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이건 도대체
어디서 배워온 스킬이야?"

연극이 끝나고 난 뒤

by 한성호

대학교 생활에 올인을 했다. 그렇게 해야 배우라는 꿈에 더욱 가까워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학교를 다니는 동안, 돈 벌이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다시 나는 부모님께 용돈을 타서 썼고, 가끔 하루짜리 아르바이트를 소개받아하는 것으로 용돈의 일부를 충당했다.

하루짜리 아르바이트들은 대부분 연극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무대를 세우고 철거하는 일이라던지, 무대 뒤에서 세트를 바꾸는 일을 한다던지, 조명 오퍼레이터, 혹은 음향 오퍼레이터로 공연에 참여하고, 그에 맞는 일당을 받곤 했다. 그러다 한 번은 학교 교수님이 대표로 있는 극단의 일을 도와서 연극을 만들어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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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배우로 참여했다면 훨씬 더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내가 배우로 참여할 수 있는 공연은 아니었다. 나는 기획파트를 맡아서, 여기저기 공연을 홍보하고, 관객을 유치하며, 공연 날에는 티켓 부스에 앉아 티켓을 발권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래도 괜찮았다. 이 공연은 학교의 극장이 아닌 대학로의 소극장에서 하는 공연이었으니, 나는 돈을 주고 못 하는 현장 실습을 한 셈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학교가 아닌 대학로로 출석도장을 찍다 보니, 내가 배우라는 꿈에 조금 더 가까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게 참 좋았다.

그런데 급여가 문제였다. 솔직한 마음으로 나는 급여에 대한 기대를 조금 했다. 당연히 급여가 적을 것이라는 것은 이미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돈을 받을 거라는 기대는 애초부터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 돈벌이가 내게 의미 있는 돈벌이였기 때문에 급여를 받는 것, 그 행위 자체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만약 이렇게, 하루짜리 공연장 아르바이트가 아닌, 약 2개월간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한 공연으로 돈을 번다면, 그 돈은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연극을 통해 벌어본 의미 있는 돈이 되는 것일 테니 말이다. 그런데 공연이 끝나고 내 손에 쥐어진 건 달랑 5만 원이 전부였다. 받았으니 된 거 아니냐고? 아니다. 이 5만 원은 후배의 고생을 알아줬던 멋진 선배가 본인의 사비로 챙겨준 돈이었다. 그러니 내게 할당된 공식적인 급여는 0원이었다.

백번 양보해서, 나는 배우로 참여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와 같이 공연에 참여했던 친구의 경우는 달랐다. 그 친구는 이 공연에 배우로 참여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오히려 이 공연에 더 진심을 쏟아부은 사람은 나보다 이 친구였다. 그 친구는 밤 낮 할 것 없이 연습에 참여해가며 본인을 갈아 넣었고, 제자라는 명목 하에, 후배라는 명목 하에, 그리고 막내라는 명목 하에 내가 하던 잡무들도 동시에 처리해내야 했던 친구였다. 이렇듯 오히려 나보다 더 많은 노동력을 제공했는데, 그가 가져간 돈은 나와 똑같은 5만 원이 전부였다. 그것도 선배가 고생했다며 챙겨준 그 5만 원 말이다.


애써 극단의 대표였던 교수님의 입장에서 이해해보려고 하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인생 경험을 시켜준 거니까, 진짜 제대로 된 현장 실습을 시켜준 거니까, 그러니 급여를 줘야 한다는 생각을 아예 못하셨을 수도 있다. 게다가 밖에서 배우로 활동하기 시작할 때, 필모그래피에 쓸 수 있는 한 줄을 만들어 줬으니, 오히려 감사와 존경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셨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건 해도 해도 너무했다. 단순히 돈을 받고 못 받고의 문제를 떠나서, 우리는 우리를 존중받지 못하는 기분을 느꼈다. 우리는 그저 어떤 공연을 만드는 데에 필요한 소모품이었나 보다. 그런 소모품으로서, 마침 학교 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는 나와 내 친구가 적합해 보였나 보다.


그런데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그 당시에 나는 이게 어느 정도는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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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5만 원, 나의 5만 원을 합쳐 쓰디쓴 술을 마셨다. 그 친구는 술잔을 기울이며,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다며, 연극에 대한 회의감마저 든다며 한탄을 뱉어냈다. 그런데 그 친구에게 정말 미안하지만, 정작 내 속은 그의 생각과 달랐다. 겉으로는 '그래 진짜 너무했어'라고 말했지만, 한편으론 '다 그런 거 아닌가?', '내가 좋아하는 걸 하려면 이만큼은 감당해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을 했다.


'평생 연극을 할 수만 있다면, 평생 시급을 받는 인생을 살아도 좋아.'


그만큼 연극이 좋았다. 바보 같은 행동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 당시에 나는 연극에게, 그리고 연기에게 정말 진심을 다했다. 이 일이 있고 난 뒤로, 나는 연기와 병행할 다른 일들에 관심을 쏟았다. 배고픈 연극을 계속하면서 버티려면 무조건 적으로 다른 일이 필요했고, 그 일은 무엇을 좋을까 끊임없이 고민했다. '일하다가 아무 때고 쉴 수 있고, 아무 때고 다시 일을 할 수 있으려면, 지인의 가게에서 일해야겠는데?', 'A보단, B가 짧은 시간에 더 많은 돈을 받네' 같이 연기와 같이 병행하는 일들을 필터링하고 정리했다.

그러다 보니 내게 남은 일들은, '짧게 일할 수 있는 일', '쉽게 그만둘 수 있는 일' 같은 일들만 남아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내가 배우를 꿈꿨던 일 때문에 아직도 내가 시급을 받는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스쳤다.

맞다. 이것이 나의 '일을 계속해서 쉽게 그만두는 습관'의 시작이다. 당연히 그 당시엔 이게 습관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내가 언제 오디션에 합격해서 연극 무대에, 혹은 촬영장에 가야 될지 모르니까, 쉽게 그만둘 수 있는 일을 찾았을 뿐이다. 나는 '배우가 될 것이다.'라는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있으니까, 일이 맘에 안 들면 '그래 까짓 거 뭐 내가 좋아하는 일도 아닌데, 하지 말지 뭐'라고 생각하며 그만뒀을 뿐이다.

병행하는 일에 시간을 많이 투자하지 않고, 책임져야 하는 일을 많이 만들지 않았다. 나는 월급을 받는 직원보단, 시급을 받는 아르바이트생이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게 배우를 꿈꾸는 사람들이 기꺼이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이라고 여겼다.


그래, 이러니까 이게 습관이 들 수밖에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