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문학이 어려웠다더라
안녕. 티는 안내지만, 세상에서 널 제일 많이 사랑하는 형이다.
나는 문득 어릴 적 네 모습이 생각났다. 네가 5살 때쯤이었나, 안방에 누워서 자고 있었는데 그때, 그렇게 자고 있는 너의 모습에서 시간이 참 빠르다는 것을 느꼈다. 네 다리가 아기 때의 것과 다르게, 더 이상 미쉐린 타이어의 마스코트처럼 통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문득 시간이 참 빠르다고 느꼈었는데, 이제는 네 다리가 나만큼 길어졌구나.
그래, 나는 최근 들어서 너와 말을 많이 섞을 수 없었다. 혹시나 내가 뱉는 한마디가 네게 영향을 끼칠까 봐 노심초사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번 주 한 주 동안은 내가 다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미칠 것 같았다. 그런데, 분명 긴장하고 있는 쪽은 너임을 잘 알고 있기에, 내가 그런 모습을 보이면 안 될 것 같아서 꾹 참았다. 게다가 나는 너를 앞에 두고 진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안 된다. 그러니,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이곳에 숨어서 이렇게 쏟아낸다.
그래 오늘은 너의 수능 날이다.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다.
너도 잘 알겠지만 나는 단언컨대 단 한 번도, 네가 수능에서 고득점을 하기를 바란 적이 없다. 너는 내가 지난 주말 어머니와 함께 절에 다녀온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괜히 절에 다녀오고 싶었다. 괜히 너에 대한 바람을 부처님 앞에서 고백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는 네 이름을 써서 초에 붙였는데, 어머니께서 대뜸 그 밑에 ‘수능 고득점 기원’이라고 적으셨다. 나는 이게 의아했다. 내가 바란 것은 고득점이 아니었기에 말이다.
그래, 내가 바라는 것도 어느 정도는 고득점일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 앞서서 내가 바라는 것은 네가 원하는 만큼의 성적을 얻는 것, 그뿐이다. 나는 부처님께 세 번 절을 올리며 네가 수능 성적에 무너지지 않기를 빌었다. 겉으로는 ‘하는 수 없지 뭐’,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쿨하게 이야기하는 너지만, 그 속은 여리디 여린 나의 늦둥이 동생이기에, 네가 망가지는 걸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네가 고생했다는 사실만으로, 스스로에게 박수를 보낼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왜 이것밖에 못했냐’고. 자책하는 사람이 아닌, 스스로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내가, 그리고 우리의 부모님이 바라는 길이다.
비문학이 어려웠다더라.
형은 사실 오늘 널 수험장까지 데려다주고, 계속해서 ‘수능’이라는 단어를 네이버에 검색했다. 네가 지금 무슨 과목을 풀고 있는지, 또 공부한 대로 잘 풀고 있는지 계속해서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우연히 비문학이 어려웠다는 이야기를 접 할 수 있었다. 형은 그 이야기를 듣고 쏟아지는 눈물을 참느라 애먹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뭘 그렇게까지, 눈물까지 흘리냐며 손가락질했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우리가 함께 풀었던 비문학의 지문들이 떠올라서, 우리의 추억이 떠올라서 괜히 가슴이 시렸다.
나는 예전에 너의 공부를 돕는 답시고, 함께 놀아주는 척하면서도 공부가 될 수 있게 너와 함께 비문학 문제를 같이 풀었었다. 그 기억이 과연 도움이 되었을까? 나는 차라리 도움이 일절 되지 않았기를 바랐다. 나를 떠올리지 않기를 바랐다. 비록 형은 우리의 비문학이 어려웠다고 하니 네 걱정이 앞서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너는 그런 생각 따위 하지 않고 그 고난을 잘 헤쳐 나갔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 모든 걱정은 내가 하련다. 너는 하던 대로, 네가 원하는 만큼의 성적을 거둬라.
형도 인생을 많이 산 것은 아니지만, 나이차이가 꽤 나는 형님으로서 이야기하자면, 수능 그것 참 별거 아니더라. 수능을 못 봐도 별거 아니고, 또 수능을 잘 봐도 별 거 아니다. 글쎄, 솔직히 말해서 이 말엔 큰 확신은 없다. 나는 수능을 잘 본 사람들의 인생을 잘 모르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분명한 건, 나는 지금, 내 인생이 수능의 영향으로 결정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수능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과정이었을 뿐, 그 이후에 찾아온 고난들과 관문들, 여러 선택들을 통해서 지금의 내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너는 이제 첫 번째 관문을 통과했을 뿐, 앞으로 수많은 시간들이 너를 기다리고 있다. 그 수많은 시간들이 너라는 사람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러니 수능 성적이 잘 나왔다고 해도 자만하지 말며, 수능 성적이 안 나왔다고 해도 비관하며 무너지지 말아라.
형은 한편으론 수능이 백신이라고 생각한다. 수능은 네가 그동안 얼마나 공부를 열심히 했는지, 네가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는지 없는지를 평가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혹시나, 이른바 헬조선에서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10대들이 온실 속 화초로 자랐을까 봐, 그래서 이 헬조선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까 봐, ‘장애물’이라는 세균과 맞설 수 있는 면역을 만들어주기 위한 백신 같은 것이다. 글쎄, 시간이 지나면 지금의 형처럼 아무런 효과가 없을 수 있겠지만, 나는 수능이 끝나고 한동안은 ‘12년 공부해서 수능도 쳤는데, 이깟 거 하나 못하겠어?’하는 생각으로 20살 초년기에 닥쳐온 장애물들을 보다 쉽게 뛰어넘었던 것 같다. 이렇게 고난을 뛰어넘는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서, 어른들이 너희들을 위해 준비한 못된 고통이다. 그러니 그저 발판 일뿐인 수능에 무너지면. 안 된다. 딛고 뛰어넘어서 다음 계단으로 올라야 한다.
그래, 형이 괜한 걱정을 하는 것이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넌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씩씩한 사람이니까.
이제 네가 수험장에서 나올 시간이 다 되었다. 그러니 이 걱정들은 여기에 묻어두고, 웃는 얼굴로 너를 맞이해야겠다.
낯간지러워서 별소리 못하는 나는 다시 꿀 먹은 벙어리가 될 것이다. 부디 이 침묵을 깨는 것은 너이길 바라며 이만 줄인다.
사랑한다 내 동생.
2021년, 이상하게도 다른 해들과는 다르게 추위가 조금은 덜 했던 수능날에 사랑하는 형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