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보영
<일기시대>와 <사람을 미워하는 가장 다정한 방식> 다음으로 읽은 문보영 시인의 산문집이다.
여느 때처럼 일기를 모아 엮었다.
내가 일리노이에 머물렀던 가을에 문보영 시인은 아이오와에 있었는데, 아이오와 작가 워크숍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같은 시기에 이웃한 주에서 생활한 이야기를 읽으니 내적 친밀감이 생겼다.
소중한 문장이 많아서 의식적으로 천천히 읽었다.
빠르게 페이지를 넘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책을 덮어버리면서.
본문
자신이 사는 곳을 사랑하기란 너무 어렵지 않은가요?
이 당시 같이 읽고 있었던 <여행의 기술>과 너무 비슷한 말이라서 마음에 남았다. 늘 스스로에 대해 의심하는 점이기도 하다. 현재 있는 곳에 집중하지 못하고 내가 떠나온 곳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품고 있지는 않은가? 더 나은 것을 바라는 게 인간이라서.
그렇지만 지금은 분명 많이 달라졌다. 하얀 이불이 덮이고 커다란 곰인형 덕춘이가 앉아 있는 침대와 하얀 책상, 하얀 옷장이 놓이고, 분홍색 커튼이 걸린 작은 방을 사랑한다. 비가 온 뒤면 더욱 초록색으로 무성해지는 나무들과, 시카고 강보다 조금 좁고 한강보다는 많이 좁은 강을 사랑한다. 매일 밤 잘 자라고 인사하는 가족들과 매일 아침 잘 잤는지 인사하는 그 사람을 사랑한다.
우리는 태생적으로 성가신 존재야.
마음이 조금 더 편해진다.
우리가 점프하면 언제나 복잡하고 재미난 일이 일어나.
I want to live here. I want to leave here.
살다와 떠나다를 구별할 수 없다면, 내가 여기 살고 싶다고 말할 때 너는 내가 떠나고 싶다고 이해하겠지. 이젠 떠나고 싶다고 말하면 여기서 살고 싶다는 뜻으로 이해하겠지. 삶은 짧은 거고 떠남은 긴 거구나.
어제는 코토미의 책을 읽다가 잤다. 코토미에게 할 질문을 줄이기 위해서? 혹은 코토미에게 할 질문을 만들기 위해서? 둘 다다.
따라오길래 가는 길이 겹친 줄 알았는데 바래다준 거였다.
다정하고 다정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내가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 마음에 듭니다.
완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완성될 수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위안이 되기도 하는구나.
참고로 이 일기를 쓰면서도 다른 파일에 틈틈이 오늘의 하위-일기를 쓰고 있는데, 그건 이 일기를 쓰면서 동시에 내 삶이 진행되고 있고, 삶이 진행되면 글쓰기의 부스러기가 생겨 잘 모아놔야 하기 때문이다. 글쓰기의 부스러기는 지금 내가 먹고 있는 치토스 봉지에 남은 부스러기와 본질이 같으므로 소중하게 다루어야 한다.
내가 아니고 싶다는 갈망은 글쓰기를 추동하는 강력한 동기 중 하나이다.
내가 아니고 싶다기보다는 다른 내가 되고 싶은 게 아닐까.
주기적으로 나를 보는 일은 정신 건강에 이로울까, 해로울까.
여기 와서 좋은 점은 사람들이 쓸데없는 일을 많이 한다는 거다.
쓸모는 누가, 어떻게 결정하는 것일까. 쓸데없는 일이라도 어딘가에는 쓸 데가 있을 거야.
읽는 속도는 더디지만, 껌을 씹듯 단어 하나하나 잘근잘근 씹으며 읽는 재미가 있다.
요즘 이렇게 읽으려고 한다.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 곱씹으면서 천천히, 더디게.
사람들이 말하는 소위 경험이라는 것, 그것의 가치를 너무 과소평가했나? 기회를 스스로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정말 많이 했던 생각이다. 나는 이때 술도 마시지 않았고, 여행을 다니기보다는 수업을 열심히 듣고 밤새워 공부하고 싶었기 때문에 교환학생들끼리 모이는 파티나 여행에 자주 참여하지 않는 편이었다. 나는 내가 꿈꿔왔던 경험을 하려고 한 것이지만, 때로는 다른 사람들이 보통 '경험'이라고 칭하는 것들을 해야 할 것만 같은 의무감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한국에서도 그런 것 같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라는 진부한 말을 떠올리게 된다. 어느 쪽이라도 무언가를 선택한다면 그것이 바로 경험이고 내가 선택한 삶인 것이다.
한국어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히브리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각자 단어의 방향을 따라가면 우리는 만나게 되어 있다.
그런데 하늘에서 난데없이 일본 소녀가 떨어진다면? 어이쿠, 피하자!
언어의 차이를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놀랍다.
이런 이야기를 잭 정과 나누었는데, 그는 긴 시의 좋은 점은 손바닥을 뒤집을 시간이 주어진다는 점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충분한 시간으로 인해 앞에서 한 말을 반복할 기회가 생긴다는 뜻이었다.
내가 두 개의 성격, 두 개의 기분을 지닐 수 있다는 점에 감사함을 느낀다.
그 시는, 내일 죽을지도 모르니 몇 가지 당부의 말을 전하는 내용이었고, 그중 들어줄 수 있는 건 하나도 없는 그런 시였다.
뜻을 모르지만, 찾아보지는 않았다.
그 물 웅덩이를 넘는 코토미를 보니, 그녀가 어떻게 대만에서 일본으로 점프할 수 있었고, 친구 한 명 없는 일본에서 홀로 새 삶을 꾸려나갈 수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 새벽 클럽의 어렴풋한 불빛. 최소한의 불빛과 노래방 기계에서 흘러나오는 빛만으로 살아갈 수 있으리. 살면서 많은 빛이 필요한 건 아니리. 어쩌면 빛 없이도 살 수 있으리.
그리고 '그게 다야'라고 말할 법한 것들을 그는 시로 썼다.
'그게 다야'라고 말할 법한 것들이 진짜 소중한 것들일지도 몰라. 그런 것들을 볼 줄 알아야 할지도 몰라.
내게는 지는 쪽이, 친절한 편이, 거절하지 않는 편이, 웅크리는 편이 편한데, 그게 삶에 꼭 도움이 되는 건 아닌 것 같다. 그래서 한국에서의 나는 조금 더 강해져야 한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나는 강해지는 것 외의 다른 선택지가 있다는 걸 안다. 어떤 따뜻한 곳에서는 내가 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호구처럼 살아도 된다는 걸 안다.
한국에서의 내 삶이 멈춰 있다는 생각 때문에 오히려 미국에서 초조해지기도 했다. 이것저것 재거나 따지지 않고 마음을 좀 더 가볍게 가졌더라면 더 나았을까 싶기도 하다.
나는 강해지지 않아도 괜찮다. 나는 변하지 않기로 한다.
있는 그대로 괜찮다는 말, 뻔하지만 늘 어려운 말이다. 무시해 버리기 쉽고 잊어버리기 쉽다. 그래서 계속 말해주어야 한다. 괜찮다고.
그들은 시가 결국 어둠 속에서 손전등을 켜는 일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게 우리가 죽는 순간까지도 사랑하는 것들을 포기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여태껏 나는 모든 영향으로부터 나의 삶을 보호하였으며, 성으로 담을 쌓고, 무언가를 등지고 글을 썼는데 이제는 온갖 자극에 몸을 열고 싶다.
자극을 받지 않으려고 피하고 도망치기도 했지만, 기꺼이 무언가에 뛰어들 때 삶이 훨씬 풍요로워진다는 걸 이제는 안다.
대체로 사람 빼고 좋아하는구나. 내가 사람이어서 미안했다. 저 사람과 있을 때는 최대한 사람답지 않은 모양으로 있어야겠다.
누군가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 서운함보다 미안함을 느끼는 건 어떤 마음일까. 연약하지만 다정하고 사랑스럽다.
그런데 신발을 한 짝만 잃어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양측의 높이가 다르니 낮은 곳과 높은 곳을 동시에 볼 수 있으니까.
일기를 다시 읽는 건 좋은 신호다. 적어도 당신이 당신의 삶을 버리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미국에서의 일기를 다시 읽어보았다.
시간은 풍부했다. 부족하지 않았다.
조급해하지 않아도 된다. 시간을 천천히 곱씹는 것이 시간을 늘리는 방법이다.
이런 사소한 후회를 누린다.
후회를 '누린다'고 표현하다니. 과거가 주는 선물 같은 것일까. 내게 있었던 가능성, 그것들 중 하나가 경험이라는 이름으로 내 일부가 되었으니까.
내가 깨달은 건 난 행복해도 된다는 것이다.
행복하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은 지금보다 나아지고 싶다는 마음이다. 행복하면 이 상태에 안주하게 될 것만 같아서, 불안해지곤 한다.
사랑이 많으면 나는 더 많은 것을, 그리고 더 좋은 것을 쓸 수 있다. 행복할수록 나의 영혼은 더 세분화될 수 있음을, 시인이지만 나도 행복해도 된다는 걸 알아버린 것이다.
불행이 있어서 행복이 있다고들 말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행복이 있기에 불행이 있기도 하다. 행복을 허용하지 않으면 오히려 시야가 좁아진다.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더 많이 불행하고 더 많이 행복하다.
'throughout'에는 어딘가 즈려 밟는 느낌이 있다. 정성스럽게 쓴 손편지를 봉투에 넣고 침을 발라 모서리부터 꾹 눌러 동봉하는 그런 느낌이 있다.
'throughout'을 생각하면 <A Thousand Years>라는 노래가 떠오른다. 천 년의 시간 동안 하루에도 몇 번씩 너를 생각하는 느낌이 'throughout'일 거야.
이곳이 좋은 건 기억을 잊게 되어서가 아니야. 난 천천히 다시 기억하게 되었어.
네 삶을 순서에 맞게 묘사하는 일은 무의미한 일일 것이다. 나는 너를 무작위로 기억한다.
사랑이 있을 때 많이 써둬야 한다. 사랑이 있어야 묘사의 눈을 갖게 되기 때문에 만상을 'devour'할 수 있다.
사랑하면 오래도록 바라보고, 그것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어진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코토미가 강가를 산책하지 않겠느냐 물었다. 걷기를 싫어하는 친구인데.
나와 같은 것을 좋아할 때보다도,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려고 할 때 사랑을 느낄 때가 있다.
우리는 마치 불화하는 대가족 같았습니다. 하지만 가족은 가족이지요.
나는 내가 무언가를 기다릴 때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 또한 발견했다.
그런데 그냥 하면 되는 거였습니다.
단순한 말이지만 오래 기억할 것 같다. 내가 요즘 가지려는 태도라서. 하고 싶은 건 그냥 해보고 싶다.
글쓰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건 그냥 내가 되는 것이라는 걸, 누구의 기대도 충족할 필요가 없다는 걸요.
집이라는 것이 반드시 물리적인 공간일 필요가 없다는 사실, 그것이 반드시 장소의 형태일 필요는 없다는 것, 고향은 복수의 공간일 수 있으며, 때로는 타인이 나의 고향이 되어주기도 한다는 것, 고향은 상황이거나 사건의 형태를 띌 수 있으며, 당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타국의 언어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요.
후기
오늘 하루도 행복하기. 이 문장을 '오늘 하루도 항복하기'로 바꿔 읽어도 말이 됩니다.
항복한다는 건 꼭 나쁜 건 아닐 거야. '항복'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소성 변형을 할 때, 물체가 외부에서 가하여지는 힘에 저항하여 그 원형을 지키려는 힘을 잃고 변형이 생기려고 함. 또는 그런 상태.'라는 뜻이 있었다. 오늘 하루도 항복한다는 건, 오늘 하루가 나에게 주는 변화를 기쁘게 받아들인다는 뜻일 거야.
중력을 이기지 못함은 지친 나무가 지닌 소중한 가치관이자 세계관입니다.
세상이 너무 커서 버거울 때, 그런 세상을 버리는 대신 주머니에 넣고 만지작거릴 수 있는 존재로 만드는 것도 한 방법이 되지 않을까요?
여러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이처럼 세상을 조금 더 입체적으로 보게 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걷다가 힘들면 항복 나무처럼 조금 항복한 자세로 살아보는 것도 한 방법이겠지요.
하루를 살고도 그 하루가 1000장의 소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 과장을 이해하리. 어떻게 해서 일기 속에서 시간은 팽창할 수 있으며 죽지 않을 수 있는지를.
미국에서 썼던 40여 편의 일기를 다시 읽어보았다.
아니, 이제 하위-일기라고 해야겠다.
내가 기록해 두었던 조각들이 모여서 다시 미국에서의 내가 떠올랐다.
그때의 나는 미국에 가기 전의 나와도, 지금의 나와도 다르다.
하지만 비슷한 부분도 있다.
일기는 내 존재를 기록하기도 하지만 재구성하기도 하며, 변화시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