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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꿀차

리커버링

레슬리 제이미슨

by 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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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은 예전부터 나를 끌어당기던 주제이다.

인간은 늘 무언가를 욕망하기 마련인데, 그 욕망이 통제를 벗어나면서 주체가 객체가 되어버리는 순간이 중독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문학을 공부한 작가라서, 번역본인데도 글의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본문
술을 끊고 회복 중일 때 나는 이야기에 관해 늘 들어왔던 명제 - 이야기란 독특해야 한다 - 에 저항하는 공동체를 발견했다. 그들은 이야기란 전혀 독특하지 않을 때, 그것이 예전에 누군가 겪었던 것이고 앞으로 누군가 다시 겪게 될 것이라고 이해될 때 가장 유용하다고 주장했다. 우리의 이야기는 이 중복과 과잉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중복과 과잉 때문에 소중했다. 독창성은 이상이 아니었고, 아름다움은 요점이 아니었다.
어떤 고통의 느낌, 무언가 부당하다는 믿음이 늘 깔려 있던 그 막연한 고통의 느낌 때문인지 피를 끌어내는 칼날의 구체적 선명성은 너무도 매력적이었다. 그것은 물리적이고 반박할 수 없는 것이기에 내가 주장할 수 있는 고통이었다. 물론 그 고통이 자발적이라는 사실이 늘 부끄럽긴 했지만.

자해를 하는 이유를 명확하게 표현한 부분이라서 너무 공감되었다. 막연한 고통을 물리적으로 구체화해서 반박할 수 없는, 내가 주장할 수 있는 고통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다. 그럼에도 자발적으로 그 고통을 만들었다는 것이 부끄러워서 숨기게 된다.

내가 유명한 술꾼 작가들을 우상화했던 이유는 그들의 음주가 내면의 극단적 기후, 불안정하고 실재하는 그 기후에 대한 증거라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많이 마셔야 했던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상처를 받은 사람일 터였고, 음주와 글쓰기는 똑같이 빚어진 고통에 대한 서로 다른 반응일 터였다. 그 사람은 그 고통을 마비시켜버릴 수도 있고, 그것에 목소리를 부여할 수도 있었다.
나의 음주 초기, 그러니까 내가 전설적인 아이오와 술꾼들의 그림자 속에 있을 때, 그리고 포크너, 피츠제럴드, 헤밍웨이, 포, 보들레르, 버로스와 마약, 드퀸시와 아편 등 그 영역이 매우 제한되어 있음을 내가 아직 깨닫지 못했던 정전 작가들이 드리운 더욱 긴 그림자 속에 있을 때, 중독은 생성적인 것 같았다. 그것은 내부 장식, 내면의 깊이를 말해주는 액세서리와 아주 비슷해 보였다.
여자 술꾼은 남자 술꾼과 똑같이 불량스러운 실루엣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드물었다. 여자가 술을 마시면 동물이나 어린아이 같았다. 말도 제대로 못하고, 무력하고, 남세스럽다는 듯이. 여자의 음주는 놀라운 지혜 - 이 베르길리우스들이 어둠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촉매제나 연고 - 에 필요한 일화라기보다는 자기탐닉이나 멜로드라마, 히스테리, 까닭 없는 고통에 더 가까웠다. 여자는 술꾼의 삶을 둘러싼 복잡한 상황에 관해 무언가를 알 수 있을지언정, 그녀의 음주는 결코 중요하지 않을 것이며, 라우리가 썼듯이 남자의 음주와 같지 않을 것이다. 여자는 설사 아이처럼 술을 마시지 않았다 하더라도, 자기 아이를 돌보는 대신에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로 도피하는 여성은 보통 가정이나 가족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여성이었다. 어느 임상 교과서는 남성과 여성의 음주에 대한 시각이 달랐음을 보여주는 "전통적 믿음"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쓰고 있다. "여성의 중독은 가족 관계를 통제하는 데 실패했다는 신호로 여겨졌다."
학교에, 기숙사에, 다른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불편했고, 굶는 것은 내가 온전히 거기 있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는 방식이었다. 내 생활을 일시 정지시키고 일단 행복해진 뒤에 다시 플레이 버튼을 누르겠다는 것과 같았다.
나의 슬픔에 아무 특별한 근원이 없다는 사실이 부끄럽게 여겨졌다. 그냥 집을 떠났다는 평범한 외로움 때문인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슬픔에 입힐 더 극단적인 의상으로 찾아낸 것이 먹지 않는 것이었다.
술을 마시기 시작했을 때, 그러니까 본격적으로 음주를 시작했을 때, 단지 쾌락이 아닌 탈출의 관점에서 그것을 의식하게 되었을 때, 나는 부끄러웠지만 자랑스럽기도 했다. 나 자신에게서 사라지려는 절박한 시도는 무언가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하는 어둡고 중요한 것 - 우울증, 신경증, 정신적 복잡성 - 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고통을 옷처럼 걸치고 다닌 건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고통을 정신적 비료로, 미학적 목적을 지닌 어떤 것으로 이해하려고 애썼다. 나는 고통이 나를 복잡하게 만들고 심화시켜주기를 바랐다.
나는 늘 사랑받았지만, 그 사랑이 무엇에 기대고 있는지 늘 궁금하기도 했다. 그것이 무조건적 사랑 같지는 않았다. 나는 그 사랑을 계속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나는 완벽한 성적, 완벽한 시험 점수를 갈망하는 것처럼 아버지의 인정을 갈망했다. 아니 아버지의 인정을 갈망하듯 그런 것들을 갈망했다. 좋은 점수를 받는다는 건 다음번 저녁 식탁에서 무슨 멋진 말을 할지 생각해내려 애쓰던 어린 소녀가 자라면서 당연스레 갖게 된 갈망이었다.
우리 누구나 의존적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의존적이며, 이렇게 서로 다른 의존 형태가 우리 삶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변형시킨다. 나의 음주는 우리 가족과 관련이 있고, 내 두뇌와 관련이 있으며, 내가 자라면서 숭배하게 된 가치들, 즉 탁월함, 황홀함, 최상급의 모든 것 등과 관련이 있다. 왜와 관련된 이 모든 이야기는 진실이지만 불충분하기도 하다. 불충분의 상태는 인간 존재의 일부이며, 나는 술을 마심으로써 나만의 불충분 상태에 반응한다.
어쩌면 술을 끊는다는 건 자기성찰과 관계있는 게 아니라 술이 아닌 나머지 모든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과 관계가 있는 것 같았다.
"그대의 삶 안에서 그대가 더 작아질 수 있다면 그대의 삶은 얼마나 더 커지겠는가."
나는 나에게, 아니 다른 누구에게든 단순한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해본 적 없었다. 단순성은 결례로 느껴졌다. 모든 사람의 심리에 파인 주름을 일부러 회피하고, 의식을 온전히 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애초에 삶이 단순하지 않은데, 어떻게 삶을 단순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내가 자연과학보다 의학을 사랑하는 이유이다. 일반화보다는 개별화를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냥 나라는 이유로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고 싶었지만, 그런 한편 나는 x이기 때문에, y이기 때문에 하면서, 나의 특질로 사랑받고 싶었다. 내가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는 이유로 사랑받고 싶었다. 다만 그런 사랑을 받는 것이 두려웠는데, 만약 내가 그럴 가치가 없어진다면? 하는 이유 때문이었다. 무조건적인 사랑은 모욕적이었고, 조건적인 사랑은 두려웠다.

너무 공감되는 말이었다.

"일단 네가 생명을 얻게 되면 못생길 수가 없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더라도 말야."
우리가 공유하는 것을 믿는다고 해서 우리가 공유하지 않은 것들을 모른 척할 필요는 없었다. 공명은 융합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 모두 똑같은 삶을 살았던 척하는 게 아니었다. 공명이 뜻하는 건 경청이었다.
과거의 나는 언제나 의심을 믿었다. 질문하고 무너뜨리고 균열을 찾으면서, 깔끔한 해결의 솔기를 벌려 그 밑에 바글거리는 복잡성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의심이 때로는 손쉬운 알리바이에 불과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의심은 확인이라는 더 위태로운 상태를 회피하면서, 비판받거나 오류가 입증되거나 비웃음을 살 수 있는 어떤 것의 뒤에 섬으로써 스스로를 취약하게 만드는 방법일 수 있다고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쩌면 이야기를 의심하는 것도 이야기를 믿는 것만큼이나 지나친 의존일 수 있다. 틈새를 채우지 않고 지적만 하는 것, 양가감정의 참호에 몸을 묻는 것은 너무 쉬운 일이었다. 때로는 우리 삶의 이야기가 꾸며낸 것임을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우리가 이름 붙일 수 있는 것과 어쩌면 이름 붙일 수 없는 나머지 것들의 작용으로 선택되고 기획되고 왜곡된 것이라고 말이다.
"충분히 오래 살다 보면 어떻게 살지는 삶이 가르쳐준다고."
감사의 말
마지막으로 이 책을 처음 읽어주고 이 책이 무엇이 될 수 있는지 이해시켜주고, 1년 후 다시 읽어주며 마저 길을 가도록 도와준 남편 찰스 복에게 감사드립니다. 당신의 지능, 아름다운 글,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의 사랑이 고맙습니다. 당신은 누구와도 다른 방식으로 나를 웃게 해줍니다. 내가 쓸 수 있는 삶의 대본보다 더 나은 삶의 하루하루를 만들어주어서 감사합니다.

아름다운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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