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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열한백구 Sep 28. 2019

바나나 맛 우유

바나나맛 우유 먹지 다.

병원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요즘 병원에서는 맡을 수 없지만, 30년 전쯤에는 특유의 병원 냄새가 있었다.

소독약이라고 알고 있는 그 냄새를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 바나나 우유를 먹으면 그 냄새가 느껴진다.


#

국민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바나나 우유를 먹었다.

누구인지도 기억나지 않는 어떤 어른이  것이었다.

낯선 얼굴들 사이에서 틈틈이 아는 얼굴이 보이면

그들은 나를 매점으로 데려다가 먹을 것을 사 주었다.

34세의 젊은 미망인이 남편의 상을 치르면서

어린 자녀까지 챙기는 것은  힘들다고 여겼을 것이다.

영안실 옆, 매점 의자에 앉아서 먹었던 바나나우유는 

 냄새와 소독약 냄새가 한데 섞여 내 뇌리에 박혀있다.


#

골목 어귀에서 놀고 있던 우리 남매에게 동네 어른이 다가와 집으로 가보라고 했다.

집에 먼저 도착한 누나들은 대성통곡을 하고 있었고, 병원 상호가 적힌 하얀 비밀봉지 안에는

피 묻은 아빠의 옷이 담겨 있었다.


교통사고를 당한 뒤 아빠는 오랜 기간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고,

한 번문병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아빠를 보러 가자고 했다.

중환자실 입구에서 우리에게 가운을 입히셨고. 엄마와 간호사 사이에서 실랑이가 벌어졌다.

아이들은 면회가 안된다고 하였으나, 엄마는 막무가내로 삼 남매를 이끌고 중환자실로 들어갔다.


온몸에  붕대를 감고, 호흡기를 하고 있던 아빠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여보 애들 왔어요"라고 말하며 흐느끼던 엄마의 목소리도 선명하다.  

삼 남매 의 마지막 인사였다.


아빠의 목소리가 기억나지 않는다.

어릴 적 꿈에서는 목소리까지 들렸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소리 없이 재생되는 흑백영화 같 되어 버렸다. 

빠의 자전거 짐칸에 올라타면 느껴지던 엉덩이의 불편함이나, 

아빠의 술주정으로 깨트린 창문의 날카로움은

기억이 나는데 이상하게 아빠의 목소리기억이 나지 않는다.


#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나이가 서른일곱이. 

나는 당시의 아빠보다 1년이나 더 세상을 살아가고 있으니 성공한 인생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아들이 다리에 매달린다.

"아파파퐈파~"

나를 부르는 것인지, 아니면 혼잣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고개를 들어 방긋 웃어주는 아이에게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든다.


'아빠는 <아빠>라는 것을 몰라. 그런 것을 배우기 전에 아빠의 아빠가 돌아가셨거든.

래서 어떻게 해야 좋은 아빠가 될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나쁜 아빠되지 않는지 잘 모르겠어 '


#

친구들은 자녀가 생기고 삶의 중심이 변했다고들 한다.  

나도 자녀가 생기면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내 중심이 변했음을 전혀 느낄 수 없다. 

아들을 바라볼 때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보다 아버지라는 역할의  무게에 짓눌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아버지의 부재를 경험한 이들이 있다면 이런 나에게 공감을 표현해줄지 알 수 없으나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성인의 시각으로 재해석하고 글로 옮기는 과정 자체가

나에게 도움이 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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