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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북 Jun 10. 2017

성북동 옛 이야기

[1호·창간호] 글 박용선· 그림 김철우

 서울성곽 부근에 조용하고 따뜻한 마을, 성북동이 있습니다. 북정마을이라고 하면 알까요, 이곳은 아침해가 밝아오기 시작하면 서울인데도 해머리가 제법 일찍 보이는 동네입니다. 젊은이들보다는 어르신들과 아이들이 많아, 새해첫날에는 해맞이 행사도 하고 정월보름날 윷놀이 대회도 하고 봄가을 축제도 하는 조용하고 작은 마을입니다.


그 시절 봄여름 가을 겨울 성북동 사계절 먹거리


 겨우내 얼었던 자연이 봄이 되면 아직 쌀쌀한 봄바람이 개천가 돌틈 사이 제비꽃과 민들레를 피우고 우물 속 얼음을 녹여, 동네 아주머니 물 길어 오는 수고로움을 덜어주던 그런 조용한 마을이었지요. 양지바른 언덕에 파릇파릇한 냉이와 돌 씀바귀, 밥상 위로 올라오길 기대하는 봄나물들이 가득한 사람살이 몇 안 되는 작지만 풍성한 이 곳. 사계절의 경계가 뚜렷하고 사람 사는 모든 생활들이 자연의 흐름과 함께 하던 옛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시절, 봄이면 얼마 안 되는 텃밭에 시금치와 아욱 같은 것을 심고, 여름이면 상추, 쑥갓, 고추, 옥수수를 먹고, 가을이면 배추와 무를 심어 다가올 겨울을 준비하곤 했습니다. 보릿고개를 기억하시는지요. 수확하는 쌀이 부족하여 배급받은 밀가루로 칼국수를 만들어 끼니를 해결하던 그 때. 시커먼 보리밥에 된장국 한 그릇, 두부를 만들고 남은 비지를 사다 찌개를 해 먹었던 것도 어렴풋이 생각이 납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는지, 어렵던 그 시절의 가난했던 먹거리들을 요즘 사람들은 별미로 찾아다니며 먹고 있더군요. 참 신기합니다.


 동네 사람들 대부분은 형편이 어려웠기에 생활이 비슷했고, 지금 아버지 연령 즈음에 계신 분들은 인쇄업이나 제조업에 종사하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누런 봉투에 봉급을 한 달에 2번 타는데, 늘 그날 저녁이 기다려졌었습니다. 퇴근길에 꼭 ‘ABC 동물과자’를 사 오셨기 때문이었지요.


그 시절 그 생활


 봄이면 아카시아 꽃향기가 창문 틈을 통해 방 안 가득 찰 성 싶은 것이, 지금에서야 그랬던 것으로 기억나는 걸 보아 그 때 생활로는 그 향기를 느낄만한 여유는 없었나 봅니다. 그래도 더운 여름에는 뒷동산에 있던 제법 오래 된 오동나무-지금은 죽고 없지만- 그늘 아래에 가마니를 깔고 앉아, 장기를 두며 더운 여름 날씨를 피하시던 어르신들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저녁밥을 먹고 해가 지면 밤에는 아이들과 아주머니 차지였지요. 그 때 그 가마니에 누워 가만히 하늘을 보면, 별이 초롱초롱한 밤 풍경과 짙은 오동나무 향기로 더위를 잊던 서울의 작은 우리 동네였습니다. 동네에 잔치나 궂은 일이 생기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한마음으로 일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시골 동네마냥 이웃집 일을 다 알고 지내는 훈훈한 인심도 있었지요. 지금과는 많이 다르기는 하지만, 서울 안에서도 아직까지 그 모습이 보이는 동네가 바로 우리가 사는 이 동네입니다.


어린 시절 성북동 놀이


 그 시절, 제가 어린아이였다는 게 참 행복했고 지금 생각으로는, 그시절의 이 동네에서 나고 자란 것이 천복(天福)이라 느껴집니다. 1년 365일 내내 자연과 함께 놀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가지고 노는 요즘 아이들 입장에서는 흥미를 느끼지 못할테지만, 분명히 다른 매력이 있었지요. 그 중에서도 제가 자란 성북동 우리 동네는 단언컨대, 최고의 놀이터가 아니었나 합니다.


 예전 성북동 뒷산에는 작은 실개천(川)이 있었는데, 그 주변은 온통 동네 아이들 차지였습니다. 올챙이 잡아 집에 가져오기, 나뭇가지 잘라 칼싸움하기, 술래잡기, 연탄재 던지기, 다방구놀이, 딱지치기, 구슬치기…. 놀거리야 무궁무진합니다. 봄이 되면 잡초 섞인 봄나물도 캐고, 아카시아 꽃 따먹다가 산지기 아저씨한테 쫓겨 줄행랑치다 낭떠러지로 떨어져 다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여름철 방학이 시작되면 능금 사러 세검정 자하문 너머 밀가루 포대자루 메고 하루 종일 걸어서 다녀왔던 일도 생각납니다. 소나기가 온 뒤에 따먹는 산딸기와 버찌, 보리수 열매 맛은 맛보지 않은 사람은 말할 수 없는 최고의 꿀맛입니다. 누구나 그렇듯이 개학 전날 방학 숙제 때문에 고생은 많이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놀았던 기억들이 너무 행복한 추억입니다. 


 가을을 지나 겨울로 넘어가면 팽이치기, 불장난, 깡통차기, 대보름날 깡통 돌리기, 연날리기 같은 또 다른 놀이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지요. 특히 골짜기에 자리한 우리 동네는 연을 날리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던 것으로 보아, 겨울 연날리기 명소였던 것 같습니다. 지금의 북정회관(할아버지 노인정) 자리에는 연난산이라는 이름의 작은 언덕이 있었습니다. 연을 한번이라도 날려본 사람은 알겠지만, 바람이 잘부는 언덕 위만큼 연을 띄우기 가장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저어기 앵두 밭 너머에는 방패연을 만들어 파는 연 도사 아저씨가 있어 설날에 세뱃돈을 받은 아이들이 연을 사서 이 곳에서 연날리기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연날리기 하면 연싸움이 빠질 수 없는데, 군복 수리할 때 사용하는 아주 튼튼한 국방색에 사기를 곱게 빻은 가루와 아교를 같이 풀어 실에 메겨-사기를 메긴다고 합니다- 연싸움을 하여 상대방 연줄을 끊어낼 때의 기분이란! 이 싸움의 강자가 되려면 실을 풀고 감으면서 바람을 잘 이용하는 기술이 필요했답니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


 우리 동네에는 쌍다리라는 버스정류장이 있습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성북초등학교 주변으로 작은 나무다리와 주(主)다리 2개로 이루어진 쌍다리가 있었습니다. 그 아래로는 삼청각 윗 부근에서 시작하여 성북구청 뒤로 흘러 대광고등학교 까지 흐르는 성북천(川)이 있습니다. 최근 몇 년 전, 삼선교 주변 복구작업을 마쳐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즐겨찾는 예쁜 쉼터가 되어있지요. 그 옛날, 이 천(川)을 건너가려면 구멍이 숭숭 뚫린 철판다리나 그 아래에 돌을 놓아만든 징검다리를 건너야 했는데, 머리 큰 내 친구 ‘짱구’가 장마철에 징검다리에서 중심을 잃어 거꾸로 처박혔던 웃지 못할 기억도 납니다. 그 친구 지금은 뭘 하고 사는지, 여전히 머리가 큰 지 알 길이 없네요. 예전에는 물이 깨끗해서 봄이 되면 동네 아주머니들이 겨우내 묵은 빨래를 하던 곳이 바로 앵두 밭 너머 개천, 지금의 성북천(川)이었습니다.


 이 쌍다리를 건너 좌측 언덕배기를 쭉 올라오면 지금의 북정노인정이 있는 동네가 제가 어릴 적부터 나고 자란 동네입니다. 뒷산에 흐르던 작은 실개천(川)은 아래로 내려가면 쌍다리에서 성북천(川)과 만났고, 위로 올라가면 서 동네 식수로 사용되던 6개의 돌우물이 계단식으로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이 우물들은 식수로 사용하기 위해 문을 닫아 관리되었고, 그 문 열쇠는 동네를 관리하는 어르신이 지니고 계셨습니다. 매일 아침, 우물에 가서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물지게에 지고 오던 생각이 납니다. 물맛 좋은 이 우물은 우리 동네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아주 중요한 시설이었음과 동시에, 매년 초겨울 산제를 지내 동네 사람들을 지켜주는 역할도 톡톡히 했지만 언젠가 큰 장마가 지난 후에 산사태로 인해 그 자취를 감춰버렸습니다. 동네 뒷산 안에는 서낭당이 있어 가끔 영화나 드라마 촬영지로도 쓰였는데 그 안에는 연못이 3개나 있어 여름에는 더위를 피하기 위해 많은 아이들이 멱을 감곤 하였지요.


 내내 평화로웠던 것만 같은 우리 동네에도 무서웠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1968년 1.21사태가 바로 그 때인데, 지금은 목사로 활동하고 계신 김신조가 동네 뒷산으로 넘어 올 때에 서울은 물론이고 전국의 분위기가 살벌하였었습니다. 당시 초등학생있던 저의 기억으로는 꼭 전쟁이라도 나는 것 같았으니 말입니다. 먼지가 자욱한 가운데 총소리가 사방에서 들렸고 헬기로 대포를 실어 나르는 모습을 생생히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사건 이후로 하나 둘 동네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뒷산에는 군부대가 들어섰고 산도 자유롭게 들어 갈 수 없도록 통제를 하였습니다. 성곽 주변의 무허가촌은 철거를 감행하여 주민들을 신정동으로 이주를 시켰으며, 뒷산에 남아있던 3개의 약수터도 모두 철조망 안으로 감춰지고 말았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우물에서 식수를 길어 먹었던 동네였는데, 이후 전 가정에 수도가 공급되어 생활이 조금씩 나아진 것 같습니다. 1970년대 말에는 곳곳에 전신주와 전화선도 들어왔고, 현재 우리 동네를 둘러나가는 소방도로도 그 때 만들어 졌습니다. 마을은 빠르게 많은 발전을 하였고, 여전한 것은 동네 사람들뿐이었습니다. 몇 년 전부터는 서울성곽길을 예쁘게 조성하여, 덕분에 동네를 통해 성곽길로 오르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예전에는 그저 사람 사는 동네였는데, 지금은 주말이나 휴일에는 멀리서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고 날이 선선한 봄 가을 철이 되면 사람들의 발길이 늘 머물러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사는 냄새’나는 동네


 나이 드신 어르신들이 많은 우리 동네는, 아직도 사람사는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좋습니다. 아침이 되면 서로 만나 담소를 나누고, 꼭 노인정이 아니더라도 사람이 앉아있는 곳이면 하나둘 모여, 결국 한 자리가 되곤 하지요. 나이드신 어르신들은 앞집 개똥이네, 건넛집 순이네 이집 저집 참견을 하시는가 하면, 모인자리에서 음식을 만들어 나눠먹기도 하며 하루가 가는지 모르게 정겹게 사십니다. 그 모습을 보면 서울 안에 흔치 않은 사람 사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다 흐뭇합니다.

 

 요즘 같은 가을날 오후, 뒷곁에 나와 있으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지고 저멀리 비치는 따뜻한 햇살과 깊어가는 가을 내음에 흠뻑 젖어들곤 합니다. 발아래 돌 틈에 듬성듬성 나있는 풀들이 누렇게 물들어가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올 한해도 다 갔구나하는 시간의 흐름을 알아채곤 합니다. 아마도 따뜻하고 조용한 우리 동네라서 그 한가로움과 아쉬움을 더 깊게 온전히 느낄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서울 하늘 아래 어마어마한 빌딩 속에 살지는 않지만, 동네사람들과 어깨 부딪히며 마음만큼은 그 어느 부자 못지않은 이 곳 성북동에서 살고 있다는 것에 고마운 생각이 드는 요즘입니다.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몇 년전부터 재개발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있는데 혹여 우리 동네의 이러한 모습들을 잃게 될까봐 마음 한 켠이 편하지는 못합니다. 그나마 이 동네에 오랫동안 거주하면서 사람사는 냄새 하나로 다같이 살고 있는데, 삭막한 도시의 빌딩숲 속으로 그 모습이 사라져, 옛 추억과 지금 사람들의 정(情)까지 함께 변할까봐 안쓰럽기만 합니다. 유럽의 어느 마을처럼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여 그 본연의 모습을 후대에까지 전하는 것도 좋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나고 자란 동네라 더 그런 것 같지만, 서로 알고지내며 소박하고 두런두런하게 사는 모습이야말로 우리 동네가 지금까지 그런 향기를 지닐 수 있는 방식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또 그리하여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는 성북동 사람들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바로 ‘사람사는 냄새’가 나는 동네에 사는 사람들 말입니다.




박용선 성북동 주민



※ <성북동 사람들의 마을 이야기> 1호·창간호는 성북구청 2013 성북구 마을만들기 공모사업에 선정되어 사업비를 지원받아 간행되었습니다. 소개된 글은 2013년도에 쓰여져 잡지에 실렸으며, 서울마을미디어지원센터 2017 마을미디어 활성화사업을 통해 웹진으로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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