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로 또 같이

스페인 순례길, 까미노 데 산티아고 / Day 3 / 85.5km

by 한성호
IMG_8088.JPG 팜플로나의 풍경
수비리 - 팜플로나.jpg 오늘의 루트

오늘은 수비리에서 Pamplona(팜플로나)까지 이동했다. 거리는 대략 20km.


처음 만나는 대도시라서 그런가, 팜플로나의 경계가 시작된 순간부터, 알베르게까지 찾아가는 거리가 길었던 것이 꽤나 낯설게 느껴졌다. 이제 고작 3일 차이긴 하지만, 여태 걸었던 코스 중에 제일 수월했다. 언덕도 별로 없어서 땀 날새 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팜플로나에 도착해 있었다.

팜플로나에 도착해서는 짐을 풀고, 대도시를 만끽하러 길을 나섰다. 물론 그보다 중요한 것은, 계속해서 나의 예산을 까먹고 있는, 10kg짜리 가방을 산티아고에 미리 보내기 위해 우체국을 찾는 것이었다. 나 같은 사람이 여럿 있었는지, 짐을 부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산티아고에 며칠에 도착하게 될지 아직은 명확히 아는 바가 없으니, 산티아고 우체국에서 짐을 맡아주는 기간을 적당히 설정하고는 짐을 부쳤다.

한참 동안을 걸은 탓에 신발이 이미 무거울 대로 무거운 상태였지만, 까미노 중간중간 관광을 하는 일도 빼놓을 순 없었다. 지영이 형님이 우리에게 함께 걸어줘서 고맙다는 의미로 점심식사를 사주었던 것을 시작으로, 저녁시간이 돌아올 때까지 오랜만에 만난 대도시를 만끽했다. 팜플로나를 돌아보며, 까미노를 통해 관심을 갖게 된 성당들도 들어가 보고, 한적한 언덕 위 공원에 올라 노을을 바라보기도 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팜플로나에서는 '산 페르민 축제'가 열린다고 했다. 그 기간에 다시 한번 이곳을 찾아와 볼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IMG_8086.JPG 지영이 형님 감사합니다.


함께 걷고 있는 일행들과의 유대감을 느낀다고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오늘은 문득 대화가 많이 줄어든 기분이 든다. 서로 각자의 시간을 존중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들어서 말 수가 줄어든 것이 아니라, 이것은 보이지 않는 약속이었다.


‘결국엔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서 이곳에 오는 것일 테니까’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관계를 굉장히 선호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 죽고 못 사는 연인관계, 친구 관계보다는 서로가 서로의 개인 시간을 존중해주는 그런 관계가 참 맘에 든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늘 그걸 못한다. 내 개인 시간을 소중히 생각하면서도, 나의 시간을 상대에게 투자하지 않으면 버려질 것 같은 압박감에, 상대가 원할 땐 언제 든 달려갈 준비가 되어있는 것처럼 행동하곤 한다. 한데, 그것은 오히려 상대의 개인적인 시간을 방해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그렇게 인연을 잃었던 적이 몇 번 있다. 오늘을 기억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보이지 않은 약속을 행하며 보다 나은 인간관계를 유지하기로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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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플로나 거리의 풍경


하루에 5-6시간 정도 걸으며 참 여러 가지 생각들이 스치는데, 그 생각들이 자라나다가 멈춘다. 예전엔 생각들이 자라나는 게 정말 많이 힘들었다. 이런저런 고민들을 떠올리고, 그 고민의 답을 찾으려고 애쓰는 것, 그게 내 의지로 컨트롤할 수 없었던 것이 참 많이 힘들었는데, 요샌 그저 질문들만 남아 머릿속을 맴돈다. 이 또한 답답한 기분이 드는 건 매한가지이지만, 고민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나를 괴롭히지 않는 건 정말 반가운 일이다. 어쩌면 이게 까미노가 내게 주는 메시지일 수도 있겠다.


너무 생각을 많이 하지 말라고, 알아서 잘 될 테니 더 비워내라고.




IMG_8094.JPG 부엔 까미노!


까미노를 시작하면서 참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겠다는 기대를 했다. 걷고자 하는 길이 달라서, 일정이 달라서, 여러 가지 이유로 만남과 이별을 반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여태까지 갈래길이라곤 없어서 첫 출발점이었던 생장부터 팜플로나까지 계속해서 같은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걷는 속도는 전부가 다르기에 길 위에서 '부엔 까미노'라고 인사를 주고받으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 보면 결국엔 똑같은 알베르게에서 그들을 다시 만난다. 아마 비수기라 문을 연 알베르게가 많이 없다 보니, 모두가 같은 숙소로 모이게 되는 것도 우리를 묶어주는 데에 한몫한 것 같다. 이탈리아에서 온 루까, 디에고 아저씨, 헝가리에서 온 조니웨이(이름이 정말 어려워 외우는데 한참 걸렸다), 독일에서 온 요한네스, 그리고 오늘 다시 또 만난 형석이, 함께 다니고 있는 지영이 형, 욱희, 성준이까지 총 9명이 함께 걷고 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아홉 명이 함께 모여 다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메뉴는 이탈리아 전통 까르보나라. 루까 아저씨는 이탈리아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셰프였는데, 욱희가 그런 그에게 한 수 배우고 싶다고 요청했더니, 흔쾌히 ‘오늘은 그러면 까르보나라를 해 먹자!’라고 하며 직접 요리해주셨다. 한국의 꼬마 셰프와, 이탈리아의 셰프가 만나 아주 맛있는 메인디쉬를 차리고, 품앗이처럼 각자 조금씩 마트에서 사 온 음식들을 보태 아주 거한 저녁상을 차렸다. 나도 물론, 까르보나라에 들어가는 재료를 사는 것으로 보태긴 했지만, 차려진 식탁을 보니 너무 받기만 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다. 가난한 여행자, 배낭여행객이라는 핑계로 계속 받기만 하는 것 같다.


나는 참 ‘내 것도 좀 먹어봐'라는 말이 참 어렵다. 내 것을 받는 사람이 싫어하면 어떡하나 싶은 우려가 들어서라고 핑계는 대지만, 사실 나는 잘 베푸는 스타일은 아니다.



이번 까미노를 통해 더 많이 베푸는 내가 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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