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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꿀차

그물을 헤치고

아이리스 머독

by 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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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을 장편화한 느낌이다.

주인공이 런던 거리를 쏘다니며 우연에 우연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내용인가 싶었는데 다 읽으니 알 것 같다.

자신에게 비치는 타인의 모습대로만 타인을 판단했던 제이크는 그 사람들이 자신의 믿음과는 다른 사람이었음을 깨닫는다.

본문
어떤 행동을 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다면 부적당한 이유도 있을 수 있다고 해서 그 행동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 지금 망설일 처지는 아니라고 나는 단정하였다.
대체 우리는 언제나 인간을 알게 될 것인가? 앎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알려는 욕망을 버리고 마침내는 그 필요조차 느끼지 않게 될 때 아마 그때에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리라. 그러나 그때 성취한 것은 이미 앎이 아니다. 일종의 공존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또 가장한 사랑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절박한 것은 영원히 절박한 것이 아니며 그저 일시적으로 그럴 뿐이다. 온갖 일과 사랑, 부와 명성의 추구, 진리의 탐구도 인생 그 자체도 지나가 버리고는 무가 되는 순간으로 형성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과거와 미래 속에 우리의 불안정한 주소를 마련하는 저 불가사의한 생명력으로 해서 우리는 이 허무의 구렁 속을 전진해 간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하나의 정신이 부단히 죽어 가는 시간, 잃어버린 의미, 다시 잡을 수 없는 순간, 잊어버린 얼굴을 묵상하며 그 위에서 배회하다가 마침내 우리의 모든 순간을 끝내 버리는 마지막 단절의 시간이 찾아들어 이 정신은 그것이 생겨났던 허공 속으로 다시 가라앉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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