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순례길 / 까미노 데 산티아고 / Day 5 / 148.1km
사람이 참 간사하다. 오늘의 풍경 또한 정말 너무나도 훌륭했다. 그런데, 이제는 몇 번 봤던 풍경이라고 금세 지겨워지고 말았다. 대단한 풍경이 대단하게 느껴지질 않는다. 언제쯤 나는 세상의 모든 것을 쉽게 질려하는, 아주 못 된, 심보 고약한 습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오늘의 언덕은 높진 않았지만, 어제보다 자주 나타났고, 대부분 산길이었다. 하지만 길을 잘 못 들었는지, 아니면 나도 모르게 편한 길을 따르려 했어서 때문인지, 계속해서 찻길이 옆에 함께했다. 순례자들이 걸었던 한 걸음 한 걸음이 모여 까미노가 만들어졌을 텐데, 이 까미노를 따라 저 찻길이 생겨 난 걸까? 문득 예전의 까미노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궁금하다.
푸엔테 라 레이나에서부터 Azqueta(아스퀘타)까지, 거의 30km를 걸었다.
사실, 일반적인 일정이라면 푸엔테 라 레이나의 다음 마을은 에스테야가 될 것이다. 까미노를 걷는데 도움을 주고 있는 여러 어플들이, 전부 다 다음 목적지로 에스테야를 추천하는 걸 보면 말이다. 하지만, 함께 걷고 있는 형석이의 제안으로, 에스테야를 넘어 아스퀘타까지 오게 되었다. 이곳 아스퀘타에 아주 괜찮은 알베르게가 있었기 때문이다.
30km면 여태 걸었던 거리 중에서 가장 긴 거리였다. 그만큼 지난날과 다르게 피곤이 쌓였을 텐데, 30km를 걸었던 일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릴 정도로 오늘의 알베르게는 정말 훌륭하다. 우리는 이 알베르게가 다른 알베르게에 비해 시설이 좋아서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값이 싼 알베르게 또한 아니다. 우리는 이 알베르게에서, 집 같은 포근함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서 선택했다. 그럴 만도 한 게, 이곳의 사진은 알베르게라기보단, 가정집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래, 그런 곳이라면 왠지 모르게 우리의 피로를 녹여줄 만큼 포근할 것 같았기 때문에 이곳을 선택했다.
우리를 맞이해준 주인아줌마의 미소를 처음 본 순간, 우리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이곳엔 집밥이 있었고, 모닥불을 품은 벽난로가 있었으며, 포근한 이불이 있었다.
마침 요 근래 잠을 푹 못 잤는데, 오늘 밤만큼은 푹 잘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추위를 떠나 자는 동안 덮을 게 없다는 사실 때문에 꽤 힘들었고, 그 때문에 꿈자리도 사나워서 잔 것 같지 않은 기분이 늘 뒤따랐었다. 나는 하루 동안 은연중에 생각했던 것들이 꿈속에 등장하곤 하는데, 걸으면서 하는 생각이라곤, 대개 이불 킥 할 만한 아주 부끄러운 생각들 인터라, 그것이 나를 괴롭혔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런 꿈도 꾸지 않겠지. 든든한 저녁식사에 와인도 원 없이 마셨으니, 오늘 밤만큼은 말 그대로 꿀잠이 예상된다.
마치 고향집에 와있는 기분이다.
이제는 내리막보다 오르막이 더 편하게 느껴진다. 혹자들은 우리의 인생을 오르막과 내리막으로 표현하며, 오르막은 힘든 길, 내리막은 수월한 길로 표현하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걸 이번에 크게 깨달았다. 오르막, 글쎄, 힘들 수 있겠지만 오히려 정상에 올라섰을 때의 희열을 생각하며 버틸 수 있겠다. 그러나 내리막은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오르막을 오를 때보다 훨씬 더 주의를 요해야 하며, 힘도 많이 들어간다. 체력적으로 힘들다. 그리고 또 그 난관을 헤쳐 내리막을 전부 내려가더라도, 정상에서 느낄 수 있는 희열이라곤 없다. 더불어 정신적으로도 힘든 셈이다. 그러니 어쩌면 오르막보다 내리막을 더 힘들다고 이야기하는 게 맞는지도 모르겠다.
아, 물론 ‘인생 내리막'이라는 표현이 긍정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내리막이라고 늘 좋은 의미로 쓰이는 것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지만, 확실히 오르막이 더 편하다. 훗날 내게 힘든 일이 닥쳐왔을 때, 웃음기가 사라지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어야 할 것 같은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고 있다고 생각이 들 때, 잠깐은 이때를 생각하며 미소 지을 수 있겠다.
군대에서 한 번도 생긴 적 없는 물집이 벌써 다섯 개나 생겼다. 5일 차에 다섯 개, 하루에 하나씩 물집을 늘려가고 있는 셈이다. 확실히 많이 걷긴 걷나 보다. 다행히도 너무 아픈 물집은 아니다. 하지만 물집의 크기가 자꾸 커지는 것 같아서 한 편으론 걱정도 된다.
이렇게 발이 아픈데도 불구하고, 이 고통을 참고서, 나는 계속 걷는다. 그러다 문득 이 까미노가 힘듦을 통해 나를 단련하는 훈련의 목적이 있는 곳만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어쩌면, 힘들어도 더 잘 버티는, 이제는 꽤 멋져진 스스로를 깨닫기 위해 이곳에 와 있는지도 모른다. 지난 여행을 통해 이만큼 성장했다는 걸 스스로 깨닫고, 인정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 까미노를 걷고 있는 건 아닐까? 고작 물집을 가지고 고난과 역경이라고 표현하기에는 굉장히 부끄럽긴 하다만, 여태껏 내가 해온 10개월을 여행을 통해 웬만한 고난과 역경을 참아내는 힘이 생겼으니, 그리고 까미노를 걷다가 이러한 사실을 깨달았으니, 정말 어쩌면 스스로에게 박수를 쳐주기 위해 이곳에 와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일은 오늘보다도 더 긴 거리를 걸어야 한다. 글쎄 내일의 길은 내게 또 어떤 깨달음을 줄까.
수많은 생각들과 수많은 깨달음들이 걸음 속에 스쳐 지나간다. 이들을 전부 붙잡지 못하는 게 아쉽다.
생각만 하면 자연스레 메모를 해주는 기계가 발명되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하루에 몇백 개라도 글을 써낼 수 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