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순례길, 까미노 데 산티아고 / Day 4 / 116.8km
오늘은 팜플로나에서 Puente La Reina(푸엔테 라 레이나)로 넘어왔다.
오늘의 일정엔 그 유명한 ‘용서의 언덕'이 있었다. 꽤나 악명 높은 코스라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수월했다. 처음에는 꽤 겁을 먹고 있었는데, 오르다 보니 어느새 용서의 언덕에 도착해 있었다. 아마 지난날의 걸음들이 한편으론 내게 훈련이었나 보다. 불어오는 바람도 시원했고,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다만, 용서의 언덕에서 내려오는 길은 꽤 힘들었다. 자갈길이라 계속해서 발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온몸에 긴장을 했는지, 오늘은 온몸 구석구석이 다 쑤시는 기분이 든다. 대신에 풍경은 아주 훌륭했다. 꽤나 오랜 시간 동안 밀밭을 가로지르며 걸었는데, 그 풍성한 밀밭의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엔테 라 레이나에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오늘은 날씨가 너무나도 좋았기 때문이다. 글쎄 이 날씨를 어떤 상황과 비교해보고 싶은데, 세탁기 광고에 나올 법한 그런 풍경이라고 이야기하면 딱 맞겠다. 내리쬐는 햇살에, 하얀색 천들이 하늘로 올라갈 듯 펄럭이는 그림, 그 그림이 딱 어울리는 날씨.
비록 갈아 신을 신발이 슬리퍼 밖에 없지만, 알베르게 앞에 있는 작은 동산에 올랐다. 마을 입구 쪽으로 내가 걸어온 길을 바라보는데, 괜히 뭉클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걸어온 길이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내가 걸어온 시간들. 그 시간들을 저렇게 바라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실 어쩌면 나는 까미노에 관해 아는 바가 많지 않은 사람일 수도 있다. 다들 까미노를 준비하면서 여행책자를 읽어보고, 많은 블로그를 참고해 보았을 테지만, 나는 그저 까미노를 걸었던 어떤 사람의 책 한 권을 읽은 것이 전부다. 한 신혼부부가 신혼여행으로 까미노를 걷는 것을 택하고, 그 경험을 담은 책이었는데, 이제와 생각해보니, 어쩜 그렇게 쓸 말이 많았을까 싶다. 솔직히 말해 매일 걷기만 한 것 외에는 내가 하는 일이 별로 없다. 오늘 숙소에 와서 날씨에 걸맞은 행동을 하기 위해 빨래를 한 일, 이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에 언덕에 오른 일, 이 정도가 전부다.
아, 오늘의 짤막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길 위에서 짐 없이 아주 가볍게 걷고 있는 한 아저씨를 만났던 일이다. 그분은 왠지 모르게, 트레킹의 절대 고수 같은 느낌을 풍겼는데, 아니나 다를까 내가 그분 곁으로 다가가 걸으니, 나를 불러 세워 내가 메고 있는 가방을 가리키셨다. 가방끈의 길이가 길어서 굉장히 걷기가 힘들 거라며, 내가 가방을 메고 있는 채로 가방끈의 길이를 수정해주셨다. 아주 짧게 매야, 가방의 윗부분이 목 뒤에 닿을 것처럼 짧게 메야, 무게도 덜 느껴지고 보다 쉽게 걸을 수 있다고 말씀해주시며, 가방 끈을 꽉 조여주셨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고쳐 매서, 수월하게 걸을 수 있었던 느낌이 들었던 건 아주 잠시뿐, 곧바로 더 힘들어졌다. 몸이 몇 달간 함께한 가방에 맞춰져 있어서인지, 금세 불편해져서 다시 가방끈의 길이를 원상 복귀할 수밖에 없었다.
안 좋은 습관은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스며드나 보다.
이제는 첫 시작부터 계속해서 함께한 성준이가 없다. 글쎄, 성준이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던 것은 아니지만, 성준이에게 우리의 속도가 안 맞았나보다. 그는 몸이 안 좋아서, 팜플로나에서 하루 더 묵고 출발 하기로 했다. 성준이에게 성준이만의 속도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나는 마음 속 한편으로 그것을 ‘낙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낙오의 주인공이 내가 아닌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와 생각해보니, 내가 뭐라고 그것을 낙오라고 판단했나 싶은 생각이 든다.
나는 늘 1등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1등이 아닌 것에 대해서, 주류가 아닌 것에 대해서 굉장히 큰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성준이의 잠시 멈춤을 낙오라 생각했고, 그것을 발판으로 스스로 주류가 되었다고 생각했나보다. 문득, 스스로가 굉장히 볼품없게 느껴진다. 남을 깎아내리며 나의 편한을 찾았다는 사실이 오늘 밤 나를 괴롭힌다.
나는 이미 1등이 아니다. 나는 이미 주류가 아니다. 이 까미노에서 순위는 없고, 주류 비주류를 나눌 척도조차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왜 그렇게 빨리 걸었을까?
항상 내가 앞서서 걷고 싶었다. 오늘 용사의 언덕을 넘을 때도, 거친 자갈로 이루어진 내리막을 걸을 때도, 빨래를 할 때도 나는 앞서있고 싶었다. 심지어 숙소로 돌아와 빠르게 빨래를 널고, 힘든 몸을 이끌고 마을의 작은 언덕에 올랐던 일에서, 남들보다 빨랐다는 이유로, 남들보다 덜 힘들어한다는 이유로 스스로가 꽤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이것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일까. 그 속도가 정말 나의 속도였을까?
까미노를 여러 번 걸었던 것 같은 길 위의 걷기 도사님은 나보다 빠른 사람이었을까 느린 사람이었을까? 숙소에 도착해서 부지런히 마을 구경하러 나갈 준비를 하지 않고, 드러눕기 바빴던 그 순례자는 나보다 빠른 사람이었을까? 느린 사람이었을까?
빠르고 느리고를 이야기하는 것에서부터 잘 못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맞는 속도가 있다고 한다. 누구는 서른 살에 이른 성공을 했지만, 누구는 마흔 살에, 심지어는 은퇴를 하고 난 다음에 성공을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사람마다의 속도가 다를 뿐, 앞서있다는 것, 그리고 뒤따라 간다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다. 글쎄,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속도를 이야기하는 것 또한 어쩌면 잘 못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꼭 성공을 해야 의미 있는 삶이 되는 것은 아니니까, 그리고 그 성공의 기준은 내가 만드는 것이니까.
‘마음에 들지 않는 스스로를 계속 마주하며 성장하는구나.’
여행을 하며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지금이 딱 그 느낌이다. 스스로를 사랑하고, 멋지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가끔 맘에 들지 않는 스스로를 발견하곤 한다. 그리고 그걸 알게 된 순간은 굉장히 괴롭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오늘처럼 1등이 아닌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던가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또 1등을 따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거야 이 멍청이야!’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걸 고치려 들면서 또 한 번 성장할 테다.
글쎄, 정말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될 수 있는 것인지 확신은 없다. 어쩌면 스트레스를 마주하고 그 스트레스에 잠식되어, 스트레스에 잡아먹힌 채 헤어 나오지 못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겠다. 하지만 문제점을 아는 게 문제점을 고치는 것의 시작이라지 않는가. 좀 짜증 나지만 매력적이지 않은 스스로를 발견하는 것이, 성장의 시작이 될 것이라고 믿어본다.
"그러고 보니, 마침 오늘 용서의 언덕을 넘었다. 나는 이 못난 나를 용서하고, 넓은 마음으로 품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