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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열한백구 Sep 22. 2019

IMF

1997년 11월, TV에서 대통령의 대국민담화가 발표되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돈을 빌리고, IMF의 관리를 받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어린 나이에 IMF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어른들의 한숨을 통해 한국경제가 상당히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뉴스만 틀면 '구조조정'이라는 말이 나왔고, '계약직'이라는 단어를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97년은 고등학교 1학년이었고, 겨울방학을 지나 2학년이 되면서 체감하게 되었던

IMF 전후의 대한민국의 단편을 기록하고자 한다.


복날 점심시간에 나오던 삼계탕이 2학년 때는 반계탕이 나왔다.

(나는 국립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국립이라 학비와 기숙사비가 전액 무료였다.)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면 외국계 선박회사에 취업할 수 있다고 했었는데,

해양대 학생들이 승선을 많이 함으로 해서 승선하고자 했던 외국계 회사로 취업할 수 없었다.

(해양대 학생들은 육상근무를 많이 했는데, 육상근무가 힘들어지자 승선을 많이 했다.)


가게를 무리하게 인수하신 어머니 덕분에

끔찍한 고2를 보내게 되었다('삭발을 하다.' 참조)


공무원이 인기직종이 되었다.

내가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동네에서 공무원 하는 형들은 공부도, 운동도 어중간한 이미지였다.


공립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던 사촌 형의 벤처기업이 망했다.

(상위권 학생들은 졸업 후 대기업을 지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가을이면 보일러 수리공의 일당이 무한대로 치솟았는데, 사람들이 겨울맞이를 미루게 되었다.

(가까운 지인 중 귀뚜## 대리점을 하시는 분이 있었다.)


전조등이나 브레이크 등을 수리하지 않은 차들이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열심히만 하면 먹고사는 것에는 지장 없다던 아저씨들이 더 이상 내게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IMF 외환위기를 4년 만에 극복하였다.

하지만 그 이후로 '경기가 좋다.'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뉴스에서는 '경제성장 몇% ' 같은 소릴 하는데 계약직은 여전히 계약직으로 남아있고, 내 월급은 그대로다.

'성장'만 논하다 보니 덩치만 큰 중2병 청소년 같은 한국이 되었다.(중2들 미안^^)


교육학에서는 성장은 양적인 부분으로, 성숙을 질적인 부분으로 발달을 구분한다.

언제쯤이면 '성숙'을 이야기하는 대한민국이 될 수 있을까?  혼란스러움을 거치고 나면 자연스럽게 어른이 되어있겠지만 나의 대한민국이 크게  빗나가지 않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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