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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꿀차

얼어붙은 여자

아니 에르노

by 성은

<얼어붙은 여자>는 소녀에서 여자가 되기까지 모든 여성이 겪는 경험에 대한 자전적 소설이다

사회 시스템 속에 당연하다는 듯이 자리잡은 차별과 부당함을 날카롭게 포착하고 있다

아니 에르노의 작품들은 읽는 책마다 모두 기대를 뛰어넘는다


서문
오늘날에는 남학생들만큼이나 여학생들도 대학에 다니고, 여성 대부분이 남성과 마찬가지로 직업을 가지고 있다. 피임은 여성들에게 어머니가 되는 순간을 선택할 자유를 부여했다. 하지만 어디에서나, 식사, 빨래, 청소 같은 실제 생활을 책임지고 항상 걱정하는 쪽은 여전히 여성이다. 여성들은 '모든 것을 절충하는 법'을 습득해서, 자신들의 두뇌 속 다양한 소프트웨어 사이에서 온종일 재주를 부린다. 이런 상황을 설명해주는 생물학적 이유는 하나도 없다. 단지, 소년과 소녀가 함께 살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전통이란 것이 깨어나서 자신의 모델을 강요한다. 말하자면 한 성에 대해 다른 성의 지배와 불평등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커플이 되기 전에 일 분담, 아이 돌보기, 상호 자유의 문제에 대해 합의해둘 필요가 있다. 커플이 된 후에는 대체로 너무 늦다. 왜냐하면, 함께 살아가는 이 모험에서, 우리는 평등하게 출발하지 않고, 서로의 사랑 속에서도 사회가 전통적으로 남성에게 부여한 특권들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 특권들을 문제 삼고 후대에 넘겨주지 않는 일이야말로 우리, 소녀들, 여성들의 임무다.
본문
세상이란 거기에 뛰어들고 즐기기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그 무엇도 우리를 막지 못한다는 사실을 나는 어머니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부모님은 내가 숙제를 할 때면, 물론 놀고 있을 때도 그렇지만, 식탁을 차리거나 접시를 닦으라는 말로 절대 방해하지 않는다. 부모님은 "넌 너만 생각하면 된다"라고 말한다. 이 얼마나 큰 선물인가! 자기를 희생하는 맏딸의 미덕이나, 식전주에 어울리는 안줏거리를 가져오는 심부름 잘하는 막내딸의 매력, 그런 종류의 일은 우리 집에서는 필요하지 않고, 심지어 못마땅해한다. 여자아이가 자신이 쓸모 있다고 여기는 기쁨, 사랑받기 위해서는 자기 방을 잘 정리하고 '얌전하게' 식탁을 치워주는 걸로 충분하다는 생각 같은 건 난 해본 적이 없다.
남자라는 이유로 우선권을 가지고 태어나 나의 미래를 막는 남자 형제가 나에게는 없다. 어머니의 태도 역시 의도한 것이었음을 이제는 안다. 어머니가 부르주아에 속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 자식이 부르주아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
중요한 것은 바로 내가 여자아이라는 이유로 그 성공이 나에게 금지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 부모님에게는 어떤 인물이 된다는 것에 성별이 문제되지 않았다.
은밀한 압력. 나는 혼자 사는 여자가 아니라, 아직 결혼하지 않은 불확실한 존재다. 사람들은 처녀와는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른다.
"잡혀 살기에는 아직 시간 많이 남았다, 쥐여살지 말아라!" 남자의 자유를 떠받드는 속삭임.
둘이 함께 있으면, 닮은꼴이 된다. 또 다른 선물인 주방용 조리 타이머의 날카로운 소리. 이제 닮은꼴은 끝. 둘 중 한 명이 일어나서, 압력솥 아래의 불을 끄고, 미친 듯 도는 압력추가 느려지길 기다리고, 압력솥을 열고, 수프를 체에 거르고, 다시 자신의 책 더미로 돌아온다, 어디까지 읽었더라? 생각하면서. 나다. 차이는 시작되었다.
...
그나 나나, 어머니 치마폭에서 요리를 도운 과거가 없었다. 왜 둘 중에서 나만 이것저것 해봐야 하나, 닭은 얼마나 오랫동안 삶아야 하는지, 오이의 씨는 제거해야 하는지, 그런 걸 알아보려고 왜 나만 요리책을 탐독해야 하고, 그가 헌법을 공부하는 동안 당근 껍질을 벗기고, 저녁을 먹은 대가로 설거지를 해야 하는가? 어떤 우월성의 명목으로 이런 일이 가능한가?
나는 나를 걱정하는 듯한 이런 기만적인 방식을 증오한다. 시어머니의 끝없는 친절, 마치 모래 함정 같은 친절이 나를 불편하게 한다. 달달하고 달콤하게, 유치하면서도 거짓되게, 비슷한 방식의 대답을 강요한다.
아무도 시어머니의 종알대는 소리, 가정의 활기참을 우스꽝스럽게 생각하지 않았고, 아들들과 며느리 모두, 자식들의 교육과 남편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시어머니를 존경했다. 누구도 시어머니가 다른 식으로 살 수 있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미래의 출생에 대한 소식을 나에 대한 불명예의 소식으로 간주하지는 않았지만 사실 거의 그런 듯이 반응했고, 아버지는 뜻밖의 재난이 우리에게 닥쳤다고 몹시 슬퍼했다.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반응. 세 번째 손자가 되겠구나, 시아버지는 손자 수부터 세어본다. 나는 시아버지의 긍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심지어 가족의 자궁이 되어버린, 내 자궁에도 혐오감을 느낀다.
어떤 남자가 청소하고 젖병을 물리기 위해 수업과 노트를 버리겠는가. 나도 그러지 않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엄청난 착각에 빠져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나 대신 가끔 아이의 이유식을 챙겨 먹이는 일이 자기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할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 아이에게 먹을 것을 챙겨주고 아이의 기저귀를 갈아준 일을 후회하지는 않겠지만, 그런 일이, 돈이 없고, 학생이라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비롯된, 다소 색다른 일화로 여겨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그곳에서 날마다 그와 나의 차이를 경험했고, 옹졸한 여자의 세계에 빠졌고, 자질구레한 걱정들로 질식할 것 같았다. 고독. 나는 가정의 수호자, 식구들 생필품과 유지보수 담당자가 되었다.
...
집, 음식, 교육, 직업이란 단어는 그와 나에게 더는 같은 의미를 갖지 않는다.
점잖은 사람들은 비웃는다. 결혼의 결과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으면 아예 결혼하지 마, 남자도 결혼하면 손해다, 주위를 둘러봐, 최저임금만 받는 사람들, 공부할 기회도 없었던 사람들, 종일 볼트만 만드는 사람들도 있다고. 아니야, 세상의 불행을 모두 다 긁어모아 한 여자의 말문을 막아버리기란 너무나 쉬운 일이지, 그런 식으로 생각하니 내가 입을 다물 수밖에.
그는 길거리의 차가운 공기와 문을 여는 상점들의 냄새를 맡을 것이고, 사무실에 도착할 것이고, 일을 시작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서류 작업을 마친 후에 기뻐할 것이다. 질투한다, 당연히, 그렇지 않을 이유가 없다, 어려운 일이 대한 두려움, 그 어려움을 극복하는 쾌감을, 나 역시 사랑한다. 이 아늑한 집에서, 어떤 어려움과, 어떤 승리감을 느끼겠는가, 실수하지 않고 마요네즈를 만드는 것일가, 울고 있는 아이를 웃게 만드는 것일까.
...
하지만 그에게서는 사라지지 않았다. 정오, 저녁, 토요일과 일요일에 그는 느긋한 시간을 갖고, <르 몽드>를 읽고, 레코드를 듣고, 수표책을 확인하고, 심지어 심심해한다. 휴식 시간. 이제 나는 한결같이 잡다한 일들도 포화 상태에 이른 시간만 보낼 뿐이다. 세탁소로 보내야 할 빨랫감, 다시 달아야 할 와이셔츠 단추, 소아과 의사와의 약속, 바닥난 설탕. 결코 감동을 주지도 못하고, 아무도 웃기지 못하는 목록. 시시포스와 그가 끊임없이 정상으로 밀어 올리는 바위, 지평선을 등지고 산 위에 우뚝 서 있는 남자는 그럴듯하게라도 보이지만, 부엌에서 1년에 365번 프라이팬에 버터를 던져넣는 여자는, 멋지지도, 부조리하지도 않다. 그냥 여자의 삶이다.
꽃다운 나이의 2년 동안 내 삶의 모든 자유는 아이의 오후 수면 상태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여러 번, 공원에서, 유모차를 밀면서, 나는 나의 아이가 아닌, '그의 아이'를 산책시킨다는 이상한 느낌을, 남편이자 아빠인,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그를 안심시키는, 위생적이고 조화로운 시스템 속에서 움직이는 말 잘 듣는 하나의 부품이라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우리 집, 우리 아파트는, 분명 그의 마음속에 피난처의 이미지로 간직돼 있었을 것이다,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정리해야 할 상자, 준비해야 할 아이의 식사, 목욕 시키기, 이런 것들이 눈에 확 들어오는, 늘 정리 정돈해야 하는 그런 공간의 이미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같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지 않았던 셈이다.
365를 두 번 곱한 식사, 프라이팬과 냄비 가스에 올려놓기 9백회, 깨트린 수천 개의 달걀, 뒤집은 수많은 고기, 비워 낸 수천 개의 우유 팩. 모든 여자가 해야 할 당연한 여자의 일. 곧바고, 그처럼, 직업을 가진다 해도, 내가 음식 만드는 일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단지 남자라는 이유로, 매일 하루에 두 번,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이 있는가.
냉소적이고 논리적인 결론, 이게 결혼이다, 둘 중 어느 한 명의 우울을 택하는 것, 둘이 함께하는 것은 낭비다. 내 자리는 아이 곁이고 그의 자리는 영화관이며, 그 반대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도 당연했다. 그는 영화관에 갔다. 나중에 그는 여름이면 테니스 치러 갈 것이고, 겨울이면 스키 타러 갈 것이다. 나는 아이를 보살피고 산책시킬 것이다.
언제나 사람들은 자기 일까지 하며 시험에 성공한 남자의 꿋꿋한 부인을 칭찬하고,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의 성공에서 반은 당신 몫이에요, 그를 정신적으로 도왔고, 지지했고, 아이가 울지 않게 했고, 모든 일에서 그의 부담을 덜어줬어요. 그런데 남편의 경우라면, 사람들은 오히려 그를 불쌍하게 여겼을 것이다. 성가신 여자, 그는 그런 여자를 견뎌야 했으니까.
하지만 여기까지, 남녀의 차이가 인사를 한다, 앉아서, 아이에게 뽀뽀하고, <르 몽드>를 읽는 일은, 취업 첫날에 마음이 들뜬 여자의 꿈이고 환상이다. 내가 도착하자마자 도우미가 떠난다. 아이의 저녁 식사는 내가 주어야 하고, 내 음식이 접시에 담겨 저절로 배달되지는 않을 것이다. 수업 준비는, 아이가 잠들어야 가능할 것이다. 그는 텔레비전을 볼 것이다. 나는 그냥 선생이 아니고, 절대 그냥 선생이 되지 못할, 여선생이다, 뉘앙스의 차이.
그래서 남자와 똑같은 일을 하지만 결코 자신의 가정을 눈에서 떼어내지 못하고, 고등학교 정문에 가정을 내려놓았다가 학교를 나갈 때 가정을 다시 들고 간다.
당신이 균형을 유지하고 있어 다행이야, 그 말은 내가 내 직업에 대해 입을 닫았다는 뜻이다.
놀라운 일은, 그가 항상 나를 설득한다는 사실이다. 내가 일주일에 4일하고도 반나절 동안 집에서 가사 도우미의 도움을 받는, 특권을 누리는 여자라고. 그렇다면 남자는 자기가 좋아하는 부인을 일주일 내내 도우미로 부리는데, 대체 어떤 남자가 특권을 누리지 않는다는 말인가?
옮긴이의 말
누구나 얼어붙은 여자가 될 수 있고, 얼어붙은 여자의 이야기는 모든 여자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평범하다면 평범하고 특별하다면 특별한 이름 없는 소녀가 꿈꾸던 미래가 어쩌면 사랑이라고 믿었던 남자와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세 번의 식사 준비 + 청소 + 빨래 + 장보기) X 365일'의 공식으로 이어지고, 이렇게 반복되는 일상에 하루 여섯 번의 수유와 아이 목욕시키기가 추가되는 경험은 나의 경험이 된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며 이유 없는 죄책감을 느끼고, 퇴근 후에 부리나케 슈퍼마켓에 들러 장을 보고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주방으로 달려가 저녁을 준비하며 누군가 차려주는 밥상에 숟가락만 얹고 편하게 먹고 싶다는 생각은 나의 생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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