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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성호 Jun 12. 2023

성령 충만: 은혜와 능력의 충만

스데반 - 성령충만과 하나님 나라

성경본문: 사도행전 6장 8절 -15절
8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9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10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11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12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13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아니하는도다 14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15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성령 충만이라는 말을 우리는 교회에서 종종 듣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충만히 임재하여 한 사람에게 성령의 능력이 강하게 나타나는 상태를 우리는 성령 충만이라고 부르곤 합니다. 우리는 종종 이 성령충만이 뜨거운 찬양과 기도 속에서 혹은 교회 안에서만 나타나는 일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아니면 순복음 교회처럼 성령을 강조하는 교회는 성령 충만을 강조하고, 장로교 전통의 교회들은 성령충만을 강조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도 많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사도행전에는 성령충만의 실제적인 예들이 잘 나타납니다. 성령충만이 찬양이나 기도 중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삶 가운데서 나타나는 것임을 보여 줍니다.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교회의 최초의 순교자인 스데반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에 대해서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바를 살펴보면서 성령 충만의 의미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론 1 - 초대교회에 닥친 문제

먼저 사도행전 6장에 일곱 집사를 뽑고 안수한 일의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6장 1절에는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분명 교회가 부흥하고 있는 시기였습니다. 제자의 수가 많아지고 있었습니다. 공권력이 사도들을 괴롭혔지만 더 이상 감옥에 잡아두지 못하고 풀려났기 때문에 교회의 분위기가 좋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갈등이 발생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헬라파 유대인들은 유대인이 아니었다가 유대교로 개종했던 헬라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 중에서 본토 이스라엘에서 태어나지 못하고 헬라 지역에서 태어난 유대인들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교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캐나다에 살던 한국 사람이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차별받는다는 생각이 들면 매우 섭섭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본토 과부들은 구제 물품을 제대로 받는데, 헬라파 과부들은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서 헬라파 유대인들이 히브리파 유대인들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는 열두 사도였고, 열두 사도 모두 본토 이스라엘 출신이니 헬라파 유대인들로서는 교회 안에서 국외동포를 차별하는 행태를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기로 하고, 헬라파 유대인들을 포함하여 교회 행정을 담당할 일곱 집사를 뽑았습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어야 하고, 공동체로부터 신뢰받고 인정받는 사람, 칭찬받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을 직분에 포함시켰기 때문에 헬라파 유대인과 본토 히브리 유대인간의 차별 문제는 분명 해결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7절에 보면,  

교회에 발생한 문제의 핵심을 제대로 파악하고 하나님의 지혜로 바르게 대처하자,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해졌고, 제자의 수가 많아졌고, 제사장들의 개종도 허다한 수의 무리였다고 합니다. 



본론 2 –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

일곱 집사 중 첫 번째로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사람은 스데반입니다. 스데반 역시 헬라파 유대인이었습니다. 스테파노스라는 헬라식 이름이 거의 출신 성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또 성경은 그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집사의 자격 요건이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따로 강조하지 않아도 그 당시 뽑힌 집사들이 모두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다고 생각할 것 같은데, 성경은 일곱 집사 중 오직 스데반에게만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부연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8절에는 스데반에 대해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큰 기사와 표적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을 고치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증거를 사람들에게 증거하였는데, 가장 먼저 격렬하게 반발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헬라파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리버디노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그리고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이 회당에서 스데반과 논쟁하였습니다. 헬라파 유대인이었던 스데반이 헬라파 유대인들의 회당을 직접 찾아가 논쟁을 벌였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헬라파 유대인들이 회당에서 직접 일어나서 스데반을 찾아와서 스데반과 논쟁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한 것 같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 중 리버디노 구레네인과 알렉산드리아인은 로마 장군 폼페이에 의해서 노예로 끌려갔다가 풀려난 사람들의 후손들입니다. 리버디노라는 말 자체가 자유를 얻은 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헬라파 유대인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무엇보다 소중했습니다. 할아버지 때부터 노예로 끌려가 온갖 고생을 겪었다가 다시 돌아온 사람들입니다.  그 험난한 인생의 여정 가운데서 소중하게 지켜온 것이 바로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입니다. 본토 이스라엘에 사는 사람들보다 유대인에 대한 자긍심과 자부심이 더 강한 사람들입니다. 마치 우리가 외국에 나가면 모두 애국자가 된다는 말처럼 그들에게는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소중했습니다. 

그런데 그들 눈에 비친 스데반은 같은 헬라파 유대인이면서 기독교로 전향한 사람이었고, 많은 기적과 능력을 행해서 회당에 있는 제사장 그룹까지 기독교로 전향시킨 매우 죄질이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각자 자기 회당에서 일어나 스데반과 논쟁을 벌였습니다. 유대교를 허물어뜨리려는 예수를 믿지 말고, 헬라파 유대인으로서의 본분을 지켜라는 말로 스데반을 공격했을 것을 것입니다. 

하지만 스데반을 말과 지혜로는 이길 수 없었습니다. 스데반은 지혜와 성령으로 말했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구약의 선지서와 모세 오경, 시편과 잠언이 말하고 약속한 그 메시야가 예수님인 것을 증명할 수 있었습니다. 



본론 3 – 거짓된 고소

논쟁을 통해서 스데반을 설득할 수도 이길 수도 없자 헬라파 유대인들은 사람들을 매수하여 거짓 증언을 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의 거짓 증언에 의해서, 또 그들에게 매수된 사람들에 의해서 십자가 처형을 당했는데, 똑같은 방식으로 스데반을 공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짓말로 여론을 조작한 후, 사람들과 장로와 서기관들에게 스데반을 체포하도록 부추겼습니다. 재판을 열고 거짓 증언자를 매수하여 유대인들이 생명처럼 여기는 성전을 나사렛 예수가 허물겠다고 했고, 또 모세 율법도 고치겠다고 말했다고 말했습니다. 스데반에 대한 공격이라기보다는 예수님에 대한 비난과 비판이었고 이를 통해서 스데반을 넘어뜨리려고 했습니다. 

지금 헬라파 유대인들은 스스로는 여호와 하나님을 잘 믿는 유대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으로서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모함하여 감옥에 보내는 거짓말도 서슴지 않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법을 그토록 강조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그토록 강조하는 이 헬라파 유대인들은 거짓말과 거짓 증언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주 가볍게 무시해 버립니다. 내가 지켜야 하는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하나님보다 소중하고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보다 내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정통 유대인으로 인정해 주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하나님은 없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자리는 없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가 그 마음에 머물러 있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스데반의 모습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충만히 임재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지혜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은 누구나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주 조그만 억울한 일 하나에도 목소리를 높이고, 잠을 잘 못 자게 되는 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니다. 어린아이들도 딱지 하나, 카드 하나, 캔디 하나에 대해서 남들보다 덜 가지거나, 자기가 안 먹었는데, 안 가져갔는데  가져갔다는 누명을 쓰게 되면 견딜 수 없어합니다.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결론 - 성령충만을 입은 직분자를 통하여 증거 되는 하나님 나라

억울한 누명을 쓰고 공회에 잡혀온 스데반의 얼굴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얼굴이 천사와 같다는 표현을 성경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변화산에의 예수님과 시내산에서 내려온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제외하면 이토록 빛나는 얼굴은 보기 어렵습니다. 

가장 억울하고 가장 고통스러워야 할 그 얼굴에 천사와 같은 평안과 기쁨이 있었습니다. 스데반이 진정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인간으로서 가장 견디기 힘든 그 순간에 하나님의 평안과 하나님의 은혜가 가장 환하게 빛났습니다. 낮고 낮은 자리에서 도망치지 않고 버텨온 한 사람을 통해서, 그 한 사람에게 충만히 임한 하나님을 통해서 나타난 것입니다. 

사도행전 7장은 스데반이 구약성경을 관통하는 하나님의 약속과 예수님을 통해서 마침내 실현된 하나님의 나라와 부활하신 메시야 되신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그로 인해서 스데반은 분노한 군중의 돌에 맞아서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동일한 설교를 행하고 수천 명을 회심시킨 베드로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스데반의 죽음이 너무 허무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루살렘 교회는 이 한 사람의 죽음을 통해서 예루살렘이라는 지역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었고 선교하는 교회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한 사람에게 충만히 임한 성령님은 교회 전체를 바꾸시고 온 세계를 향해 복음이 전파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인도를 온전히 따른 한 사람에게 하늘문이 열렸습니다. 스데반은 하늘에서 자신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성령 충만은 우리가 순종하기 어려운 삶의 구체적인 모습 속에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예배당에서만 찬양하는 중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억울한 일 중에도, 고통 중에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순종할 때 성령의 충만한 임재를 더욱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 직분자들을 향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이 단 한 가지 있다면, “성령으로 충만하라”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함으로 충성되이 섬기고 그 섬김 속에서 천사같이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을 드러내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의 직분자들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고, 직분자들뿐만 아니라 온 교회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드러낼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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