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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꿀차

여자아이 기억

아니 에르노

by 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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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이 책을 빌릴 때는 낙태에 대한 내용인 줄 알았는데 <사건>과 헷갈린 것이었다.

<여자아이 기억>은 그 전에 일어났던 여름방학 캠프에서의 일들을 주로 다루고 있다.

그때의 소녀를 묘사하고자 기억을 끈질기게 파고들고 집요하게 글을 쓰는 과정까지 드러난다.

여자아이에 대한 기억일 뿐만 아니라 여자아이의 기억이기도 하다.

그때의 여자아이가 지금과 어떻게 다른지 기억을 되짚어 가는 것.

성장통을 겪는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본문
나는 마치 아무것도 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이 뒤에 이어질 일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할 건 이게 전부인 것처럼 여기에서 멈추고 싶다. 그렇게 하는 건 낭만적 허상인 소설 주인공을 정의하기에 알맞은 방식이다. 하지만 계속해야만 한다. 그녀의 욕망과 자만심, 기다림을 바로 그 순간 꽃피우게 만든 - 사회적, 가족적, 성적 - 기반이 무엇이었는지 정의하고, 자부심을 느끼는 이유와 꿈을 꾸는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를 발견해야 한다.
나의 기억 속에서는 이러한 사실 중 어느 것도 희미한 빛조차 띠지 않는다. 그러니까 오늘날의 관점에서 전쟁의 분위기처럼 여겨질 만한 어떤 것도 S의 여자아이를 동요시키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그녀가 드골이 공언했듯 프랑스의 것으로 남아야 마땅한 알제리의 '질서 수호'에 찬성했으리라고 확신한다. 갈등이 지속되는 3년 동안 그녀가 워낙 익숙해져서일 수도 있고, 옛날부터 남자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그런 죽음, 먼 곳에서의 죽음에 대한 낭만주의적 생각에 물든 어렴풋한 몰이해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바로 이 순간에도, 거리나 탁 트인 공간, 지하철, 대형 강의실에서는, 수백 편의 소설이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한 챕터씩 쓰이고 지워지고 다시 시작되고 있는데, 그것들은 결국 전부 다 죽고 만다. 현실이 되거나, 혹은 현실이 되지 않아서.
나였던 여자아이, 아니 D를 오른 지방의 S 기차역 앞 인도에 다시 세워놓은 날 이후 여름과 가을, 겨울이 흘러갔다. 그 시간 동안 나는 그 1958년 여름이라는 시간의 경계를 앞으로도 뒤로도 뛰어넘는 걸 거부하면서 방학 캠프라는 공간에 갇혀 있었다. 미래가 없는 일종의 몰입 상태에 그대로 있도록 노력하면서. 그 결과, 나는 그 시간들을 최대한 가까이 탐색하고 그 시간들이 글쓰기를 통해 실제로 존재하게끔 하기 위해서 방학 캠프에서 보낸 6주간의 시간을 40여 주의 시간으로, 정확히는 273일로 늘려 아주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100페이지가 좀 넘는 책을 읽는 두어 시간 동안 젊은 날의 여름이 지닌 어마어마한 너비와 폭을 체감할 수 있게끔 만들기 위해.
자주, 나는 내 책을 끝마치고 나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 생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른다. 출간에 대한 두려움인지, 완성했다는 만족감인지. 책을 다 쓰고 나면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지 않고 글을 쓰는 사람들, 나는 그들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벽이라는 여과장치 때문에, 바깥세상은 힘을 잃고 그녀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알제리에서 있었던 사건들이나 - 그렇지만 철학 공부를 시작한 이후 그녀는 알제리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때부터 알제리의 독립을 열렬히 지지하고 있었다 - 제라르 필리프나 카뮈의 죽음도 그녀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다.
인생을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의 우리 모두는 먹고살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의무와, 선택을 해야만 하는 순간을, 그리고 결국에 가서는 있어야 할 그곳에 자신이 있다는 혹은 있지 않다는 느낌을 어떻게 감당해나가는 걸까?
그리고 결국 중요한 것은 일어난 일이 아니라 일어난 일을 가지고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라는 깨달음을 증명하는 이야기.
'학회의 참석자들은 모두 박물관으로 달려갔고, 나는 내 지나간 삶 곳의 노던 핀츨리에 갔다. 나는 문화적인 사람이 아니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단 하나밖에 없다. 삶을, 시간을 붙잡고 이해하며 즐기는 것.'
이것이 이 이야기가 지닌 가장 커다란 진실일까?
영국에서 쓴 마지막 편지: '1년을 나태하게 보내고 다시 공부를 시작하려 해. 물론 이런 변화는 조금 어렵게 느껴질 거야. 하지만 뭔가를 하는 게 더 기분 좋아. 비록 사회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논문일지라도, 유용하고,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듯한 느낌이 들 테니까!'
'내가 무척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니체의 문장이 있어. 진실로 인해 죽지 않을 수 있도록 우리에게는 예술이 있다.'
내가 쓴 것의 기억은 벌써 지워지고 있다. 나는 이 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내가 책을 쓰면서 뒤쫓고 있던 것마저도 녹아 없어져버렸다. 나는 종이 더미 속에서 이 글을 쓰려고 했던 의도처럼 보이는 메모를 발견해냈다.
어떤 일이 벌어지는 그 순간에 벌어지고 있는 일이 지닌 무시무시한 현실성과 몇 년이 흐른 후 그 벌어진 일이 띠게 될 기묘한 비현실성 사이의 심연을 탐색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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