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비워내고 나서 비로소 시작된,
다낭에서의 일이 끝나는 대로 힐링도 할 겸 생각도 정리할 겸 ‘스페인 순례자 길’을 계획했다. 그러더니 그 계획은 점점 살이 붙더니 세계여행이 되었고, 살이 더 붙더니 ‘육로로 북반구 일주’가 되었다. 그렇다 나는 ‘육로로 북반구 일주’를 앞두고 있다.
욕심일까? 모르겠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내가 원하는 걸 할 때, 포기해야 할 것들이 많아지는 것 같다.’ 문득 아버지만 바라봐도 그렇다. 아버지라고 모두가 그토록 바라는 세계여행을 하고 싶지 않으실까? 아닐 거다. 지금의 아버지가 가진 게, 책임져야 할 게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나는? 책임져야 할 것이라곤 나뿐이다.
조금 솔직한 이야기를 하자면, 세계여행을 계획하는 데에 가장 큰 동기가 된 건, 전 여자 친구와의 이별이다. 정말 가슴 아팠지만, 하루 종일 울기도 했지만 말이다. 나의 모든 포커스가 그녀였는데 그게 없어지니, 책임져야 할 게 전부 사라진 느낌이었다. 정말 더 이상 잃을 게 없었다. 잃을 게 없어서 시작할 수 있었다.
대강의 계획을 끝내고, 퇴직서도 제출하고 모든 준비가 끝났지만, 한참을 다낭에 계속 머물렀다. 떠나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강했다. 1년이라는 시간 동안 타지에서 나름 적응하고, 이제는 정말 잘 살아내고 있었는데, 내려놓기가 쉽지 않았다. 무서웠다.
난 이제 스물아홉 살이다. 많은 세월을 떠나보낸 나이는 아니지만, 살면서 배운 큰 가르침이 있다. 나는 항상 무언가로부터 벗어날 때 성장했다. 안정을 벗어나 위험을 찾고 다시 안정을 얻으면서 하나씩 성장했다. 안주하지 않고 벗어나야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걸 깨달았다. 웃긴 얘기지만, 고등학생에서 대학생이 될 때, 병장에서 복학생이 될 때, 함께 학교를 다니던 친구들의 도움 없이 공연을 올렸을 때, 내가 성장한 것이다. 그래서 또 성장하는 내가 되기 위해 지금의 큰 행복을 잠시 뒤로한 채 벗어나기로 결심할 수 있었다. 두 손 가득 쥐고 있으면, 새롭게 잡을 수 없으니까.
‘아 이건 여행이 아니라, 챌린지구나’
이 챌린지가 끝나고 나면, 이를 통해 뭔가 얻을 것 같았다. ‘뭔가’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개 그렇지 않은가. 게임에서도 거대한 몬스터를 때려잡아 경험치를 얻고 그 경험치로 ‘레벨업’을 하니까. 나도 경험치를 쌓아보는 거다. 세계여행은 그에 비하면 비교적 쉽다. 게임처럼 강화 잘 된 검을 찰 필요도 없고, 거대한 몬스터가 튀기는 피를 맞아 가며 때려잡을 필요도 없다. 그저 인벤토리를 최대한 비우고 걷기면 하면 된다. 다니면서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로 인벤토리를 가득 채우면 된다.
인벤토리가 가득하면 잃을까 두려워 시작이 어렵고, 새로이 얻어지는 것들도 없기 마련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