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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북 Jul 05. 2017

집, 사람 그리고 시간

[2호] 사라지기 쉬운 현수막 프로젝트|글 최영환

  꼬불꼬불 가파른 골목길을 따라 줄줄이 늘어 선 한옥과 양옥 그리고 저층 공동주택, 만해 한용운이 살았던 심우장과 소설가 이태준이 살았던 고택을 카페로 개조한 수연산방, 그리고 최순우 선생 옛집 등 그 주인만큼이나 우리 건축사에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 근대 도시한옥이 즐비한 이곳. 성북동 골목길의 풍경은 오늘도 여전하다. 다만 재개발 반대 주민들이 이곳저곳에 걸어 놓은 ‘붉은색 현수막’ 만이 그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마치는 종착지를 알리는 이정표처럼 남겨져 있을 뿐이다.


  현수막은 공적 공간 안에서 자기 표현의 적극적인 수단임과 동시에 그것의 존재가 공간의 정체성을 규정짓기도 한다. 오늘날 성북동의 풍경은 집집마다 내걸린 붉은색 현수막에 가려져 과거의 고즈넉함은 간데 없다. 우리는 그 현수막 위에 새겨진 ‘죽음을 불사하며 내 집을 지키겠다!’는 격정적인 문구에서 거주민이 처한 상황의 절박함과 문제 해결의 시급함을 절감한다. 동시에 이 절규의 문구들이 새겨진 수많은 현수막들은 당사자는 물론 주변 이웃들의 일상마저도 투쟁의 장으로 만들어버렸다.


  <사라지기 쉬운 현수막> 프로젝트는 2년 전 재개발과 관련해 지역의 주민들이 첨예한 갈등을 겪고 있던 시기에 기획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일터와 집이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극단적인 위기 상황에서 주민들이 예술을 매개로 자신의 삶을 조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요즘은 주민들 간의 ‘개발과 보존’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이 잦아들고 재개발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우세해지면서 주민들이 느끼는 집단적 위기감 또한 진정되는 분위기다. 그럼에도 성북동 주민들은 그 현수막을 거둘 생각이 없어 보인다. 이들에게 이 작은 천 조각은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초조, 이로 말미암은 무력감을 잠시나마 잊고,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주는 도구인 셈이다.


  <사라지기 쉬운 현수막> 프로젝트는 주민들에게 새로운 형태의 자기 표현 수단을 제안한다. 원색조의 현수막은 건축물의 일부처럼 설치된 조형물로 대체된다. 작은 거울 조각들로 이루어진 이 조형물은 태양빛을 반사해 만들어내는 빛의 조합을 통해 주민 각자가 생각하는 ‘내 공간의 의미’가 담긴 짧은 문구로 주변 도로 위나 담벼락에 드리우게 된다. 그 ‘빛의 현수막’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형태를 달리하며 그 존재를 드러내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이를 통해 주민은 재건축이라는 집단적 갈등 상황 속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제한되었던 자기 표현의 물리적 영역을 한시적으로나마 확장한다.


 “삼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 가끔 이 집에 놀러 오시나요”

 “아름다워라 삼대가 사는 이 집”

 “폭염세월 견디고 곱게 물들 성북동”


  사실 재개발로 비롯된 사회적 갈등이 공동체 내부의 반목만 초래한 것은 아니다. 그 대가로 우리는 그간 돌이켜 보지 못한 개개인의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삶의 가치를 스스로 바라볼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성북동 주민들이 쓴 이 글들은 그 ‘반추’의 결과물이다. 더하여 거창한 개발의 역사에서 너무도 쉽게 지워져간,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사적 공간’에 관한 자기 기록이다. 마치 태양빛의 반사를 통해 잠시 동안 주변에 머물다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리지고 마는 이 프로젝트의 결과물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록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름과 동시에 다시 쓰일 것이다.



최영환은 미술가이다. 그동안 성북동에서 ‘동네 스토리 닷컴’이라는 마을 방송을 통해 주민과 호흡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를 마련하기도 했다. 이 글에 나오는 <사라지기 쉬운 현수막>은 햇볕에 반사되는 거울을 통해 성북동 주민의 생각을 글자로 새기는 공공미술 작업이었다. 그는 국립 현대 미술관의 지원으로 지난 6월부터 7월 사이에 성북동 3구역의 세 곳에 이 햇볕 현수막을 설치하는 작업을 했으며, 이 글은 그 작업에 대한 이야기다.


※ <성북동 사람들의 마을 이야기> 2호는 서울마을미디어지원센터 2014 마을미디어 활성화사업에 선정되어 사업비를 지원받아 간행되었습니다. 소개된 글은 2014년도에 쓰여져 잡지에 실렸으며, 2017 동 사업을 통해 웹진으로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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