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성북 Dec 13. 2017

길상사를 찾아서

[5호] 우리동네 문화재 이야기│글 박진하

  도심 속 사찰이라 뭔가 낯설고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성북동이라면 그도 괜찮다 생각하는 이가 많지 않을까. 실제로 우리 동네에는 크고 작은 절이 많다. 그 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명소가 길상사다.


  성북로 큰길을 따라 가다 선잠단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 나아간다. 가는 길에 천주교 성당이 보인다. 마침 석가 탄신일이라 축하 현수막이 하나 붙어있다. “부처님의 탄신을 축하드립니다.”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그런데 부착한 단체명을 보니 불교단체가 아닌 성북동 성당으로 되어있다. 종교간의 화합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환해진다.

  그 현수막을 뒤로 하고 비탈진 경사로를 올라간다. 똑바로 구획된 도로가 아닌 좌우로 뒤틀며 만들어진 길은 좌우에 빽빽하게 주차된 차량만 없다면 마치 도시 속에서 시골길을 걷는다는 착각에 빠지게 할 정도다.

  드디어 길상사의 일주문이 보인다. 도로에서 조금 뒤로 후퇴해 설치된 커다란 단청 문이 방문객을 반겨준다. 보통은 맛배 지붕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으나 큰 팔작지붕을 두 겹으로 쌓아 올렸다. 사실 이 사찰은 처음부터 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요정을 개조하여 산사로 건립한 것이다.


  무소유라는 책을 써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과 깨달음을 안겨준 법정 스님이 이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다. 성북동에는 군사 정권 당시에 가장 번창했던 요정이 두 개나 있었다. 그 하나는 삼청각이고 또 다른 하나는 대원각이다.

  대원각의 주인은 진향이라는 예명을 가진 기생이었다. 가난에 내몰려 나이 열여섯에 기방에 입문한 것이다. 그러다 함흥에서 운명적으로 천재 시인 백석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그 만남은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더 애절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우리에게 월북 작가 백석은 상허 이태준만큼이나 낯이 설었던 적이 있었다. 그를 한국 문단에서는 고독한 천재 시인,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불운의 시인이라 평하기도 한다.


 이런 그를 소개할 때 이렇게 표현하기도 한다.

“백석 시인은 묻혀 있는 존재다. 일제 말기 펴낸 시집 <사슴>은 당대 문단의 충격이었다. 북부 지역 사투리에 담은 향토적 감수성과 정갈한 시어는 독자를 사로잡았다. <사슴>은 발간되자마자 이내 동났다.

당시 학생이었던 시인 윤동주는 <사슴>을 구할 수 없어 시집을 빌려다 손수 베껴 간직했다고 한다. 시인 김기림은 <사슴>을 가리켜 ‘문단에 던진 폭탄’이라며 감탄했다. 백석은 김소월과 더불어 북방의 대표적 시인으로 평가됐다.”


  백석과의 인연을 간직한 채 진향은 서울로 와 요정을 만든다. 1955년, 당시 배밭골이라 불리던 성북동 인근의 2만 평 대지를 매입했다. 매입가만 무려 650만원,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그녀는 가까스로 650만원을 마련해 어렵사리 땅을 소유하게 됐지만 그로 인해 생긴 빚을 17년간이나 갚아야 했다. 필요할 때마다 땅을 떼어 팔다보니 2만평 부지가 어느새 7000평만 남게 되었다.

  그녀는 드디어 이 땅에 목조건물을 짓고, ‘대원각’이라는 이름의 한식당을 열었다. 1970년 삼청터널이 개설되고 성북동이 개발되면서 대원각에는 고위 정치인과 재력가들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정권의 중심에 선 이들은 대원각의 밀실에서 향락을 즐기며 정치적 만남을 가졌다. 대원각은 한식당의 외관을 갖춘 요정이었다.

  1970년대 밀실 정치가 극에 달한 무렵에는 삼청각, 청운각과 더불어 삼대 요정으로 명성을 떨쳤다. 권력가나 재력가가 아니면 문턱조차 넘을 수 없을 정도로 대원각의 위세는 대단했다. 대원각이 요정정치의 대명사로 권력의 중심에 머물던 시기, 그녀는 본격적으로 재산을 불리기 시작했다.

  1980년대 무렵 그녀는 돌연 대원각 운영을 접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후 대원각은 이경자라는 40대 여사장이 임대해 운영되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얼마 가지 못했다. 1983년 2월경 동아일보와 경향신문 등 일간지에 이경자 사장이 조세법 위반 및 탈세혐의로 구속된 사실이 일제히 보도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얼마 후 풀려나 대원각을 고기와 평양냉면으로 유명한 요릿집으로 만들었다.

  이처럼 대원각은 당시 최고급 요정으로 이름을 떨쳤다. <한겨레> 1989년 9월3일치 2면을 보면 대원각 이경자 사장은 88년 전국 소득 순위 76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해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이 73위였다.

1991년 12월, 이경자 사장은 여종업원에게 일본인 관광객을 상대로 성매매를 시키고 받은 돈을 가로챈 혐의로 서울지검 강력부에 구속되게 된다.


  한편 이 요정의 실소유자인 김영한 여사는 1987년의 어느 날, 심경의 변화를 겪게 된다. 법정 스님의 책 ‘무소유’를 읽다가 불현듯 대원각을 시주해 사찰로 만들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그녀는 법정 스님이 말하는 “아무 것도 욕심내지 않고, 소유하지 않는 자유로운 삶”에 깊이 매료된 것이다. 대원각은 당시 시세로 무려 1천억 상당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지인이자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보살의 주선으로 법정 스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아무런 조건 없이 대원각을 시주할 테니 도심 속 열린 사찰로 만들어 스님이 관리해 주세요.”

  법정 스님은 “일평생 주지 같은 일은 맡아본 적도 없을뿐더러 아무것에도 매이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라 적합하지 않습니다.”라며 일시에 거절했다. 대원각을 사이에 둔 법정 스님과 김 여사의 줄다리기는 거듭 이어졌다. 그리고 꼬박 10년이 지난 1996년, 법정 스님은 비로소 그녀의 청을 받아들인다. 대원각을 시주받아 청정도량으로 변모, ‘맑고 향기롭게’ 운동의 근본도량으로 삼자는 이들의 요청을 따른 것이다.

  그렇게 술과 고기, 성과 향락, 밀실정치의 대명사였던 대원각은 청정도량 ‘길상사’로 탈바꿈했다.

1997년 2개월간의 공사 끝에 질펀한 놀이공간이던 대연회장은 설법 전으로, 본채는 극락 전, 고기냄새와 음악소리로 가득 찼던 공간은 열린 시민 선방으로 거듭났다. 한복 곱게 차려입은 기생들의 숙소는 수행하는 스님들의 요사채가 됐으며, 기생들이 옷을 갈아입던 팔각정은 불음을 전하는 범종 각으로 거듭났다.

  그렇게 만들어진 사찰이 길상사다. 그런 내력이 있어서인지, 건물 자체만 본다면 절이라기보다는 요정에 가깝다. 그러나 일주문은 도량의 출입구이고 세속과 출세간을 구분하는 경계선이었던 만큼 웅장하게 만들고 싶었나 보다. 좌우 측면에 부조로 새겨진 해조관음상이 보기에 좋다. 일렁이는 바다 위에 떠 있는 두 관음의 모습이 아름답다.

  일주문과 이 건물의 본채인 극락전은 일직선상에서 벗어나 있다. 옆으로 빗겨 나가다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돌계단을 밟고 올라서면 커다란 마당이 놓여있다. 석가 탄식일에는 야외 공연장으로 사용될 만큼 넓은 공간이다. 지난 초파일에는 명상 음악가인 김영동의 무대가 꾸며지기도 했다. 어두운 밤을 밝힌 조명 속에서 듣는 그의 음악은 우리의 가슴을 파고드는 작은 감동의 파동이었다.


길상사 극락전

  전면에 선 건물이 극락전이다. 전체적으로 “H”자 구조인 이 본채는 양 측면을 길게 만들었다. 그 가운데에 아미타 부처를 두었다. 우리가 흔히 듣는 “나무아미타불”의 주인공인 그 부처이다. 이름만 불러도 평안해지고 극락에 갈 수 있다는 아미타를 모시고 있는 것이다.

  극락전 앞 쪽으로 범종 각이 있으며 커다란 종루를 지탱하고 있는 대들보에서는 “이 종소리를 듣는 이들이여, 평안을 이루소서.”라는 글귀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사찰의 전신이 요정이었던 만큼 단청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유일하게 일주문과 범종 각만큼은 여러 색상을 화려하게 입힌 모습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이 두 개의 건물은 요정에서 사찰로 개조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 종각 옆 좁은 길 건너편으로 조그마한 관음보살상이 보인다. 어찌 보면 성모 마리아 상처럼도 보인다.

이를 조각한 작가가 천주교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땅에는 경계가 있지만 하늘에는 경계가 없다. 땅 위에 있는 모든 종교가 울타리를 허물면 한마당이 될 것이다.” 라며 종교의 화합을 말하고 있다.

  이 보살상은 다른 것에 비해 비교적 작게 만들어졌는데, 나름 이유가 있다. 대개 불상의 형태가 커질 적에는 종교의 힘이 정치권력보다 약할 때라는 것이다. 속이 허할수록 겉을 포장하려 한 이유다. 고려 후대로 와서 불상이 커진 것도 그러한 결과였다고 한다. 길상사의 작은 반가사유상을 보며, 이렇게 작은 불상을 만든 마음이 바로 지난날의 위대한 불상 예술을 다시 새롭게 꽃 피울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아닐까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그 옆으로 또 하나의 불상이 있다.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의 솜씨처럼 선 하나를 그어 눈썹을 그리고 그 밑에 다른 선 두 개를 모아 눈을 그렸다. 다 이런 식이다. 이를 조각한 작가의 마음이 느껴진다. 깨달음의 세계는 이와 같이 단순함과 치졸함 속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오른 쪽 눈 밑에 그려놓은 눈물 한 방울은 어떤 의미일까?


  설법 당에서 밑으로 내려다보면 길상 7층탑이라고 명명한 석탑이 보인다. 이 또한 종교 화합의 상징이다. 이 탑은 기독교인이 기증하여 설치된 것이라고 한다. 네 마리의 사자상이 떠 밭치고 있는 석탑은 웅장함보다는 상승감이 강조되어 있다. 늘씬한 몸매와 높은 키가 마치 모델의 신체 비율을 닮아 있다. 이 석탑은 법당 출입구 옆에 비치된 마루 위에 앉아 감상하면 제격이다. 그 위로 나무로 만든 썬 루프가 있어 비가 오든 태양 볕이 내리 쬐든 관계 없이 편안하게 쉬며 푸른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려 하는 7층탑의 자태를 만끽할 수 있다.

  극락전과 설법당 사이 길을 걸어 오르면 ‘맑고 향기롭게’라는 단체의 사랑방 지붕이 보인다. 현대식 건물이다. 그야말로 기기묘묘한 건물이다. 그 지붕부터 특이하다. 8각 지붕인데 또 동서남북의 4모서리를 잘라 12면체를 이루고 있다. 아니 1층 현관 위에는 4면체의 돌출부를 추가하여 기하학적인 모양을 하고 있다. 출입구 설계는 더욱 재미있다. 이 건물이 비탈진 경사면에 세워진 사실을 적극 활용하여 1층에서도 출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보다 높은 길에서도 곧장 2층으로도 출입할 수 있게 만들었다. 조금 오르면 일반인들이 선 수행을 할 수 있는 선방과 선원이 보인다. 각 선방을 통하는 출입구도 자연지형을 최대한 살려 자연석들로 디딤돌을 놓아 만들었다. 가장 높은 건물은 법정의 진영각이다. 진영각을 끼고 내려오면 스님들의 선방이 여기저기 앉아있다. 개울 물 너머 산재된 공간은 일반인의 접근을 거부하는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드디어는 침묵의 방에 도착해서야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선방을 만나게 된다. 그 방의 구조는 너무 단순하다. 격자창 2개가 있어서 선방에 앉아 밖의 경치를 보는 눈을 즐겁게 만든다. 누구든 들어가 명상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기와를 이용해 만든 담 벽도 아름답다. 또 다른 화강석과 황토흙으로 만든 담장 위로는 가는 나무를 엮어 만든 통풍구가 있다.

  경내를 둘러 한 바퀴를 다 돌아온 기점에는 벽돌을 이용해 만든 반월문(半月門)이 있다. 출입문 위로는 학 두 마리가 그려져 있고 그 위로는 기와지붕이 올라서 있다. 즉 극락전을 향해 만들어진 것으로 이곳이 요정이었음을 상기시키는 장소이기도 하다. 오른 쪽 밑에는 찻집과 도서관으로 사용되는 지장전이 위치하고 있다. 법정의 책을 포함하여 여러 분야의 서적이 비치되어 있다.


  답사를 마치고 극락전 앞뜰에 놓인 바위 의자에 앉아 백석이 그의 사랑, 진향을 생각하며 지었다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시를 읊어 본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나는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와 이야기 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내가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는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 것이다. 


  함박눈이 많이 내린 날이면 이곳을 찾아 소주 한잔을 들고 그들의 사랑 이야기가 남긴 후일담을 듣고 싶다. 후에 길상화 보살이라는 법명을 얻은 백석의 여인 김영한은 임종을 하루 앞두고 길상사를 찾았다고 한다. 오랜 병환으로 지치고 노쇠한 모습이었지만 언제나처럼 정갈한 한복 차림이었다. 그녀는 법당을 참배하고 천천히 경내를 둘러본 후 경내 자신의 처소 ‘자야오당’에 누웠다. 그리고 “죽은 뒤 반드시 화장해서 눈이 많이 오는 날 길상사 경내에 뿌려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래서 그녀는 그렇게 이곳에 머물게 되었다.

  눈이 많이 오는 날 뿌려 달라는 그의 부탁은 백석과 흰 당나귀를 타고 눈이 푹푹 쌓이는 밤, 뱁새 우는 산골로 가려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의 시와 길상화가 남긴 길상사는 하나의 신화가 되어 우리 성북동 골짜기에 고요히 내려와 세상을 살며 생긴 피로를 씻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고 있다.



-

박진하는 성북동의 명소인 작은 식당 ‘디미방’의 주인장이며, 요가와 명상 전문가다.

우리 잡지의 편집위원으로 성북동을 사랑하는 마음을 늘 간직하고, 성북동의 멋과 맛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하는 진정한 성북동 사람이다.


※ <성북동 사람들의 마을 이야기> 5호는 서울마을미디어지원센터 2015 마을미디어 활성화사업에 선정되어 사업비를 지원받아 간행되었습니다. 소개된 글은 2015년도에 쓰여져 잡지에 실렸으며, 2017 동 사업을 통해 웹진으로 발행되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길상사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