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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꿀차

웃음과 망각의 책

밀란 쿤데라

by 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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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과 망각의 책>은 그 전까지 읽은 책들과 다르게 소설과 에세이가 혼합된 형식이다.

쿤데라 본인에 대한 내용이나 체코의 역사적, 정치적 사건들도 등장한다.

생소한 형식이지만, 쿤데라의 사유 과정을 따라가는 것이 흥미로웠다.

7부의 독립적인 이야기들로 구성된 이 소설은 '웃음'과 '망각'이라는 주제를 탐구하는 사고 실험 같기도 하다.

역사가 아직은 느리게 나아가던 시절에는 그다지 많지 않은 사건들이 쉽게 기억 속에 새겨졌고, 누구나 아는 배경을 이루었으며, 그 배경 앞에서 개인사가 모험들로 가득한 매혹적인 공연을 펼쳤다. 오늘날, 시간은 성큼성큼 나아간다. 역사적 사건은 하룻밤이면 잊히고 말아 다음 날이면 이미 새로운 날의 이슬로 반짝인다.
하지만 목가란 본질적으로 모두를 위한 세상이므로, 망명을 원하는 사람들은 목가를 부정하는 사람들로 간주되어 외국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철창 뒤로 가게 되었다.
그러자 지적이고 급진적인 이 젊은이들은 문득, 그들이 품었던 이상과 닮지 않게 되었으며, 그들이 한 행위가 드넓은 세상에 나가 고유한 삶을 살기 시작했다는 기묘한 감정을 품게 되었다. 그 행위는 그들이 품었던 생각과 더 이상 닮지 않았고, 행위 주체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이 똑똑한 젊은이들은 그 행위를 하고 난 뒤 비명을 내질렀고, 그 행위를 부르며 비난하고, 뒤쫓고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가 그의 인생 사진첩에서 그녀를 지우고 싶은 건 그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랑했기 때문이다.
미래는 아무도 관심을 가지 않는 무심한 공허에 불과할 뿐이지만 과거는 삶으로 가득 차 있어서, 그 얼굴이 우리를 약 올리고 화나게 하고 상처 입혀, 우리는 그것을 파괴하거나 다시 그리고 싶어 한다. 우리는 오직 과거를 바꾸기 위해 미래의 주인이 되려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의 전기와 역사를 다시 쓰고 사진을 다시 손볼 수 있는 암실에 접근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세상은 우리가 알듯 천사와 악마들이 나눠 지배하고 있다. 그렇지만 세상의 선이란 천사들이 악마들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렸을 때 믿었던 것처럼.) 서로의 힘이 대략 균형을 이룬다는 것을 암시한다. 세상이 부인할 수 없는 의미로 넘쳐난다면 (천사들의 권한) 인간은 그 무게에 짓눌려 버린다. 세상이 모든 의미를 잃어도 (악마들의 통치) 우리는 살아갈 수가 없다.
사랑이란 끊임없는 물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사랑에 대한 이보다 나은 정의를 알지 못한다.
인간은 자신이 태양과 온갖 별들을 포함해서 우주를 끌어안을 수 없다는 걸 안다. 인간에게 더욱 견디기 힘든 일은 다른 무한도 알 수 없도록 정해졌다는 사실이다. 손 닿을 만큼 아주 가까이 있는 무한조차도 말이다. 타미나는 자기 사랑의 무한을 놓쳤고, 나는 아버지를 놓쳤으며, 저마다 자신의 작품을 놓친다. 완벽을 좇아 사물 내부로 들어가지만 우리는 결코 끝까지 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외부 세계의 무한이 우리를 벗어났을 경우 우리는 그것을 자연스러운 조건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다른 무한을 놓쳤을 경우에는 죽도록 자책한다. 과거에 우리는 별들의 무한만 생각했지 아버지가 자신 안에 품은 무한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우리가 사랑한 존재를 놓치는 것보다 더 견디기 힘든 일은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았던 베토벤이 원숙기에 이르러 가장 좋아한 형식이 변주였다는 것, 그 16박자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내면 세계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녀가 불행한 것은 아이들이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그들 세계의 경계 너머에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도살장에서 송아지를 죽인다고 항거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송아지는 법 밖에 있다.
그녀는 살고 싶어 했고, 삶은 그녀에게 거대한 기쁨을 제공했다. 하지만 그녀는 "나는 살고 싶다."라는 말이 거미줄로 짜였다는 것도 알았다. 아주 사소한 일, 지극히 사소한 일로도 경계선 너머에 있을 수 있었다. 경계선 너머에서는 사랑, 신념, 믿음, 역사, 그 어느 것도 의미가 없었다. 인간 삶이 경계선 아주 가까이에서, 심지어 경계선과 맞닿은 곳에서 펼쳐진다는 사실에, 인간 삶이 경계선에서 수 킬로미터 떨어진 것이 아니라 겨우 1밀리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는 사실에 인간 삶의 모든 신비가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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