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꿀차

한낮의 우울

앤드루 솔로몬

by 성은

우울증 삽화를 세 차례 경험한 저자가 쓴 900쪽가량의 두꺼운 책이다.


읽다가 반납 기한이 다가와, 도서관에 도로 가져갔다가 며칠 후 다시 빌린 다음에야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방대한 사례와 인터뷰, 자료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어서, 저자가 들인 노력만큼 꼼꼼하게 천천히 읽고 싶었다.


우울증 환자의 이야기에 더해 우울증의 치료법과 역사적, 정치적, 사회학적 맥락까지 포괄적으로 이해하기 좋았다.


본문


이와 마찬가지로, 우울증에서 회복되기 시작하면 매일 아침 자리를 털고 일어나 옷을 차려입을 수 있게 된다. 날씨가 좋으면 산책도 나가고 밖에서 점심도 사 먹을 수 있다. 전화 통화도 한다.


나는 부작용을 줄인 더 나은 치료제가 나오기를 기대하며, 견딤의 시대가 아닌 해결의 시대에 살게 된 것이 너무도 고맙다.


우리는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진짜 자신과는 별개의 존재임을 알지만 한편 그것이 절대적으로 진실함을 부인하지 못한다.


사람들이 자살에까지 이르는 것은 (육체적 혹은 정신적인) 극심한 고통을 견디지 못하는 환자를 의지박약으로 모는 (내가 응급실에서 만났던 의료진과 같은) 의사들의 보수주의 때문이다.


버지니아 울프에 대해 강의하며 그녀의 글을 소리 내어 읽는 것이 내게는 초콜릿을 먹으며 초콜릿에 대한 강의를 하는 것과 같다.


남들의 관심을 사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거죠.


나는 슬플 때면 너무 많은 것들을, 너무 잘 기억한다.


관상동맥 질환의 경우, 약 처방만 하진 않아요. 환자에게 콜레스테롤을 제한하라고 권고하고 운동과 식이요법, 스트레스 관리에 대한 처방까지 내리지요. 이러한 병행 치료는 정신 질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심각한 삽화 후 새로 태어나야 하며 재발을 방지할 수 있는 행동들을 배워야 한다.


약은 우울증을 치료하고 나는 우울증 환자를 치료하지요.


우울증 환자들은 종종 자신이 탄 구명보트를 핀으로 찌르는 행위를 한다.


기상 시스템과 마찬가지로,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어딘가에서 풍속이나 습도를 변화시키면 날씨가 전혀 달라지는 결과가 발생하는데, 어떤 변화가 무엇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최고의 기상학자도 확실히 알 수 없죠.


고통을 끝내고 싶을 정도로 자신을 사랑했기에 죽고 싶었다.


그런데 내가 너에게 오늘 들려주는 인생담은 내일은 전혀 다른 내용이 될 수도 있어.


옆방에서 누가 일하고 있으면 인생이 훨씬 행복하다는 걸 깨닫게 됐지.

작은 일들을 기억해 주고 관심을 기울여 주는 사람이 필요해. 혼자인 것보다는 불완전하나마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게 더 좋아.


나는 몇 주 전에 죽었는데 아직 시체가 발견되지 않은 듯한 느낌이에요.


차라리 종일 우울증에 빠져 있는 게 더 안전한 것 같아요. 세상 사람들이 다 갖고 있는 현실적인 걱정들을 할 필요가 없으니까.


우리는 우울증 치료에서는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지만 우울증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는 큰 진전이 없는 형편이다.


우울증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러니까 모든 우울증이 유일하다.


자연이 풍요롭고 온화하고 즐거울수록 마음의 겨울은 더 깊어지고 우리의 내면과 외부 세계를 갈라놓는 심연도 더 넓어지고 견디기 어려워지는 듯하다.


고난이 표준인 세계에서는 인생의 힘겨움에 대한 정확한 판단과 우울증의 경계가 고정적일 수가 없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물질 남용은 "거북하고 이해 불가능한 고통"을 "편안하고 이해 가능한 고통"으로 치환시키려 하는 욕구의 결과이며 "본인이 이해할 수 없는 통제 불가능한 고통"을 "본인이 이해하는 중독성 물질에 의한 불쾌감"으로 대체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우울증 상태에서의 불안감은 말하자면 이런 거죠. 내게 끔찍한 비밀이 있는데 모두들 그걸 알게 될 것 같은 그런 기분. 그런데 정작 자신은 그 비밀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거죠.


삶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가정은 꼭 필요하다. 그런 가정이 없다면 삶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이 불가능하다.


문제는 어떤 자살이 합리적인지 알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는 것이며, 너무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보내는 것보다는 너무 많은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무심한 말 한마디가 보류 상태에 있던 모든 원한들과 권태를 촉발시키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고통을 키우는 것은 견딜 수 없을 만큼 사람을 지치게 만들며, 그 권태로운 무력감과 고통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현실은 자신을 구하는 것보다 고통을 죽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줄 수도 있다.


자살의 가능성은 우리가 고통받고 있는 세계에서 무한한 위안이 된다.


니체는 자살에 대한 생각이 많은 이들을 밤의 암흑 속에서 살아남게 한다는 말을 남겼으며, 나는 합리적인 자살을 인정할수록 불합리한 자살로부터 안전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이 순간을 넘기면 다음 기회에 얼마든지 자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 그 순간에 지나치게 압도되지 않고 견딜 수 있게 된다.


이 세상 눈물의 양은 항상 일정하다.


그 어떤 작가도 셰익스피어만큼 그것에 공감하면서, 그토록 세밀하게 기쁨과 슬픔에 엮어 넣어서, 지혜에 꼭 필요한 것이자 어리석음의 근거임을 보이면서, 교활한 동시에 자기 파괴적인 속성을 부여해 그토록 복잡하게 묘사하진 못했다. 셰익스피어 이전에는 분리된 실체였던 멜랑콜리가 셰익스피어 이후에는 자아에서 쉽사리 분리될 수 없는, 자아라는 백색광 스펙트럼의 남색 빛이 되었다. 하나의 프리즘이 일시적으로 나타내는 것은 태양의 일상적인 실체를 바꾸어 놓을 수 없다.


버턴은 인간은 정신적 외상을 견딜 수 있는 능력이 저마다 다르며 상처의 정도와 견디는 힘의 상호작용이 병을 결정한다는 매우 현대적인 이론을 내놓았다.


이성의 시대의 기준에 의하면 극단적인 정신 상태들은 논리 연속체 상의 끝 지점들이 아니라 규정된 통일성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한때 귀족적인 교양의 표시로 여겨진 멜랑콜리가 이제 도덕적 타락과 나약함의 표시가 되었고, 편안함을 버리는 것이 해결책으로 제시되었다.


대표작 <멜랑콜리에 부치는 노래>와 <그리스 항아리에 부치는 노래>에서 그는 가장 소중한 것을 가장 슬픈 것이게 하는 덧없음의 참을 수 없는 슬픔을, 그리하여 결국 기쁨과 슬픔은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이야기한다.


절망에 빠진 사람은 희귀한 경우가 아니다. 가장 희귀한 경우는 진정 절망에 빠지지 않은 인간이다.


나는 지속적이고 막연한 공포 속에서 초췌해져 갔다. 정체 모를 것에 대해 소심하게 전전긍긍하며 살았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신앙이 강한 시기와 약한 시기가 번갈아 나타나기는 하나, 이처럼 신의 존재와 의미 자체에 대해 갖게 된 불신은 전능한 신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슬픔보다도 훨씬 큰 고통이었다.


슬픔에 빠지면 세상이 초라하고 공허해지지만, 멜랑콜리아에 빠지면 자신이 초라하고 공허해진다.


그는 모든 환자들이 절대적인 정의들에 부합되는 것은 아니며 각 환자의 특수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치료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외과 의사는 "손으로 일하는 사람"이고, 내과 의사는 "약을 이용하는 사람"이며, 정신과 의사는 "일대기를 이용하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의학의 목적은 그것이 불필요해지도록 만드는 것, 현재 의학이었던 것이 미래에는 상식이 되도록 삶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우울증이 환자 자신의 통제력 밖에 있는 내적인 화학 작용의 결과라고 말하는 것에는 사회적인 이해관계가 들어 있다. 중세인들이 수치심 때문에 자신의 병을 숨기려 했듯이 20세기 후반의 사람들도 내인성 우울증을 내세울 수 없었다면 우울증을 숨겨야 했을 것이다.


우울증을 다루는 최신 과학은, 우울증은 뇌의 질환으로 경구용 치료제를 써야 한다는 히포크라테스의 주장을 메아리처럼 따라하고 있다. 21세기의 과학자들은 기원전 5세기보다는 훨씬 발전된 치료법들을 제시하고는 있지만 근본 인식은 한 바퀴 돌아서 제자리로 돌아온 셈이다. 사회적 이론들 역시 심리치료 방식들이 많이 발전되기는 했지만 본질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적 사고를 따르고 있다. 무엇보다도 괴로운 것은 진실이 이 두 가지 접근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기라도 한 양 양측이 아직도 계속 논쟁 중이라는 점이다.


우울증은 계층을 초월하지만 우울증 치료는 그렇지 못하다.


우울증의 정의는 정책 결정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며, 그 결과는 우울증 환자들에게로 돌아온다.


이렇듯 사람들이 자신의 우울증에 대해 밝히기를 꺼리다 보니 우리는 우울증이 이 사회에 만연해 있음을 알지 못하며, 사람들이 우울증에 대해 밝히기를 꺼리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우울증이 얼마나 흔한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신 질환자들을 돕는 비용보다 훨씬 많은 수십 억 달러씩을 그들로부터 우리를 방어하는 데 쓰고 있습니다.


완벽한 균형이 불가능함을 인정한다면 두 가지 선택이 있을 수 있는데 일부 수용 대상이 아닌 사람들까지 수용하거나, 아니면 자신을 파괴하게 될 일부 위험한 환자들까지 내보내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헬륨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살게 된다면 중력에 대한 믿음을 잃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극심한 우울증을 안고도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게 보자면 이가 없는 사람들도 살 수는 있다.


만일 우울증이 세계인의 25퍼센트에나 오는 병이라면 그것을 병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우울은 모든 사람들에게 존재하는 정서로 통제력 안으로 들어왔다 벗어났다 하는 것이며, 우울증이라는 병은 우리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어떤 것이 도를 지나친 것이지 외부의 것이 들어온 건 아니다. 그리고 그 형태는 사람마다 다르다. 그렇다면 무엇이 사람들을 우울증에 빠뜨리는가? 그것은 '무엇이 사람들을 만족시키는가?'라는 물음과 다를 게 없다.


여기에는 인간은 무엇이며 인간의 고통들은 무엇인지에 대한 존재론적 의문을 갖게 하는 명백한 패러독스가 존재한다. 인간의 삶과 자유에 대한 권리들은 비교적 단순하고 명백하지만 행복의 추구에 대한 권리는 갈수록 알쏭달쏭해진다.


우리는 기침을 하나의 질병으로 보기보다 다양한 질병들의 한 증세로 정리한다. 기침 그 자체에도 목이 아프고 잠을 못 자고 말도 잘 못하고 목구멍이 간질간질하고 호흡이 어려운 증세들이 따르지만 말이다. 우울증도 기침과 마찬가지로 질병의 한 종류라기보다 증세들을 지닌 하나의 증세다. 만일 우리가 기침을 유발하는 질병들에 대해 알지 못한다면 "난치성 기침"에 대한 이해의 토대를 가질 수 없을 것이며, 왜 어떤 기침은 치료에 반응을 보이지 않는지에 대해 온갖 억측들이 나올 것이다.


나도 우울증 체험을 통해 좋은 친구와 나쁜 친구를 가려낼 수 있었지만 그 대가가 너무 컸다. 그리고 어려울 때 의지가 되어 주지 않는다 해서 평소에는 기쁨을 주는 관계들을 모두 저버릴 필요가 있을까? 나는 그들에게 어떤 친구가 되어야 할까? 우정에 있어서 의지가 되어 준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일까? 위기 상황에서 의지가 되어주는 것과 친절하고 관대하고 착한 것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사랑한다는 것은 상처받기 쉬운 상태가 되는 것이고, 그런 상태를 거부하는 것은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다.


우울증 그 자체는 유익한 기능이 거의 없지만 우리가 지닌 감정의 폭은 그 극단들을 충분히 정당화할 수 있을 정도로 소중한 것이라는 이 주장이 내게는 가장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이곳에서 나가려 하면 나가는 것이 두렵고 병원에 돌아올 때가 되면 돌아오는 게 두렵죠.


너무 지쳐서 숨조차 쉴 수 없을 때 육체의 고통은 마음을 정화시켜요.


우리를 압도하고 마비시키는 슬픔은 광기에 대한 방패 노릇을 한다.


따라서 선은 악에 비하면 풋내기에 불과하며 악이 약속하는 최고의 것을 알지 못한다.


나는 너무 쉽게, 너무 자주 불쾌함을 느끼고 너무 쉽게 타인에게 기대지만 그만큼 타인에 대해 더 관대해졌다고 생각한다.


차에 치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느라 신호등이 녹색으로 바뀔 때까지 이를 악물고 참고 서 있어야 하고, 손목을 긋거나 입에 권총을 물거나 영원히 깨지 않는 잠에 빠져드는 상상을 한다. 나는 그런 감정들이 지긋지긋하지만 그것들로 인해 삶을 더 깊숙이 들여다보게 되었고, 살아야 할 이유들을 발견하고 그 이유들에 매달리게 되었음을 안다. 나는 지금까지의 내 삶을 한탄하지는 않는다. 나는 날마다 살아 있기로 선택한다.


그 아버지는 아들이 잡고 있는 줄의 반대쪽 끝을 잡고 있고 그 줄을 잡아당겨서 아들을 구하고 싶지만 너무 세게 잡아당기면 줄이 끊어져 아들을 영영 잃게 될 것임을 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어떤 환자들은 다른 사람이 한 방에 있는 것 자체를 견디지 못한다. 그러면 문 밖에 앉아 있으면 된다. 가 버리면 안 된다.


기분은 성격이 아니다.


우리 고관절을 고쳐 준 의사는 우리가 마라톤을 뛰게 된 걸 축하해 줄 수는 있지만 그것을 자신의 공으로 여기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라톤을 뛸 수 없다고 해서 의사에게 화를 내서는 안 됩니다.


일어나서 집에서 나가는 것이 전에는 한 가지 일이었어요. 그런데 이제 샤워조차 열두 가지는 되는 일처럼 느껴지고, 제일 힘든 건 첫 단계지만 어느 단계에든 꼼짝 못하게 될 수 있죠.


올해 나의 새해 결심은 내년에는 더 나은 결심을 할 수 있도록 사는 것이었지요.


삶은 내게 공중그네와도 같고, 나는 점프해서 공중그네를 잡을 겁니다. 공중그네를 놓쳐서 다시 곤두박질쳐 떨어질 수도 있죠. 하지만 적어도 나는 지금 출발대에 서 있어요.


나는 여름에 겨울을 대비할 뿐만 아니라, 얼어붙을 듯한 추위 속에서도 봄을 생각하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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