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우리 삶의 이야기가 하나님의 메시지가 되는가
성경적 인물들 중에는 동시대 인들에 대한 강력한 이야기를 따르기보다는 하나님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물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에 따라 우리의 삶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볼 것입니다. 요셉, 다윗, 요나단은 동시대 사람들이 따르던 지배적인 이야기를 따르지 않고 성경 속 여호와 하나님의 이야기를 따랐던 사람들입니다. 그 두 사람은 모두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이야기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그들이 품고 있었던 이야기가 무엇이었고, 그 이야기들이 그들에게 끼친 영향이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2009년 1월 미국 JFK공항에서 이륙한 비행기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근처 허드슨 강에 불시착하였습니다. 이 사건이 바로 “허드슨 강의 기적”이라고 일컬어지는 비행기 사고입니다. 공항을 이륙한 지 몇 분 되지 않아 새가 비행기 엔진으로 들어가 비행기 엔진이 멎어버린 사고가 발생한 것입니다. 엔진이 모두 멎은 상태에서 기장 체슐리 슐렌버그는 침착하게 상황을 승객과 승무원에게 알리고 허드슨 강으로 비행기를 비상착륙시켰습니다. 기장은 비행기를 침착하게 비상 착륙시킨 후, 구호 요청과 함께 승무원에게 지시하여 승객이 승무원의 안내 속에 구조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 결과 승객과 승무원 모두가 단 한 사람의 사망자 없이 안전하게 구조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이 있은지 며칠 되지 않아서 미국의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을 했습니다. 허드슨 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이 미국 사회에 하나의 분명한 메시지를 주었습니다. 생사의 기로에 선 위기 상황에서도 리더가 그 위기의 본질을 알고, 위기에 대처할 능력과 해법을 가지고 침착하고 책임감 있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면 그 위기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입니다. 이 사건이 2009년 1월 오바마 미국 대통령 취임식 5일 전에 일어났습니다. 당시 국가적 경제 위기 상황을 겪고 있었던 미국 국민들에게 이 사건은 어떤 위기 상황에서라도 리더가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한다면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했을 것입니다.
이렇듯, 한 사람의 존재 자체가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좋은 이야기이든 나쁜 이야기이든 한 사람이 이 땅에서 삶을 살아가는 모든 모습 속에는 메시지가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한 사람의 행동 하나가, 혹은 생애 전체가 하나님의 메시지로 분명하게 사용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슐렌버그 기장의 이야기는 영화 “설리( Sully)”로도 만들어져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영향을 끼쳤습니다.
성경에서 분명하게 한 사람의 생애를 통해서 하나님의 이야기를 보여 주신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허드슨 강의 기적에서 슐렌버그 기장이 자신의 삶으로 하나의 이야기를 전달했듯이, 성경에서 자신의 삶으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생애 전체가 하나님의 이야기로 사용된 사람들 중에서 성경 창세기에 등장하는 요셉이 있습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잘 알고 있을 만큼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은 형들의 시기로 인해 열일곱의 나이에 애굽의 노예로 팔려 갔습니다. 형들에게 배신당하고, 죽음 직전의 상황까지 가야 했습니다. 자신의 혈육인 친형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했고, 또 말도 통하지 않는 머나먼 땅 애굽에 노예로 팔아버렸다는 사실은 요셉의 평생에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았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본문 어느 곳에서도 요셉이 형들에 대한 원망과 복수를 다짐하는 장면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인간적인 감정으로는 요셉의 이야기가 당연히 복수와 원망으로 점철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당연히 사람이라면 형들을 미워하고 형들에게 적개심을 갖는 것이 당연한데도, 그런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요셉 가운데 일하고 계심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1
그는 노예로 팔려 갔으나 보디발 집안의 가정 총무가 되고, 죄수가 되었다가 바로의 꿈을 해석하고 애굽의 총리의 자리에까지 올라갑니다. 하나님께서 요셉 한 사람을 입신양명케 하여 이름을 떨치는 것이 요셉의 인생을 향한 목적이었다면, 성경은 요셉 일가의 Happy Ending을 기록하는 것으로 창세기를 마무리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을 애굽에 노예로 가게 하신 하나님은 요셉의 삶의 여정을 통해서 단순히 한 개인의 성공 스토리를 전달하려고 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2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 보디발도 여호와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보았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까 요셉이 범사에 형통하게 되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불신자 주인 보디발에게 요셉은 하나님을 알게 해 주는 통로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그 분과 동행하면 그 삶이 형통하게 된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요셉이 자신의 삶을 통해서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디발에게, 감옥의 간수장에게,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에게, 그리고 바로 왕에게 요셉은 여호와 하나님의 메신저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눈에도 요셉의 지혜와 행동은 인간의 지혜로 가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도 그것은 분명 하나님께로 온 지혜였고, 요셉은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불신자인 그들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그 인생이 형통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요셉을 통해서 분명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본 것입니다.
불신자인 바로와 애굽 사람들에게만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으로 불러내신 것은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소중하게 여기시고, 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을 통하여 이 세상에 구원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해서 보이셨습니다. 그 누구보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요셉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셔서 자신을 경영해 가시는 손길에 자신을 맡겼기에 그에게서 요셉 자신이 혼자서 만들어 낸 이야기가 아닌, 하나님의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바로 성령의 사람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시는 성령 하나님이 우리 안에 충만히 거하실 때 하나님의 사람, 성령의 사람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왕은 자신의 꿈을 해석한 요셉을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하고”3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었다는 것이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충만하게 드러내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이며 성령의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일하시고, 그들을 통하여 이 세상에 자신의 뜻을 전달하시고 구원을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신 이유를 구약 시대의 교회라는 개념으로 다시 한번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란 땅에서 가나안 땅으로 가족을 데리고 들어갔을 때, 가나안 땅에 교회는 아브라함 가족들 뿐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교회를 세우셨는데, 그 교회가 야곱의 때에 많이 허약해져서 교회가 다음을 기약하기 어려울 정도로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그 교회에서 가장 유능하고 신실한 일꾼인 요셉을 애굽으로 보내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요셉은 하나님께서 애굽에 세우신 개척교회입니다. 교회 건물도 없고 함께 하나님을 예배할 성도도 없고 말 통하는 사람도 하나 없는 그 척박한 땅, 애굽에 요셉을 보낸 것입니다.
요셉이라는 한 사람을 교회라고 부르는 것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애굽에 건물도 없고, 다른 성도도 없는데 어떻게 요셉 한 사람으로 교회가 될 수 있는지 의아한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삶의 행적과 그 입술의 말로 드러내는 사람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언제나 건물이 아니고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 있는 그 자리가 교회이면서 동시에 그 사람이 교회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함께 모인 공동체가 교회이지만, 불가피하게 단 한 사람밖에 있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 한 사람만으로도 교회가 구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로 교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메신저로 이 땅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성령 충만한 사람으로 살아갈 때 이 땅에 교회가 흥왕 하게 됩니다. 우리의 존재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무리 교회 규모가 크고, 건물이 화려해도 그 공동체로부터 하나님의 뜻이 흘러나오지 않는다면 건강한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나 한 사람이 하나님을 이 세상 가운데 드러내는 하나님의 메신저, 곧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교회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삶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조금도 드러내지 못한다면 나에게는 교회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교회가 약해졌을 때, 요셉의 형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가뭄과 흉년이라는 위기 앞에서 가나안 교회 전체가 대응할 힘과 믿음을 가지고 있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 교회를 다시 살리신 방법은 “한 사람”의 믿음과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보여 준 것이었습니다. 그 어떤 말이나 다툼이나 비난을 서로에게 퍼붓고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하는 한 사람을 통해서 교회를 회복시키셨습니다. 여호와의 영에 감동된 한 사람의 삶의 총체적인 면모, 즉 존재 전체가 하나의 메시지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의 존재 전체를 통해서 온 세상과 교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요셉 한 사람의 존재 전체를 새롭게 하여서 그의 삶의 행보를 통해서 온 세상이 하나님을 알게 하셨습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의 자리에서 형제들을 다시 만났을 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4
요셉은 분명하게 자신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있었고, 자신의 존재 전체를 드려서 이루어야 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서 그 뜻에 온전히 순종하였습니다. 그리고 온전히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메시지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온 땅과 교회를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크신 역사에 자기 자신이 사용되는 영광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요셉만이 하나님의 메시지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한 것은 아닙니다. 요셉에게만 그런 자격을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3장 3절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5
우리가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하나님의 편지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메시지로,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의 삶을 살아갈 수 있으며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온 세상에 전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지를 우리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허드슨 강의 기적”이란 사건에서, 두 개의 엔진이 모두 멎은 긴박한 상황에서, 비행기의 기장인 슐렌버그는 어떻게 하면 자신의 메시지를 전할지를 고민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그저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을 뿐입니다. 기장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에 맞게 자기의 일을 감당한 것입니다. 비행기의 기장이 자기의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했을 때, 그것은 미국 사회 전체를 향한 하나의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맞게, 하나님의 영에 충만한 삶을 살아갈 때, 세상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우리를 통해서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정체성에 충실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의 면모를 세상 가운데 나타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성령의 사람이므로 성령의 감동으로 지어진 성경 말씀의 묵상과 하나님과 소통하는 통로인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경험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두 번째 구체적으로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해야 합니다. 기장이 비행기 조종하는 그 영역에서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감당한 것처럼 우리의 가정, 직장, 마을에서 우리는 최선을 다해 사랑으로 섬기는 수고를 감당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보디발의 집안을 관리하고, 감옥의 행정을 주관하게 하셨습니다. 작은 일부터 큰 일에 이르기까지 요셉을 훈련시키시고 준비시키셨습니다. 물론 행정일에 대한 준비를 잘했다는 이유로 하나님께서 그를 총리로 삼아 주신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요셉은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대해서 최선을 다했고, 그 일을 행하는 가운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 일이 크든 작든 자신에게 주어진 일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최선을 다할 때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메시지가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제가 한국에 있을 때, 김동호 목사님께 제과점을 운영하시는 집사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집사님께서 탈북 청소년들을 위한 여명학교 학생들에게 빵을 몇 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무료로 주었다고 합니다. 학생들은 처음에 당연히 그 빵들이 제과점에서 팔다가 다 팔지 못하고 남은 빵들 가져다주는 줄 알았다고 합니다. 제과점마다 마감 시간이 되면 날짜 지난 빵들을 싸게 파는 것을 볼 수 있으니 아이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 집사님은 여명학교에 빵을 가지고 올 때, 팔고 남은 빵이 아니라 새로 만든 빵만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 아이들을 위해 항상 따로 빵을 만들어서 가져다준 것입니다. 학생들이 어느 날 그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다음 충격을 받았습니다. 보통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않고 팔다 남은 것을 주는데, 이 사람은 왜 우리에게 따로 돈과 시간을 들여 정성스럽게 만든 빵을 가져다줄까 라는 의문과 함께 감동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팔다 남은 빵을 주는 것이 아니라 가장 귀한 것으로 주리고 소외받은 자들에게 베푸는 것이라고 그 집사님이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더 손해를 보더라도 더 가치 있게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행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행동이 예수님을 모르는 탈북 청소년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가득 담긴 선물을 매일 받았기에 하나님의 사랑도 알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저 집사님을 통해서 일하시고 계신 것 또한 알게 된 것입니다. 요셉의 생애처럼, 그 집사님의 생애가 하나님의 메시지, 그리스도의 편지가 된 것입니다.
1 개역개정, 창세기, 39:2.
2 개역개정, 창세기, 39:3.
3 개역개정, 창세기, 41:38.
4 개역개정, 창세기, 45:7.
5 개역개정, 고린도후서, 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