 감격해 주시는 젊은 총각님들, 그저 좋은 커피가 아니면 안 된다는 장인정신으로 커피전문점을 운영하시는 성북동 콩집을 비롯한 주변 상인님들, 특히 이런 지면을 허락하시고 추천해 주신 선생님들이 계셔서 행복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박진하 국밥집 디미방 주인



※ <성북동 사람들의 마을 이야기> 1호·창간호는 성북구청 2013 성북구 마을만들기 공모사업에 선정되어 사업비를 지원받아 간행되었습니다. 소개된 글은 2013년도에 쓰여져 잡지에 실렸으며, 서울마을미디어지원센터 2017 마을미디어 활성화사업을 통해 웹진으로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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