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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꿀차

빈 옷장

아니 에르노

by 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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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옷장>은 아니 에르노의 데뷔작이지만 나는 그의 작품들 중 4번째로 읽었다.

아버지에 관한 <남자의 자리>와 어머니에 관한 <한 여자>를 읽고 난 뒤에 <빈 옷장>을 읽으니 책에 등장하는 식료품점의 역사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남자의 자리>와 <한 여자>는 작가가 훗날 과거를 회상하며 부모를 이해하는 내용이 많은데, <빈 옷장>에는 부모와 그들의 계급을 향한 날것 그대로의 분노가 드러나 있다.


스무 살 때 일어난 사건에서 시작하지만, 곧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그 사건이 일어나기까지의 성장 과정을 회상한다.

주인공은 노동자 계급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하고 부르주아 사회로의 진입을 꿈꾼다.

사립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지금까지 살아온 부모의 세계와 다른 세련된 사회를 접했을 때부터 부모를 향한 반발심이 자라기 시작한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교에 입학하기까지, 부모가 운영하는 카페 겸 식료품점, 그리고 그곳에 찾아오는 천박한 사람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한편으로는 부모가 가게를 운영하며 자신의 교육을 지원해주는 덕분에, 일찍 취직한 마을의 다른 아이들과 달리 공부를 이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바로 그 교육으로 인해 알게 된 취향과 학문이 있는 세계, 교양 있고 세련된 사람들은 부모와 완전히 다르다.

본인은 부모의 세계에 속해 있다는 열등감 때문에, 더욱 부모를 외면하고 무시하며 부르주아 사회로 나아가기를 갈망한다.


계급 간 이동을 겪은 입장에서 노동자와 부르주아 사회, 그리고 그 속에서 느끼는 감정을 면밀하게 관찰한 내용이, 여성으로서 겪어야 하는 폭력과 함께 작가의 개인적 경험에 녹아 있다.

다른 책들과 달리 <빈 옷장>에서는 작가가 드니즈 르쉬르라는 가상의 인물을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더 내밀한 이야기까지 할 수 있었을 것 같다.

성장기를 읽고 나니 그 이후의 삶도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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