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겹살이 알려준 유대

스페인 순례길, 까미도 데 산티아고 / Day 2 / 56.5km

by 한성호
론세스바예스 - 수비리.jpg 오늘의 루트


오늘은 론세스바예스에서 수비리까지 27.9km를 걸었다.


예전에 까미노를 걸으며, 한국 사람이 숙소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고 밤새 떠들며 부어라 마셔라 하는 바람에, 냄새 때문에, 그리고 소음 때문에 다른 순례자들이 한국사람들을 거려한다는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 다 먹고 나니, 이제 고작 3일 차인데, ‘굳이 삼겹살을 먹었어야 했나?’하는 생각도 들지만, 숙소에 누군가가 놓고 간 고추장을 보는 순간, 마트에서 한국에서 보던 살코기 덩어리를 보는 순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제부터 우리와 함께 걷기로 한 지영이 형님에겐 무엇보다 삼겹살이 절실했다. 역시 어르신 입맛이란... 물론 나도 덕분에 아주 맛있는 식사를 했다. 함께하는 다른 순례자들에게 한편으로는 미안하지만, 밤새 부어라 마셔라 한 건 아니니까,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코스 자체로만 놓고 이야기를 하자면, 어제의 코스보다는 비교적 수월했다. 아직 이틀밖에 걷지 않았지만 많이 힘들어하던 성준이도, 수월하게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편한 코스였다. 다만, 불편한 건 수비리에 거의 도착했을 때쯤, 긴 내리막길이 있었는데, 이 내리막을 오래 걷는 일이 힘들었다. 등산을 많이 다니시는 아버지의 말씀에 따르면, 산은 오르막보다 내리막이 위험하고 힘들다고 하셨는데, 그 말 뜻을 이제야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다리에 힘을 주지 않으면 앞으로 쏟아질 것만 같아서 힘을 주고 걷다 보니, 다리에 무리도 가고, 신발 속에서 발이 계속 미끄러져 양말에 구멍도 났다. 양말에 구멍이 날 것이라는 것을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지만, 괜히 아까운 생각이 든다. 양말 몇 개 없는데....


하지만 어제의 길보다는 진짜 까미노를 걷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차도로 걷는 코스가 거의 없고, 대부분이 숲길이라, 진짜 순례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글쎄, 제일 처음 이 길을 걸었던 야고보는, 이렇게 길이 닦여 있지도 않았을 텐데, 얼마나 힘들었을까?



수비리는 론세스바예스보다 큰 마을이라, 알베르게의 선택지가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연 곳이 한 곳 밖에 없었다. 마을 초입에 있는 알베르게였는데, 시설이 꽤 좋았다. 물론 그만큼 가격이 꽤 비쌌기에, 잠깐 짐을 맡기고 마을을 둘러보며 공립 알베르게를 찾았지만, 겨울철 비수기에는 영업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조금 비싼 돈을 주고 우리를 제일 처음 맞이해줬던, 첫 번째 숙소로 돌아가 짐을 풀었다.

우리의 숙소에는 주방이 있었다. 이 점이 아주 맘에 들었다. 덕분에 내가 들고 다니는 짐의 무게를 줄일 수 있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예산이 적으니까, 마트에서 장을 봐서 요리를 해 먹는 편이 편했다. 여행을 하며 점점 물가를 감당할 수 없어지자, 나름대로 방법을 찾은 것이 주방이 있는 숙소를 찾아, 싸매고 다니는 식재료로 요리를 해서 한 끼를 해결하는 것이었는데, 이번 숙소는 비싼 대신 그런 장점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들고 다니는 식재료가 많은 건 아니다. 간단히 파스타 정도를 해 먹는 정도인데, 토마토소스 병은 너무 무거워서 알리오 올리오를 해 먹을 수 있게, 올리브유 병과 마늘, 그리고 파스타면 정도를 들고 다녔다. 그 재료들로 나는 간단히 알리오 올리오를 준비하고, 성준이와 지영이 형님이 고기를 사 오면, 간단히 구워 먹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판이 점점 커졌다. 마을 정육점에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모양의 삼겹살이 떡 하니 고기 냉장고에 들어있었다. 물론, 다른 저렴한 고기들도 있었지만, 저 삼겹살 덩어리는 놓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에라도 홀린 듯 삼겹살 1kg을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숙소로 돌아와 요리를 하려는데, 오늘은 밖에서 사 먹어 보겠다던 욱희가 마땅히 먹을 데가 없다며 숙소로 돌아와 있었다. 욱희는 한국에서 요리사였는데, 전문분야가 하필이면 스페인 음식이었다. 그런 욱희 덕분에 내가 만든 알리오 올리오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아주 맛있는 파스타와 삼겹살을 먹을 수 있었다. 물론 여기에 술도 빠질 수 없으니, 와인과 맥주까지 곁들이며 말이다.


어제에 비하면 숙소가 아주 쾌적하다. 비싼 알베르게는 그만한 값을 하나보다. 우리 만찬의 분위기를 더해주었던, 식당에 있는 벽난로도 그렇고, 무엇보다 덮을 이불이 제공되는 숙소인 게 아주 맘에 들었다. 알베르게에는 대체로 이불이 제공되지 않는 숙소가 많았다. 나도 이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있었느냐, ‘에이 설마...’하고 넘기고, 무엇보다 여행 내내 침낭을 들고 다닐 자신이 없어서 포기했었는데, 지난밤 이불 없이 자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깨달았다. 춥기도 추운 데다가, 포근함이 없어서 자고 일어나도 몸이 개운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불이라니, 가능하다면 하나 훔쳐가고 싶은 마음도 든다. 다음 마을에 저렴한 침낭을 파는 마트가 있다면 한 번 들러봐야겠다. 물론, ‘그냥 버티면 어떻게든 되겠지’싶은 생각에 안 살 테지만. 모쪼록 코스도 완만했고, 숙소도 좋고, 타오르는 장작불 소리를 들으며 먹었던 삼겹살도 좋고, 이틀 만에 아주 푹 잘 쉴 수 있겠다.




함께하는 동행들, 욱희 성준이, 그리고 지영이 형님까지 점점 더 가까워지는 느낌을 받는다. 나름대로 힘든 여정을 함께하니 서로 돕고 응원하며 의지 할 수 있어서 유대감이 쉽게 쌓이나 보다. 긴 시간 함께 걸으면서 대체로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의지가 된다. 아직 이틀 차 밖에 안 되었지만, 까미노의 끝에 다다르면 소중한 인연들이 많이 남을 것 같은 기분이다.


그만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많이 떠오른다. 이미 깊은 유대가 쌓인 그들과 함께 까미노를 걷는다면 어땠을까. 사랑하는 가족들은 물론 사랑하는 친구들까지.


처음에 난 이 길을 오롯이 혼자 걸으리라 다짐했다.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를 만들고 싶었는데, 다른 사람과의 유대가 그것을 방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누군가와 함께 걸으며 그들을 통해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도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오늘에서야 문득 깨달았다. 그리고, 순례자 모두가, 혼자이고 싶은 때가 있음을 공감하고 이해하기에, 억지로 함께해야 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혼자이고 싶을 땐 혼자일 수 있고, 함께이고 싶을 땐 함께 일 수 있는, 이 까미노가 스스로를 돌아보는 데에 아주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내가 이 길을 먼저 걸어 그들을 좋은 길, 편한 길로 안내할 테니,

기회가 되면 나중에 나랑 한 번 또 걸어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