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호] 문재환씨가 살아온 길|정리 박진하
2007년쯤 중국 항주로 출장을 떠난 적이 있었다. 해외출장을 가면 낮에는 시간이 없으므로 아침 일찍 일어나 산책을 나가곤 했다. 새벽 5시에 나와 서호로 나가보니 이건 별천지다. 전 시민이 다 나온 듯하다. 한편에서는 단체로 모여 조깅을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기체조를 한다. 조금 지나다 보니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를 나눈다. 때론 박수도 치고 함박웃음을 터트린다. 이건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장면이다. 중국의 앞날은 창창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의 파고다 공원을 지나다 보면 무기력하게 앉아 있는 노인들이 볼 수 있다. 이런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노라면 중국의 건강한 아침 풍경과 겹쳐 보인다. 노령사회로 전환되어가는 시점에서 우리나라에서의 노인 건강문제는 커다란 사회문제이다. 우리도 중국처럼 노인 분들이 건강하게 아침 운동을 할 수 있게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동네에 그런 분이 계신다. 문재환 어르신이 그런 분이다. 1947년생이면 만 67세이다. 그런데 지금도 조기 축구를 좋아한다. 여전히 활기차게 직장생활도 한다. 다 은퇴한 시기에 현직을 유지하고 있다.
한 번은 우리에게 다가와 ‘성북동에서 무엇을 하려면 날 먼저 찾아와야지요.’ 라며 인사를 청한다. 성품도 괄괄하시다. 당초 인터뷰 질문지를 가지고 하나씩 정리하려고 했던 시도는 시작부터 무너지고 말았다. 질문에 관계 없이 주제를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가며 청산유수로 말씀하신다. 그래서 인터뷰 형식이 아니라 취재로 형식을 바꿀 수 밖에 없었다.
축구를 사랑한 전라도 소년의 질풍노도
그는 김제에서 태어났다. 소년기에는 만경강 교각 밑을 놀이터 삼아 놀았다. 당시 유행하던 통기타를 가지고 노래하며 밤을 지새기도 했다. 짓궂게 장난을 치던 개구쟁이 소년들이었다. 건너 마을 옥구에서 물을 길러 오는 젊은 새댁들을 희롱하다가 마을 싸움으로 번지기도 했다.
그러다 중학교 3학년 때 축구라는 스포츠를 만나게 된다. 그저 좋았단다. 그런 와중에 서울 중앙 시장에서 과일 장사를 하던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상경하게 되었다. 아현동에서 학교를 다니다 깡패 선배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들이 도둑질을 시키기도 했단다. 결국 다시 낙향하여 축구부가 있는 고등학교를 전전하다가 최종적으로 전주공업고등학교로 가게 되었다. 그 당시 그 학교에는 축구부가 신설되어 있어 좋아하는 축구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때 문제가 발생했다. 그로 인해 3학년인 18세에 교복을 입고 해병대에 자원입대하게 된다.
기갑병 일반하사로 제대한 그는 수산 전문대를 가게 되었다. 당시에는 이런 일도 가능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마도로스가 되기 위해 들어간 학교였지만 졸업 6개월 전에 시작되는 학과 심화코스로 운전을 선택했다. 전주 BBS 육영재단에서 4개월 만에 속성으로 운전면허를 취득했다.
외국계 회사(웨스팅하우스)에 취업
전문대를 졸업하고 취업하려 하였으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 번은 삼보 컴퓨터에 지원서를 접수하려고 갔다. 당시 최고였던 그 회사는 원서 접수마저 거부하는 것이었다. 전라도 출신에, 해병대를 다녀온 것이 문제란다. 정말 억울하고 분통 터지는 일이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운전이었다.
자포자기 심정으로 무한정 걷다 보니 서울 끝 지점까지 가게 되었다. 당시 청량리는 서울의 마지막 종착지이다. 그곳에 경동시장이 있었다. 주요도로도 2차선까지만 포장되어 있었고 나머지는 비포장 상태였다.
그 시장에는 지방에서 물건을 싣고 경동시장으로 운송 해 주는 화물트럭 운전기사들이 있었다. 그러나 초보 운전자를 고용할 상인은 없었다. 그런데 마지막 상점까지 왔을 때 그 주인이 내일 와서 운전할 수 있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그래서 할 수 있다고 했다.
다음 날 춘천으로 출발했다. 당시에는 내비게이션은 물론 지도도 없었다. 트럭은 바퀴가 3개인 삼륜차였다. 마석 고개를 지나 곧장 가면 된다는 말만 듣고 갔다. 군대시절에 늘 생활화하던 그 신념 즉 ‘안 되면 되게 하라.’ 와 ‘우리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정신자세로 운전을 했다. 드디어 춘천에 도착하여 옥수수를 싣고 왔다. 그랬더니 땜빵기사 자격을 얻게 되었다.
당시 선배들에게 예우를 다 했더니 다들 예뻐해 주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토박이 주먹들이 시장 주차 안내원을 전담하고 있었는데 이들의 횡포가 대단했다. 이들은 시골에서 올라온 트럭이 새벽에 도착하면 좁은 골목을 잘 빠져 나갈 수 있게 안내를 하고 수고비 명목으로 돈을 받아갔다. 물론 나갈 때도 쉽게 빠져나갈 수 있게 도와주고 그러했다.
이들이 같은 시장에서 주로 머물던 기사에게도 수수료를 요구하게 된 것이다. 이들과 싸움이 나서 머리를 쇠파이프로 맞아 십여 바늘을 꿰매기도 했다. 날카로운 쇠스랑과 작살을 가지고 나오면 정말 무서웠다. 그 때 이빨도 다쳤다.
당시 하월곡동에 살고 있을 시기인데 친지가 미 8군에 다니는 사람이 있었다. 그녀에게 들은 정보에 의하면 영어를 할 줄 아는 운전기사를 모집한다는 것이다. 그건 원자력 건설과 관련된 일이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챙기던 주요한 일이었다.
정부는 한국교포로서 이 분야에 정통한 인재가 필요했다. 그 사람은 웨스팅하우스의 J. J. KIM 이었다. 고려대를 2년 다니다 미국으로 유학을 간 한국인이었다. 대학 다니면서 명동 신 상사 파에 소속해 있을 만큼 건장한 사람이었다.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미 항공우주국(NASA)에서 근무하던 그를 웨스팅하우스에서 스카우트를 해서 먼저 일본 서해 쪽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담당하게 했다. 그는 우리 정부에서 찾던 최고의 적임자이었다. 그리고 그를 모시는 기사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것은 최고의 직장이었다.
1일 8시간 일하고 급여는 당시 공무원이 월 3만8천원인데 비하여 13만원이었다. 다들 업무시간이 그의 2배나 되었을 정도로 일을 많이 하던 시기였다.
드디어 성북동으로서의 이주와 즐거움
한국계 회장이 본국으로 가면서 그 후임으로 멕시코계 책임자가 왔다. 그는 지금 길상사가 된 대원각 밑에서 살았다. 그래서 회사에서 전세금과 이사 보조금을 주어 그것으로 성북동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른바 성북동에서 제2의 삶을 살게 되었다. 지금 신한은행 지점 인근에 있던 콩나물 공장 옆 골목으로 들어가 이층 방 두 칸을 전세로 얻어 입주했다.
당시 성북천이 무척 아름다웠다. 물줄기는 양 갈래로 나누어져 있다가 합쳐져 흘러내려 갔다. 그 하나는 지금의 마을버스 종점에서 내려오고 다른 하나는 길상사 쪽에 흘러 내려와 합쳐지는 것이다. 쌍 다리가 있는 그 근처에는 빨래터가 있었다. 꿩의 바다라고 지칭할 만큼 꿩도 많았다. 정말 매력적인 마을이었다. 그래서 서민들이 살기 좋았다.
꿩의 바다와 성북동 마님들의 이야기
야쿠르트 회장과 동원 참치 회장 등이 꿩의 바다 인근에 살았다. 가끔은 원양어선에서 포획한 참치를 가지고 와서 파티를 하곤 했다. 일본 참치 시장에서나 볼 수 있는 커다란 참치가 원형 그대로 들어 왔다. 좋은 부위는 회장 가족에게 드리고 남은 부위로 잔치 상을 만들어 즐기기도 했다.
때론 그물로 꿩을 포획해서 매운탕으로 끓여 먹었는데 맛이 최고였다. 꿩이 좋아하는 콩을 뿌려두면 꿩이 날라 온다. 그것을 그물로 덮쳐서 잡는 것이다. 꿩 대신 닭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꿩 요리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유명 해외 로비스트도 여기에 있었고 공화당 사무총장을 비롯해 여러 정재계 인사들이 포진해 있었다. 이런 사람을 만나려 외부에서 많은 사람 오가는 지역이 성북동이다. 그들은 좋은 물건이 있으면 돈을 관계치 아니하고 산다. 신선한 고기만을 구입해 팔던 정육점은 돈을 많이 벌어 조그마한 빌딩을 사기도 했다.
또 세탁소도 잘 되었다. 여기에서 신용을 얻게 되면 시내에 빌딩을 가진 부자들이 자기 건물의 커튼과 카펫까지도 세탁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도 아픔이 있다 정권이 바뀌면 저택의 주인도 바뀐다. 그래서 열쇠 장사가 잘 되었다. 새로 이주해온 사람들은 모든 자물통을 바꾼다. 여기에 각국 대사관저에 있는 외국인도 큰 몫을 한다. 이들도 새로 부임하면 또 그렇게 했다.
그리고 과일장사도 큰돈을 벌었다. 부자 동네 주민 외에 주변 종교 단체가 큰 도움이 되었다. 특히 사찰이나 암자가 많이 있는데 여기에 다니는 신자들이 주요 고객이었던 것이다. 이외에도 기사 식당들이 많았다. 커다란 대사관에서 파티를 하면 차량이 150대 가량 모인다.
그리고 대원각이나 삼청각도 있었다. 당시는 자가 운전이라는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들을 수행하는 전담 기사들도 같이 올 수 밖에 없었다. 이들이 이용하던 식당들이 기사식당이었던 것이다.
또 다른 성북동의 아픈 추억들
마을버스 종점이 당시에는 지금 신한은행이 있는 그 장소에 있었다. 그리고 삼청터널이 있긴 했으나 통행이 제한되어 있어 이른바 한적한 시골 같은 분위기이였다. 또 일반 차량도 성북 천이 복개되기 전까지는 서울 과학고와 경신고 앞에 있는 그 도로를 이용하여 혜화동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어렵게 사는 사람들도 많았다. 주먹을 휘두르며 텃세를 행세하던 젊은 친구들도 있었다. 이들의 주 활동 무대가 되었던 아지트가 쌍 다리 부근에 있었다.
또 우리 아이들도 성북 초등학교와 홍익고등학교를 다녔는데 그 시설이 대단히 열악했다. 심지어는 강남에서 성북초등학교 교장으로 부임한 여자 교장이 있었는데 그녀가 자기가 근무하는 학교를 가리켜 이런 똥통학교는 처음 봤다고 할 만큼 형편 없었다.
조기 축구회 결성과 아름다운 추억들
내년이면 동호회가 만들어진 지 40년이 되니까 1975년에 결성되었나 보다. 그 다음 해에 가입했다. 당시에는 이 모임에 가입하려면 일년치 회비를 선납하고 들어와야 했던 시기였다. 그 열기가 대단했다.
주말에 축구를 하려고 금요일부터 술도 적게 마시고 부인과의 잠자리도 삼가 할 정도였다. 다들 축구를 하러 나올 땐 삶은 계란 3판과 보리차를 끓여 큰 통에 담아 나온다. 그러면 식당에 갈 필요도 없이 운동장에서 모두 해결할 수 있었다. 연중 가장 큰 행사인 송년회 때는 부인들이 다 같이 나와서 끓이고 준비하였는데 이른바 큰 잔치 마당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 동호회 뿐만 아니라 다른 축구 모임도 많았다. 전체적으로 6개 팀이 있었는데 년에 한 두 번은 다 같이 축구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삼청각과 대원각에 근무하는 직원만 해도 100여명이 되었다. 이들로 구성된 팀이 하나 있었다. 또 우리 마을에 거주하는 대사관저가 20여곳이 있는데 이곳에 파견 나가 있던 전투경찰만 해도 120여명이나 된다. 이들 경찰 팀 외에 우리처럼 동호회를 만들어 운영하던 조기 축구회도 A, B팀 두 개나 있었다. 그리고 21통장들이 모여 만든 통친회 팀과 지금의 신한 은행이 되기 전 조흥은행 직원으로 결성된 팀이 있었다.
나의 작은 소망
지금 일할 수 있는 직장이 있어 좋다. 이렇게 일을 할 수 있으니 손녀들에게 용돈을 줄 수도 있고 축구 동호회 후배들에게도 조금이나마 후원할 수 있다. 젊었을 때 어떤 나이든 선배가 지팡이를 짚고 나와 동호회 축구팀이 운동하는 운동장 주위를 돌며 나무를 툭툭 치며 인사를 하는 장면이 보았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운동장 주변에 있는 나무를 어루만지며 인사를 한다. 이처럼 한 운동장에서 대략 40년간 조기 축구를 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다. 이런 전통을 지키며 동호회원들과 함께 건강한 성북 마을을 만들어 가고 싶다. 그리고 앞으로도 지금처럼 일도 하고 운동도 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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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하는 명상가이며 본지 편집위원이고, 현재 성북동에서 식당 ‘디미방’을 운영하고 있다. 요가와 명상에 관한 책을 두 권 내기도 했으며, 문화유산에 관심이 많다. 이 답사기는 한국전통문화대학교에 입학 예정인 딸과 함께 최순우 옛집을 답사하고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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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북동 사람들의 마을 이야기> 3호는 서울마을미디어지원센터 2014 마을미디어 활성화사업에 선정되어 사업비를 지원받아 간행되었습니다. 소개된 글은 2014년도에 쓰여져 잡지에 실렸으며, 2017 동 사업을 통해 웹진으로 발행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