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공략집이 내게 알려준
캐릭터 육성법"

님 그거 그렇게 키우면 안 됨 ㅋㅋㅋㅋㅋㅋㅋㅋ

by 한성호

한 번은 백화점에서 오래 일 했던 한 친구의 소개로, 천호동 백화점에 있는 나이키 매장에서 일을 할 수 있었다. 일하는 시간은 먼저 일하고 있던 직원들과 크게 다를 바 없었지만, 일주일에 일하는 날짜를 조금 줄여서 파트타이머로 일했다. 경제적 독립을 위해선 더 많은 급여를 받을 수 있고, 보다 안정적인 수입이 생기는 정직원이 되는 것이 좋겠지만, 이미 직원 자리는 다 차 버린 상태라 그럴 수는 없었다. 그리고 20대 초반이었으니까, 아직까진 노는 게 더 좋을 나이였으니까, 그 정도가 딱 좋았다.


image_readtop_2020_804486_15966695784307202.jpg


"반갑습니다 고객님 어서 오세요 나이키입니다"

"찾으시는 사이즈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두 문장이다. 이 문장만큼은 각종 신발가게, 그리고 아디다스, 나이키 직원을 제외하고는 아주 맛깔나게 발음할 자신이 있을 정도로 수 없이 뱉었다. 나이키 매장에서의 일은 꽤 즐거웠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은 내가 나이키 마니아가 되게끔 만드는 데에 충분했다.

처음으로 부모님께 선물이라는 걸 해본 때가 바로 이때, 나이키에서 일을 하던 때였다. 특히나 나이키라면 아주 좋은 브랜드라고 생각하시는 할아버지께 나이키 신발을 선물로 드린 일이 아직까지도 뿌듯하다. 게다가 무조건 비싼 신발이 아니라, 나름 손님들에게 신발을 추천하던 노하우를 살려, 할아버지의 발볼을 체크하고, 평소에 어떤 때에 많이 신으시는지를 체크에서 할아버지께 꼭 맞는 편한 신발을 구매했던 게 참 보람찼다. 게다가 직원 할인으로 싼 값에 살 수 있었으니 내겐 일석이조였다.


그러던 어느 날 주말에 새로운 아르바이트생이 왔다. 아무래도 주말 일이 바쁘니까 사람을 한 명 더 불러야 되겠다는 매니저 형의 판단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첫 출근날에 아주 익숙한 듯이 나와 함께 일하던 직원들에게 인사를 건넸고, 매니저 형님에게 반말을 해가며 친근함을 표시했다. 알고 보니 그 형님은 우리 매장의 매니저 형님과 친분이 있는 사람으로, 이전에 같은 매장에서, 같이 함께 일했던 사람이었다. 바쁜 주말 시간에 인력도 추가할 겸, 집에서 놀고만 있는 그런 그에게 그에게 일자리도 줄 겸, 매니저 형이 부른 것이었다.

우리 매장엔 나름대로 직급이 있었다. 직급이랄 것도 없이 들어온 순서대로 매니저-첫째-둘째 이런 식으로 구성될 뿐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 형님이 출근하는 주말에는 이 직급이 달라졌다. 주말에는 그 형님이 첫째가 되었다. 그 당시 직원으로서 같이 일하고 있던 내 친구는 매장의 둘째였는데, 그 형님만 오면 셋째, 아니 나와 같은 막내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형님을 참 못마땅해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그 사람이 조금 얄미웠었다. 친분을 앞세우기 이전에 그 사람은 그래 봐야 주말 파트타이머였다. 그런데 그 형님은 매니저 형과 친하다는 이유로 아주 편하게, 카운터에서 계산하는 일만 할 뿐, 다른 자질구레한 일들은 둘째였던 내 친구 그리고 나의 몫이 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나는 기껏해야 파트타이머라서 그런 생각을 많이 하지 않았지만, 친구의 생각은 달랐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다른 이유로 그 형님이 맘에 들지 않았다.

그 형님은 나처럼 연극을 전공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배우가 되려고 했던 꿈을 접고 평일엔 학원에서 보조강사를 하고, 주말에는 우리가 일하는 나이키에서 일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서른이 훌쩍 넘어가던 그 형님이 내게 뱉었던 말 한마디가 아직도 잊히질 않는다.


"지금 '연기'라는 물에서 참방참방 물장구나 치고 있을 때, 그만둬. 푹 젖으면 답 없어"


배우의 꿈을 꾸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참 기운이 빠진다. 그 당시에 나는 아직 연기라는 걸 제대로 해본 적도 없고, 배우의 길을 시작도 못 해본 사람으로서 그 형님의 말이 참 아니꼬웠다. 그래서 그 사람 자체를 미워하고, 그 형님의 인생을 비난하기도 했다.


SSI_20120620133323_V.jpg


'얼마나 연기를 못했으면 그만뒀을까'

'그래 놓고선 한다는 일이 고작해야 메가스터디 보조강사에 나이키 주말 알바야?'


그런데 지금의 나는 그 형님의 뒤를 똑같이 따라가고 있다. 나 또한 연기라는 바다에 아주 푹 젖었을 때, 나이를 한참 먹고 나서야 그만두었고, 지금은 친구가 매니저로 있는 중식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중이다. 물론 그때의 형님처럼, 다른 직원들보다 편하게 일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 형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연기를 전공한다는 것은, 배우를 꿈꾼다는 것은 다른 일의 전문성을 기르는 데에 조금 불리하다는 것을 직접 경험해봄으로써 이제는 깨달았기 때문이다.

배우를 꿈꾸는 사람들은 그 의지가 굉장히 강하다. 배우가 되고 싶은 욕심이 아주 강하다는 뜻이다. 그렇게 본인의 마음속에 배우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가득하니, 다른 일을 병행하더라도 그 일에 집중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 다른 일의 전문성을 키우기가 힘들고, 전문성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여기까진 괜찮다. 배우로서의 삶이 그 사람의 메인이라는 뜻이니까. 그러나 현실은 혹독하다. 무명배우로서의 삶은 굉장히 가난하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일이다. 유명 배우가 되지 못하는 상황까지 생길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다른 일을 통해 돈벌이를 해야 하는데, 그렇게 돈벌이에 집중하다 보면 연기 연습에 소홀해지고, 노력보단 운에 기대하는 상황까지 이어진다. 결국 다른 일에 집중하느라 연기도 놓치고, 연기를 놓칠 것 같아서 다른 일에 집중도 못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며 어중이떠중이로 남게 된다.

그 형님은 그 악순환을 겪어본 사람이어서 내게 그런 말을 한 것이다. 그 형님도 나처럼 이 사실을 몰랐던 탓에, 너무 푹 젖어버렸고, 배우로서도, 평범한 직장으로서도 성공하지 못한 어중이떠중이 같은 사람이 되었다. 그러니 너만큼은 그러지 말라며, 나처럼 되지 말라며, 내게 그런 말을 한 것일 테다.


'그래서 배우를 꿈꿨던 게 후회돼요?'

만약 그 형님을 다시 만난다면 묻고 싶은 말이면서, 지금의 내게도 똑같이 묻고 싶다.


IMG_1537.JPG


아주 뻔한 답이지만, 정말 나는 배우를 꿈꿨던 걸 후회하지 않는다. 그래, 솔직히 말해서 부정적인 생각이 아주 안 드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배우를 꿈꾸고, 연기를 공부하면서 아주 많은 것을 얻었다고 생각하기에 후회는 없다. 못해도 낯가림이 많이 없어져서 사람들과 쉽게 친해질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말이다.

나는 배우를 꿈꿨던 그 시절의 내가 참 좋다. 그만큼 열정적인 때가 없어서, 다른 일들을 할 때 귀감이 된다. 비교해보며 '더 열심히 해야지'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그때만큼 열심히 하고 있네, 잘하고 있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리고 배우를 꿈꾸며 연기를 공부한 것이 참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캐릭터를 공부하면서 사람에 대해서 공부하고, 그렇게 사람을 공부하면서 인생을 공부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어쩌면 생각보다 어중이떠중이는 아닐지도 모른다.


그 형님은 요새 뭐하고 지내시는지 문득 궁금하다.

이전 04화"님 힐러 맞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