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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성호 Feb 01. 2022

와서 보라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가?


요한복음 1:35~42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까 하니 라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곳을 보고 그날 함께 거하니 때가 10시쯤 되었더라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에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아들이라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내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오늘 “와서 보라”는 제목으로 함께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세례 요한의 이야기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저희가 2주 전에 나눴던 말씀을 보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하며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푸시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증언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는 세례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세례 요한의 시선에서

이 이야기는 처음에는 세례 요한에게 집중을 합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을 따르던 두 제자에게 집중하고 그 두 제자에게서 예수님으로 다시 시선을 옮긴 다음에 그 두 제자 중에 한 명인 안드레에게 집중을 하고 다시 그 안드레로부터 베드로, 베드로로부터 다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관점을 따라서 오늘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요한이 우리에게 요한복음을 기록한 방식을 따라서 함께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34절의 말씀을 보면 그 전날의 상황이 오늘 말씀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35절은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세례를 준 그다음 날이라는 뜻인데 34절에 세례 요한이 하고 있는 것은 계속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증언하는 일이었습니다. 세례를 베푼 후 하루가 지나서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섰는데 이 요한복음에 그 이전에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언급되지 않았지만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세례 요한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사람들의 인기를 구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증거 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오실 메시야에 대해서 외쳤던 사람입니다. 광야라는 곳은 인적이 드물고 사람들이 찾아오기 쉽지 않은 곳입니다. 만일 세례 요한의 삶의 목적이 사람들로부터 오는 인기였으면 세례 요한은 절대 광야에서 사역을 시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사역은 광야로부터 시작을 했습니다. 그가 직접 사람들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그러므로 그를 따르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에게 세례를 받고 하나님을 믿는 제대로 믿는 신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 35절은 요한이 자기 제자들과 함께 있는 모습을 우리에게 설명합니다.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는데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은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곳에서 거닐면서 말씀을 전하고 있는 모습이 세례 요한의 눈에도 보였습니다.

이제 세례 요한의 사역은 분명합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사역을 준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증거하고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인 것을 증거 하는 사람이어서 예수님께서 오시면 그의 사역의 대부분이 마무리되는 시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보이는 바로 그 장소에서 세례 요한의 메시지는 동일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오신 메시야인 것을 선포합니다. 그래서 36절에 세례 요한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미 그 전날에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얘기했습니다. 34절에서는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는 분명하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오실 메시야이시고 우리를 구원하실 그리스도인 것을 증거 하였습니다. 하루가 지나도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서 동일하게 증거하므로 세례 요한의 제자 두 사람이 그 말을 듣고 바로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37절에 보면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랐다고 되어 있습니다. 34절부터 36절에 나타난 세례 요한의 모습을 주목해서 보십시오. 세례 요한은 자기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 대해서 조금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당시 세례 요한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영향력이 상당해서 우리가 복음서를 잘 읽어보면 해롯 왕도 세례 요한에 대해서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의 메시지에 의해서 헤롯 왕의 정치권력이 전복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헤롯 왕은 세례 요한을 매우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만큼 세례 요한의 메시지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의 말을 들으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었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었고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알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을 따르는 세력들이 그만큼 많았고 인기가 높았습니다. 사람들은 인기를 얻게 되면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 때문에 자신의 중심이 흔들릴 때가 많습니다. 그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인기가 생기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권력과 명예를 얻게 되면 중심이 흔들리는 사람들은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은 그렇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관심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것, 그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이 땅에 오셨고 그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야임을 증거하는 그 일. 그 일을 온전히 감당하는 것이 그의 유일한 관심이었고 그 일에만 신경을 썼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제자가 옆에 있다고 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옆에 있는 곳에서 예수님을 강력하게 증언하면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곧바로 자신을 버리고 떠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하는 것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서 있다는 것을 사도 요한은 특별히 구체적으로 적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증언한 대목은 많이 있는데 지금 이 대목에서는 자기 제자들 그리고 자기 제자들 중에서도 중요한 멤버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 두 명이 있었다는 사실을 요한복음은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 말을 말함으로써 세례 요한에게서는 큰 손실이 났습니다. 자기를 따르던 중요한 제자 두 사람이 곧바로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이렇게 되면 세례 요한을 따르는 제자들 그룹에 큰 동요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주는 가장 중요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다른 중요한 사람이 나타났기 때문에 세례 요한을 더 이상 따르지 않을 수 있는 상황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에게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두 제자의 시선에서

이제 우리 두 제자에게 한번 주목해보겠습니다. 세례 요한의 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이 두 제자가 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 곧바로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37절에 보면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랐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에게로 “갔다”라고 하지 않고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른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제자가 됐다는 거죠. 그러나 두 제자는 분명히 세례 요한의 두 제자였습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자기 스승의 말을 듣자마자 배신이라고 말을 할 수 있는 이 같은 행위를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드는 게 당연합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세례 요한의 메시지는 일관되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내 뒤에 오실 분이 있고 나는 그의 신의 끈을 풀기도 마땅치 않은 사람이고 나는 그의 노예라고 불리기에도 자격이 충분하지 않은 사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오직 내 뒤에 오실 그분을 증거하고 그분의 오심을 그분이 오실 것이라는 것을 외치는 소리일 뿐이다’라고 외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의 두 제자가 단순히 세례 요한이 하는 말,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 말 한마디를 듣고 자기 스승을 배신하고 예수님을 따라간 것은 아닐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메시지가 일관되었고 그 메시지와 세례 한의 삶이 일치하였기 때문에 그에게서 배운 두 제자가 그 가르침대로 행동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 두 제자가 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 2명이 세례 요한의 제자 그룹에서 벗어나 예수님을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방향으로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3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돌이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던 길을 돌이켜 그 제자들을 보았다고 얘기합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방향을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쓰는 표현들을 읽어보면 얼마나 세심하고 상세하게 단어 하나하나를 골라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 사람들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이렇게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하는 행위가 무엇을 말하는지를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자신에게로 오는 모습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습니까? “그 따르는 것”을 본다고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고 오는 모습을 그 따르는 것이라고 묘사하면서 이제 예수님의 관점에서 두 제자를 만나는 장면으로 전환됩니다.


예수님의 시선에서

예수님께서 질문하십니다. “그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찾느냐 무엇을 얻기를 원하느냐 무엇 때문에 나에게 오느냐’라고 묻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두 제자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까” 그리고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에는 번역하면이라는 말이 세 번 나옵니다.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신약 성경은 헬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경을 기록할 때 헬라어를 사용했습니다. 그 의미가 무엇이냐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자신들의 모국어인 히브리어, 그 당시의 변형된 히브리어인 아람어로 기록하지 않고 당시 헬라 문화권의 공용어인 헬라어로 성경을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마치 한국 사람이 한국말로 말한 내용을 영어로 번역해서 기록한 것과 동일합니다.

이 랍비라는 말은 히브리어입니다. 랍비는 선생이라는 뜻의 라브에서 나온 말입니다. 랍비는 나의 선생이라는 뜻입니다. 기본적으로 원래는 라브가 선생이라는 뜻인데 선생을 부를 때마다 어떻게 부르냐면 그냥 나와 무관한 존재로 선생님을 부르는 게 아니라 항상 나의 선생님 나의 선생님 이렇게 부르기 때문에 ‘라브’라는 말이 선생님이라는 말을 쓰이지 않고 ‘랍비’가 선생님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랍비가 히브리어이기 때문에 번역하면 선생(헬라어로 디다스케)이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히브리어 어감을 정확히 표현하기 위해서 히브리어를 사용할 때는 반드시 헬라어로 번역해서 그 당대의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했습니다.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 복음전파자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와서 질문합니다. 뭐라고 얘기하냐면
“나의 선생님, 어디에 계시오니까”
여기에는 우리 번역에는 계시오니까라고 되어 있는데 가장 적합한 표현은 ‘어디에서 거주하고 있으십니까?, 주거지가 어디십니까?, 삶의 터전이 어디 있습니까? 집이 어딥니까?’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1년이고 2년이고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말씀을 전해줄 수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려주시면 저희가 거기 가서 듣겠습니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와서 보라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Ἔρχεσθε καὶ ὄψεσθε.
 “Come,” he replied, “and you will see.”


오늘 설교 제목이 “와서 보라”입니다.

이 와서 보라라는 번역이 오늘 성경 본문에서 가장 한국말로 옮기기 어려운 번역입니다.

우리 말로는 “와서 보라”로 번역할 수 있지만 원래 뜻은 “와서 보라”가 아니라 “오라 네가 보게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나에게로) 오라 너희가 볼 것이다” 즉, 나한테로 오면 너희는 보게 될 것이고 알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진리를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오라 알게 될 것이다. 나에게로 오라 그러면 알게 될 것이다. 내게로 오라


만일 예수께서 거짓 선지자였다면 예수님께서 거짓 스승이었다면, 이렇게 말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기를 치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모습 실제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실제 모습보다 조금 더 과장된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기 때문에, 일상을 함께 하는 일이 드뭅니다. 잠시 잠깐 가장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고 자신을 따르게 하고 이익을 취하는 가짜 스승들은 자신의 삶의 터전으로 사람들을 초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오라 내게로 오라 그러면 너희가 보게 될 것이다.

세례 요한의 제자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그들이 가서 계신 곳을 보고 그날 함께 거하였습니다. 그때부터 같이 그곳에서 머물렀습니다. 그때가 10시 우리의 시간으로 하면 오후 4시쯤 되었습니다. 이제 여기까지가 예수님의 세례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과정이었습니다.

이제 시선이 예수님의 두 제자 중에 한 명에게로 옮겨갑니다.


안드레의 시선에서 (그리고 베드로)

예수님의 두 제자 이 세례 요한의 두 제자 중에서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는 두 명이었습니다. 그중 한 명이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였습니다. 요한복음 1장 40절에 안드레를 소개하는 방식이 독특합니다.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안드레’라고 소개하지 않습니다. 대신,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라는 말도 그 당시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으로는 매우 이상한 표기 방식입니다. 당시 사람을 이름을 쓰는 표기 방식은 ‘항상 누구의 아들 누구’였습니다. 그래서 ‘요한의 아들 시몬’, ‘요한의 아들 안드레’가 정확한 표기 방식입니다. 형제의 이름으로 안드레를 소개합니다. 그 표현도 이상한 부분이 있습니다. ‘시몬의 형제 안드레’라고도 기록하지 않습니다.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고 적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안드레라는 사람을 소개할 때부터 사도 요한은 시몬 베드로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는가를 우리에게 설명하고 그의 이름이 어떻게 바뀌게 되었는지 소개하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에 ‘안드레’를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본래 이름은 따로 있었습니다. 시몬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지어준 이름이었습니다. 베드로는 헬라어 페트라에서 온 것이고, 페트라는 게바(케파스)라고 하는 히브리어를 헬라어(페트라)로 바꾼 게 베드로였습니다.

안드레가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고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하루 정도 보냈습니다. 정확하게는 만 하루도 채 보내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빨리 예수님께 갔다고 하더라도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말을 하고 그다음에 예수님과 함께 거한 시간이 겨우 오후 4시일 뿐입니다. 아무리 길어봤자 한 5, 6시간 정도밖에 안 됐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시간을 보낸 안드레가 제일 먼저 한 행동이 있습니다. 41절에 보면, 안드레는 “자기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라고 말했습니다. 안드레는 자기 형제 시몬을 찾아갑니다. 자신이 메시야를 만났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세례 요한에게서부터 가르침을 받고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던 그분을 만나보니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메시야인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방식으로 베드로를 초청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얘기합니까?


‘내가 메시야를 찾았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우리가 메시야를 발견했다.’


그렇게 얘기한 다음에 베드로를 데리고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진리를 전하는 방식이 다 이 같은 방식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가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까? 세례 요한이 자기의 제자들을 데리고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예수님을 보여주고 예수님에 대해서 선포하고 예수님을 따르도록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따르려는 세례 요한의 두 제자를 자기의 제자로 삼으실 때도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을 불러 자기에게로 오도록 초청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그들이 진정 예수님의 제자가 되도록 만드셨습니다. 안드레가 자기 형제 시몬을 예수님의 제자로 만드는 방식도 동일했습니다. 자기 형제 시몬에게 찾아가서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한 후 그를 데리고 예수께로 오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증거하는 방식도 동일합니다. 우리도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가야 니다.

예수님을 보여주는 겁니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시고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자신이 메시야인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예수님을 직접 만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고 우리가 말씀을 읽고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나기를 간구하며 기도하면 말씀 가운데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대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와 보라 오라 내게로 오라 내게로 오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게로 오면 그러면 알게 될 것이다.


여러분이 성경책을 펴서 시간을 정해서 읽고 기도하고 간구하며 예수님을 따르고자 했던 제자들처럼 예수님께로 나아가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마음으로 예수께 나아와 말씀 앞에 나와 기도하면 여러분은 살아계신 예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오라 그러면 볼 것이다. 오라 볼 것이다.


다시 예수님의 시선으로  

다시 베드로에서부터 예수님에게로 시선이 옮겨집니다.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내가 요한의 아들 심문이니 장차 게바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 번역하면 베드로라

우리는 베드로라는 말에 대해서 별 감흥이 없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라는 말은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바위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향해서 당신은 흔들리지 않으면 바위 같은 사람입니다라는 말을 한다면 그 말은 한 사람에게 할 수 없는 놀라운 칭찬이 될 것입니다. 누군가 여러분을 향해서 당신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을 한다면 그 말은 여러분 인생에서 들을 수 있는 가장 큰 칭찬의 말이 될 것입니다.


당신은 이 세상이 도무지 흔들 수 없는 믿음의 소유자입니다. 반석 같은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복음서에 나타난 베드로의 모습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읽은 복음서의 베드로가 흔들리지 않는 반석처럼 보였습니까? 여러분이 읽은 베드로가 실패하지도 않고 의심도 없고 도망치지도 않고,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는, 가장 완벽한 믿음의 소유자처럼 보였습니까? 베드로의 삶이 그렇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의 삶은 감추고 싶은 과거가 매우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부끄럽고 도망치고 싶고, 할 수만 있다면 모든 사람의 입을 다물게 하고 모든 사람에게로부터 그 사실을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의 소유자가 베드로였습니다.

 

저는 가끔 왜 베드로가 복음서를 기록하지 않았을까를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베드로 자신이 기록한다면 복음서에서 너무나 빼고 싶은 사건이 많기 때문에, 자신을 포장하고 싶은 부분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베드로가 복음서를 적지 않은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의 이름을 시몬에서 베드로로 바꿔서 불러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온아 너는 장차 게바라고 불릴 것이다.

너는 장차 반석이라 불릴 것이다.

너는 장차 흔들리지 않는 바위라고 불릴 것이다.

너의 앞으로의 미래가 장래가 무슨 일이 있을지 내가 다 알지만 네 앞에 펼쳐질 삶의 모습이 무엇인지 나는 다 알지만 나는 너를 게바라고 부르겠다. 나는 너를 게바라 부르고 너의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우리의 모습만을 가지고 생각하면 감추고 싶은 모습이 하나님 앞에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도 나의 모습 중에서 가장 보여주고 싶은 모습이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가장 멋지게 보이는 앵글과 필터와 앱을 사용해서 가장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어 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를 기억하십시오. 요한의 아들 시을 기억하십시오. 그는 수많은 인생의 실패와 부끄러움과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신한 그 모든 부끄러운 과거의 역사를 다 담은 복음서와 함께 다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사실을 아시면서도 그를 게바라고, 반석이라고 불러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에게만 그렇게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 대하여 예수님은 동일하게 부르십니다. 우리의 이름을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며 이야기하십니다.


너의 삶의 모습이 어떠할지 나는 다 알고 있다. 실패도 있을 것이고 배신도 있을 것이고 부끄럽고 감추고 싶은 죄악 된 모습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너는 장차 흔들리지 않는 바위처럼 믿음 위에 굳게 설 것이다.


이렇게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행동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습니까? 세례 요한의 제자가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처럼,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처럼 예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오라 나에게 오라 그러면 보게 될 것이다.

나에게 오라 나에게 와서 말씀 가운데 나를 만나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너희 가운데 있는 나를 만나 나의 제자가 되어라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듣고 함께 결심하는 여러분이 되길 소원합니다.

내가 예수님께 가겠습니다. 나를 부르시고 초청하시는 예수님의 초청에 제가 응답하겠습니다.

말씀 가운데 찾아가 말씀을 펴서 말씀을 읽으며 기도하며 말씀이 육신이 되어 나에게 오신 예수님께 가겠습니다.

 

예수님께로 가서 예수님을 보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고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시는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올려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사랑함으로 자신의 전부이신 예수님을 우리에게 내어주셨습니다. 그 몸이 찢기고 십자가에 못 박혀 달려 죽으심으로 그 피 흘리심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사 예수님이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고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가 깨뜨려져서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우주의 통치자가 되셨습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을, 예수 안에 있는 우리 모두를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처럼 부끄러울 것 없는 믿음을 가진 이들처럼 바라보시고 지켜주심을 믿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와서 보라 내게로 오라 너희가 보게 될 것이다

내게로 오라 너희가 만나게 될 것이다.

내게로 오라 너희가 나의 제자가 될 것이다.

이 말씀을 기억하며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말씀 가운데 찾아가 말씀을 펴고 말씀을 읽으며 말씀을 묵상하며 말씀 가운데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령님께서 우리 가운데 임재하셔서 말씀이 살아있음을,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말씀으로 찾아오는 하나님인 것을 우리로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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