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첫 장편소설이라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는다.
극도로 섬세하고 치밀하며 완벽하다.
20대에 어떻게 이러한 깊이를 가질 수 있었을까.
검은 사슴이 안내하는 어둠을 끈질기게 따라가는 여정.
결국 그것은 그 자체로 빛이다.
본문
그때 그는 자신이 여전히 존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앞으로도 오랫동안 이 상태가 계속되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채식주의자>에서 영혜의 언니가 한 말과 유사하다. 존재한다는 것,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 내 힘으로 생각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고 싶다. 살아 있고 싶다.
결코 엄살을 할 줄 모르는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상대의 엄살 역시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내가 그 짐승의 살을 먹고, 그 짐승보다 오래 살아야 할 이유도, 자격도 없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세상에는 서서히 미쳐가는 사람들도 있는 거 아닐까요? 서서히 병들어가다가 폭발하는 사람 말예요. 줄기가 뻗어나가다가, 한없이 뻗어나갈 듯하다가, 그 끝에서 거짓말처럼 꽃이 터져나오듯이...
식물 모티프가 여기에도 이미 등장했다.
다만 지금의 그애가 좋아요.
깊은 물속에 가라앉아 먼 수면 저편의 세상을 보듯이 나는 살았다.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뿐이었다.
단지 자신을 똑바로 마주 보는 것을 집요하게 피해온 덕분에, 흐트러짐 없이 그것을 유지해올 수 있었던 것뿐이다.
그녀의 작업은 '오늘은 진눈깨비가 오다 말다 했다. 중앙우체국까지 가서 특급 소포를 부쳐야 했다'라고 했다가, '내가 소포를 부치러 중앙우체국에 갈 때 진눈깨비가 뿌렸다'라고 했다가, '진눈깨비를 맞으면서 중앙우체국에 갔다'라고 고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인생을 사는 게 좋아. 살아 있는 게 좋다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