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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열한백구 Aug 06. 2019

2014 뭄바이

내 바닥에는 용기가 없더라

고아에서 밤 기차를 타고 이른 아침 뭄바이에 도착했다.

바라나시로 떠나는 밤기차를 타야 해서 뭄바이에서 허락된 시간은 10시간 남짓 이었다.

에게 인도 여행을 결심하게 만든 ‘한밤의 아이들‘ 이란 소설의 배경이 된 곳이라

나름에 의미가 있는 도시였지만, 사실 여행을 준비하면서 부터도 우선순위에서 밀렸던 곳이었고, 기차 노선이 아니었다면 굳이 들리지 않았을 도시였다.

하지만 이 도시는 나에게 커다란 트라우마를 남겼고, 누군가 인도에 대해 물어볼 때 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곳이 되었다.    


뭄바이는 인도 최고의 경제도시이다. 인도인들은 뭄바이를 꿈의 도시라 부른다고 하는데,

포루투갈령과 영국령을 지나며 조성된 매력적인 거리 풍경과, 인도 답지 않은 깨끗한 길을 자주 볼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이 도시의 이면에는 세계 최대의 빈민가와 매음굴이 존재한다.

농촌의 젊은이들이 꿈을 안고 무턱대고 상경하다 보니 빈부격차는 갈수록 심해지고, 빈민가는 갈수록 커진다고 했다.    


기차역의 유료 사워장에서 샤워를 하고, 택시를 타고 뭄바이의 상징 개선문

(gateway of india)으로 향했다. 이른 아침이라 사람이 적어 인증샷 찍기에 좋았다. 바가지 걱정 없이 택시를 탈 수 있는 것이 뭄바이의 장점으로 기억된다. 바로 옆에 붙어 있는 타지마할 호텔도 카메라에 담았다..

중세시대의 영국을 방불케 한다는 포트 구역을 산책하고, 세계에서 가장 큰 빨래터인 도비 가트

 보았다. 별다방의 낯익은 간판이 너무나도 반가운 뭄바이였다. 인도에 도착한 이후부터 얼음이 들어 있는 커피를 마시지 못하였기에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마시는 별다방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정말 특별했다. 커피를 마시며 가이드북을 뒤적이다 보니 아침에 내린 기차역이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문화유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뭄바이 C.S.T. 역은 19세기 식민지 건축의 금자탑, 또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빅토리아 시대의 유산이라고 소개되어있었다. 그런 기차역에서 샤워만 하고 부리나케 나왔다니. 특별히 할 일도 없고, 기차 출발 시간까지 역 근처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아침과 다르게 역 주변은 혼잡스러웠다. 뭄바이 C.S.T 역의 자태를 감상하며, 역 주변을 어슬렁거렸고, 40시간 정도의 기차여행 전의 영양보충 겸 중식당에 들렀다. 저렴한 가격이라 양이 적을 것으로 예상고 볶음밥과 볶음면을 하나씩 시켰다. 의심의 눈초리로 주문을 받아 가던 종업원을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그 눈빛을 십분 이해하게 되었다.

도저히 혼자서는 다 먹을 수 없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양이 하나도 아니고 두 접시가 나왔다.

볶음밥을 꾸역꾸역 다 먹고, 면은 포장을 했다.    

식사 후에도 기차를 타기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 역 주변의 시장통을 구경하며 돌아다녔다.

뭄바이 C.T.S 역의 측면에는 도로가 있는데, 자동차의 운행이 적고, 사람들이 인도처럼 활보하는 길이였다. 도로와 인도 사이에 주차된 차량과 노점들로 인해 인도는 뒷골목 같은 한적한 느낌이 들었고. 사람이 적은 것을 좋아하는 나는 당연히 북적거리는 차도보다는 인도로 산책을 하였다. 볶음밥을 너무 많이 먹어 소화도 되지 않을뿐더러 트림을 할 때마다 추가되는 느끼함 때문에 대합실에 들어가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어스름이 깔릴 즈음, 10미터쯤 앞에서 벤 한 대가 주차를 하는 것이 보였다.

옆문이 열리고 남자 두 명이 뭔가를 꺼내어 인도에 내려놓고는 다시 차를 타고 그 자리를

떠났다. 대충 봐도 사람처럼 보였다. ‘술에 취한 사람인가?, 약에 취한 사람인가?’

걸음을 멈추지 않고, 누워있는 사람에게 다가갔다.     



한 걸음.

여자였다.

임신을 했는지 배가 불룩했다.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쯤에서 나는 응급상황에서의 매뉴얼을 떠올렸고, 과연 타국에서 영어로 도움을 요청하고, 이 상황을 잘 해결해 나갈 수 있을 지에 대해 고민했다.    



두 걸음.

지저분한 옷차림.

씻은 지 오래된 듯한 머릿결이 보였다.



세 걸음.

젊은 여자였다. 인종이 달라 나이를 가늠키 어려웠지만 분명 젊었다.

한쪽 눈 주변이 멍이 들어 있었다.

그 눈 위쪽 이마뼈가 함몰되어있었다.

예상보다 상황이 복잡해질 것이 염려되었다.

도움을 요청할 여러 가지 영어 표현을 머릿속으로 연습했다.   


 

네 걸음.

여자의 입에서 파리가 나왔다.

호흡을 확인하고, 맥박을 확인하고, 주변의 도움을 요청할 정신 따윈 없었다.

환자의 생존 여부는 의사가 결정하는 것이고,

간호사는 살아있다는 가정하에 응급처치를 시행해야 함이 옳지만,  

죽음 곁에 머무는  공기가 다르다 라는 것이 어떤 것인 줄 그 알게 되었다.     



다섯 걸음.

여자 주변 사람들이 보였다.

지나는 길에 개가 한 마리 죽어있어도 저런 표정을 지을 수는 없을 듯한데.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 옆을 지나고, 여자의 다리를 피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여섯 걸음.

마주 보이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이 정확하게 뇌리에 박혔다.

무덤덤해 보이는 또는 지쳐 보이는 얼굴들이 너무나 무서웠다.

나를 쳐다보는 눈빛 하나하나가 살인자의 눈이었고,

당장 나를 죽이러 달려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여자를 지나쳐 역 대합실로 들어왔다. 표가 있어야 역 내로 들어올 수 있었기에 그나마

안전할 것이라 여겨졌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역 안에서

마주치는 인도인들의 눈빛과 얼굴은 여자를 지나치던 그것과 전혀 다를 바 없이 느껴졌다.

구석자리에 등을 기대고 혼자서 울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나의  용기 없음에 대한 자책이 눈물로 나왔고, 숨겨왔던 밑바닥을 봐서 인지 주변의 시선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펑펑 울 수 있었다.

연락할 곳이 없어 헤어진 전 여자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설명하기 힘든 감정을 담고, 담아서 문자를 보냈고, 고맙게도 전 여자 친구가 답장을 주어, 조금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여유가 생겨 주변을 돌아보니 저 멀리서 노랑머리카락이 둥둥 떠 다녔다.

검은 머리에 검붉은 얼굴들, 내가 유일한 이방인처럼 여겨졌던 이곳에서 노랑머리의 외국인을 보니

주변이 거짓말처럼 밝아졌다. 눈물을 훔치고, 깊은 숨을 몰아쉬고 나니, 옆자리에 앉아 있던 인도인이 괜찮냐고 물어봤다. 처음부터 지켜본 모양이었다.

자신을 군인이라고 소개한 그 친구는 이상하게 무섭지 않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아까 보았던 여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뭄바이에서는 자주 있는 일이고, 아마도 사창가나 빈민가 쪽 사람일 것이라고 했다.

그 친구에게 부탁을 했다. 함께 나가서 그 여자를 확인하고 싶다고 했다.

조금 전에는 숨어 있던 용기가 그 친구 덕에 고개를 내미는 듯했다. 역을 나와 여자가 누워있던 길 접어들었다. 여자는 그대로 누워있었고 그 위에 거적데기 하나가 덮져 있었다.

누군가 덮어준 것이라고, 신고를 했으니 공무원이 와서 처리할 것이라고 했다.

거적데기 밖으로 져나와있던 그녀의 두 발이 생각난다.

신발도 없고, 더러운 발이 었지만 빨간색 패디큐어가 선명히 기억에 남아있다.    



그때의 경험으로 나는 공황장애가 어떤 느낌이지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피해망상으로 힘든 사람들의 느낌 또한 완전하게 공감할 순 없겠지만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한동안 볶음밥을 먹을 수 없었고, 지금도 볶음밥의 기름 냄새는 그때의 얼굴들과 시선과

분위기를 떠올리게 한다.    



어떤 상황에서 직업윤리나 사람 된 도리를 다하지 못해 비난받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나는 그들을 비난하지 못한다.

각자의 상황에서 그 공포를 이겨내지 못한 것은

그들의 몫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 또한 그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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