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장시계가 하나 있다.
구입했을 당시에는 금색 번쩍임이 도가 지나쳐,
차고 다니면 손목만 보였을 정도였다.
로또 1등에 당첨되었다.
사직서를 내고
부산으로 가는 고속버스를 탔다.
한 푼이라도 쓰게 되면 지출을 걷잡을 수 없게 된다는 말에
당첨금 그대로를 통장에 넣은 채 고향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중간쯤 왔을 때
버스가 덜컹거리더니 도로를 벗어났다.
공중에 뜬 버스와 좌석에 붙어있지 않은 엉덩이를 느끼는 수초 간
몇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수십억이 들어있는 통장.
한 푼도 쓰지 않은 당첨금.
당첨금에 손 데고 싶지 않아 참았던 금장시계.
'시계라도 살 걸 그랬네. 뭐한다고 그리도 아꼈을까?'
버스의 앞유리가 지면에 부딪히는 순간
잠에서 깼다.
취업 후 시계 하나를 이미 구입한 상황이라 50만 원대의 새로운 시계는
사치라고 여겨졌다.
그렇게 몇 달을 고민만 하던 중,
로또 1등 당첨과 버스사고를 당하는 꿈을 꾸게 되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생생한 꿈과 함께
'시계라도 살 걸 그랬네. 뭐한다고 그리도 아꼈을까?'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때마침 주말이라 그 길로 시계를 구입했다.
그 날 이후 내 인생은 carpe diem 이 되었다.
경험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고,
모든 결정은 '만일 내가 내일 죽는다면?'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출근은 참 잘했다. 내일 죽는다는 가정에서 출근이 웬 말인가 싶겠지만
지나고 보니 흥청망청 즐기는 것을 포장해줄 그럴듯한 핑계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carpe diem으로 십 년을 살았고,
지난 십 년을 돌이켜 볼 수 있는 여유가 이제야 생겼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억누르기만 했던
20년 묵은 욕구들이 충분히 해소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후회스러운 10년은 아니다.
하지만 조금 더 계획적이었다면, 더 많은 것을 남겼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다.
칠이 벗겨진 금장시계가 하나 있다.
간호사로 취업한 첫 해에 구입한 것이니
이 녀석도 12년이나 되었다.
처음 구입했을 당시의 번쩍거림은 사라진 지 오래지만
나에게는 의미가 있는 시계이다.
번쩍이는 시계는
내일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오늘을 즐기게 해 주었고
빛바랜 시계는
영원히 살 것처럼 내일을 준비하게 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