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Z와 일하는 대기업 부장의 혼술 8

"저는 마케팅팀 사람이에요."

by 박성훈

신규 서비스의 론칭 이벤트를 준비하는 회의에서 주부장의 언성이 높아졌다. 간단하게 끝날 회의였는데, 상무님 지시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김대리가 반발했다.

“야, 김대리, 이건 상무님 지시야, 영업 본부에서 내려온 거라고. 상무님이 이걸 그냥 말씀하셨긋나(겠니?). 당연히 이게 회사 방침이야. 괜히 힘 빼지 말고 그대로 가자.”

“부장님, 저는 ‘회사 사람’이라기보다 마케팅팀 사람이에요. 상무님이 주신 안이 우리 팀 기준이랑은 좀…”

“야, 우리 팀 기준이 뭐 별거 있나(있어?). 우리가 다 회사 돈 받아서 일하는 사람이지.”

“그래도 이건 마케팅 관점에서…”

“야, 그래서, 니가 사장이가(사장이야?), 아니믄(아니면) 상무가(상무야?).”

“… 아닙니다.”

“그라믄(그러면) 쫌 시키는 대로 하자. 문제 생기믄 내가 책임지께(질게)”

그렇게 회의가 끝났다. 모두 아무 말 없이 회의실을 나갔다. 주부장이 생각해도 망한 회의다. 어제 상무님께 실적 압박을 세게 받았더니, 불안한 마음에 감정을 절제하지 못했다.

독한 술이 땡긴다. 시계를 보니 퇴근 시간이다.

무교동 먹자골목 입구의 꼬치구이집 옆을 잘 찾아보면 좁고 가파른 계단이 보인다. 그 계단을 올라 1.5층에 있는 허름한 바(Bar)에 들어선다. 바 라고 하기에는 천장에 머리가 닿고,테이블은 달랑 네 개, 화장실 수압도 약하지만, 명색이 1960년대 미국 플레이보이 클럽 이름을 따온 곳이다. 하지만 가게 이름과는 전혀 맞지 않게 연세 지긋~한, 사투리도 구수~한 여사장님이 점심때는 칡즙을 팔고, 저녁엔 위스키와 맥주를 파는 곳이다.

“아이고~ 주박사님~” 어제도 오고 오늘도 오는 거지만, 사장님은 아들뻘 되는 주부장을 또 반갑게 맞아주신다.

이 집 단골이라면 누구나 그러겠지만, 스스로 선반 위에서 어제 마시던 킵(보관)해 둔 위스키를 꺼내 테이블 위에 둔다. 바 사장님은 쥐포를 굽기 시작하고, 마른안주와 과일도 내어 주신다. 그리고 주부장이 사랑하는 노래들을 쭉 틀어주신다. 제일 먼저 최백호의 ‘부산에 가면’이 흘러나온다.

사장님은 단골이 될 손님을 알아보는 놀라운 촉이 있다. 십수년 전 주과장은 탈모도 없었고, 흰머리도 없었다. 눈매도 쳐지지 않았다. 이 집에 처음 왔을 때, 사장님은 주과장이 앞으로 단골이 될 거라는 걸 한눈에 알아봤다. 이런 작은 규모의 바를 직접 운영하는 사장님과 단골 삼을 만한 술집을 찾아 헤매는 술꾼 사이에는 한 번에 통하는 촉이 있다.

당시 주과장을 이 집에 처음 끌고 온 부장님은 지금은 마케팅팀이 소속된 영업본부의 상무로 여전히 건재하시다. 당시 부장님은 주과장을 바 사장님께 소개하며 ‘우리 주박 (주박사)~, 주박~’이라 불렀다. 주부장이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그때 사장님은 주과장이 또 올 것을 예견하고, 아무 카드 영수증 뒷면에 ‘주박사’라 적고 주과장의 신청곡 목록을 쭉 적었다. 그리고 다음번 주과장이 바를 들렀을 때, 목록에 적힌 노래를 쭉 틀어주셨다. 주과장은 그렇게 단골이 되었다. 이것은 대기업 마케팅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배워야 하는 마케팅이다. ‘고객 가치 창출’, ‘고객 맞춤’, ‘충성도 제고’, 맨날 기획 보고서에 적는 개념을 바 사장님은 이미 실천하고 계셨다.

위스키든 소주든 소맥이든 구분 없이 그냥 같은 방식으로 쭉~ 마시는 주부장은 얼음 탄 위스키 한 잔을 쭉~ 비웠다. 이걸 뭐 천천히 맛을 음미하며 마시는 미식가도 있을 테다. 그럴 일도 잘 없겠지만, 임원을 단 후 이곳에 발길이 뜸해진 상무님이 만약, 고급 바에서 값비싼 ‘몇십 년 산’ 위스키를 사 주신다면, 주부장도 그렇게 마셔 볼테다. 그래도 여기서 마시는 위스키는 그냥 주부장의 취향대로 편히 마실 것이다. 아버지도 집에서 아주, 아~주 가끔 선물 받은 와인을 드실 때는 주종과 관계없이, 마시던 스타일 그대로 편하게 드셨다. 사은품으로 받은 와인 잔에 얼음을 넣고 와인을 꿀떡꿀떡 따라 쭉~ 잔을 비우셨다.

어떻게 마시든 내 기준에 따라 내 맘대로 마실 수 있는, 마음 편한 술집이 최고다. 주부장은 잔을 다시 채우고 바의 벽면을 쭉 둘러본다. 바 벽면 가득, 손님들의 낙서가 빼곡히 적혀 있다. 카운터에 보드마커가 있는데, 남은 양주를 맡기기 전에 자기 이름을 양주 라벨지에 큼지막하게 쓰는 용도로도 쓰고 또 벽에 낙서할 때도 쓴다.

주부장은 벽에 쓰인 낙서를 볼 때면 항상 뿌듯함을 느낀다. 주과장 시절, 처음으로 프로젝트 리더를 맡은 사업의 론칭 날, 팀원들이 모두 바에 모여 코가 삐뚤어지게 술을 마셨다. 벽에 ‘론칭 기념’이라 쓰고 함께 한 상무님, 부장님과 본인 이름, 후배 대리의 이름을 모두 적었다. 바 벽면에는 다른 날 적힌 낙서도 많다. ‘주박(주박사) 취하다’, ‘주박, OOO이랑 왔다 감’ 뭐 그런 낙서들이다.

이 벽에 적힌 이름들을 보고 있으면, 주부장의 과거 전성기 10년이 주마등처럼 스쳐 간다. 함께 일했던 사람들과 좋든 싫든 부대꼈던 기억이 떠오른다.


사회적 정체성 이론(Social Identity Theory)에 따르면, 사람은 ‘나는 누구인가’를 정의할 때 개인의 특성보다 ‘내가 어떤 집단에 속해 있는가’로 더 많이 정의한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내가 속한 집단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그 집단의 성공을 나의 성공처럼 느끼며, 집단의 규범을 자발적으로 따른다. 이런 소속감이 몰입을 불러온다. 어린 주과장 또한 이런 소속감 때문에 더 몰입할 수 있었고, 10년의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었다.

그런데, MZ도 소속감을 느끼는가? 당연하다. 우리 나이 때 부장들이 흔히 하는 오해는 ‘MZ들은 개인주의여서 소속감을 못 느낀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MZ는 ‘군대 얘기’를 싫어하겠지만, 잠시 하겠다. 공군에서 부르는 군가 중에 ‘보라매의 꿈’이란 노래가 있다. 1970년대 만들어진 이 군가가 2025년 국방일보의 조사에서 ‘MZ 공군들이 가장 사랑하는 군가’에 선정되었단 소식이다. 이 군가의 클라이맥스는 ‘이곳이 내 집이다. ♬ 내 목숨 건 곳 ♬’이다.

신병교육대에 갓 들어와 1주일의 기초 훈련을 받는 훈련병들은 ‘이 곳이 내 집이다’는 대목에서 현실을 부정하려 한다. 소대장은 그 마음을 알기에 ‘더 비장하게 부르라꼬(불러라)!’라며 닦달한다. 공군 신병교육대의 소대장으로 군 복무를 한 주소위-주중위의 경험담이다.

어쨌든, 놀라운 점은 신병 훈련 기간에는 현실을 부정하게 만드는 군가였다가, 군 생활 동안 ‘가장 사랑하는 군가’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비약이 좀 심한지는 모르겠지만, ‘의무’ 복무 중인 군대에서도 이렇듯 MZ들은 소속감을 느낀다.

그런데 소속감의 원인이 다르다. 우리 나이 때 부장들은 바 벽면에 적힌 그 이름들, 바로 사람 때문에 소속감을 느꼈다. 주사원-주대리-주과장이 20년을 모셨던 상무님과 주부장을 유독 잘 따르던 황사원-황대리-황과장 같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사람으로부터 소속감을 느끼는 것은 우리 나이 때 부장까지의 얘기다. MZ는 그렇지 않다. 김대리가 격앙되어 ‘저는 마케팅팀 사람이에요’라고 외쳤을 때, 명색이 인사조직 박사인 주부장은 그 정체성이 사람으로부터 오는 소속감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김대리가 마케팅팀에 정체성을 느끼는 것은 감사할 일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주부장, 황과장, 박사원과 계속 같이 일하고 싶어 마케팅팀에 정체성을 느끼는 게 아니다.

김대리는 마케팅팀에서 ‘일의 의미’를 찾은 것이다. 다시 말해 마케팅팀에 ‘내 자존심을 걸고 일하고 있다’는 선언을 한 것이다. 하지만 주부장 본인은 지금 한 번의 회의로 그걸 무너뜨렸다. 어제 상무님한테 받은 성과 압박에 불안감이 커져 실수로 언성을 높여 버렸다.

사회적 정체성 이론 관점에서 본 ‘망한 지점’은 이렇다.

첫째, ‘팀이 뭐 별거 있어?’라는 표현이다. 마케팅팀 사람 이라는 MZ의 핵심 정체성을 의미 없는 것으로 전락시켰다.

둘째, ‘회사 돈 받아서 일하는 사람이지’라는 표현이다. 소속 자부심을 계약 관계로 전락시키고, 전문가 집단을 급여생활자로 치부했다.

셋째, ‘네가 CEO야?’라는 표현이다. 지위에 기반한 침묵을 유도하는 나쁜 표현이다. MZ의 의견 제시를 ‘월권’으로, MZ의 판단을 ‘위계 침범’으로 만들어 버렸다.

넷째, ‘문제 생기면 내가 책임질게’라는 말로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겉으로 보면 멋있는 말처럼 들리지만, 실제 메시지는 그렇지 않다. MZ는 이 말을 ‘너희 판단은 필요 없고, 책임도 공유하지 않을 거야’로 해석한다.

이 순간 팀원들은 주체에서 객체로 바뀌고, 팀 정체성은 ‘부장 정체성’으로 바뀐다. 이제 MZ는 더 이상 의견을 내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부장이 결정할거야.’ 앞으로 회의는 빨리 끝나겠지만 회의 결과는 공허할 것이다. 대화의 주어도 바뀔 것이다. ‘우리는’이 사라지고 ‘부장님’만 남을 것이다. 끝으로, MZ의 이직 사유가 하나 더 늘 것이다. ‘이 팀은 내게 의미가 없다.’

주부장이 오늘 독한 술이 땡기는 이유다.

만약 주부장이 이렇게 얘기했다면 어땠을까?

‘그래? 그럼 우리 기준으로 신규 서비스가 더 빛날 수 있는 기획안을 만들어 봐. 그 결과는 우리 이름으로 다 같이 책임지는 거야.’ 아마 갈등은 줄고 팀 정체성은 더 단단해 졌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성과에 대한 압박까지 가능했다.

팀 정체성을 활용해 성과 압박도 가능하다고? 가능하다.

정체성이 생긴 팀에 성과 압박을 할 때, ‘외부의 요구’를 기준으로 하면 반발이 생긴다. 하지만 ‘내부 기준’을 일관성 있게 밀고 나가면 자발성과 오기가 생긴다. 예를 들면, 잘못 된 성과 압박은 ‘본부에서 무조건 성과를 내래’, ‘상무님이 괜찮은 숫자가 안 나오면 뭐라 하실 거야’, ‘다른 팀은 다 했는데 왜 우리만 못해?’ 이런 표현이다.

이제 정체성을 살리면서 성과를 압박하는 세 가지 단계를 연습해보자.

첫째, 정체성을 상기시킨다. ‘우리는 문제를 회피하지 않는 팀이잖아.’ 이런 표현은 압박의 출발점을 ‘팀 내부 가치’에 두게 한다.

둘째, 기준을 제시한다. ‘우리 팀 이름을 달고 하려면 OOO까지는 가야 해.’ 이런 표현은 모호함을 제거해 주는 효과도 있다.

셋째, 공동 책임 선언이다. ‘이건 우리 팀 전체의 숙제야.’ 이런 표현은 압박과 보호를 동시에 제공하는 표현이다. ‘같이 버티는 압박’ 말이다.

결국 정체성이 생긴 팀은 ‘더 잘하라’는 말보다 ‘우리는 이 정도 팀이다’는 말에 더 움직인다. 오늘 주부장은 성과를 압박할 수 있는 좋은 기회까지 날려 먹은 것이다.

‘내가 명색이 인사조직 박사 딴 사람인데.’ 이놈의 이론은 업무 시간에는 생각이 안 나고 꼭 퇴근하고 술을 한잔해야 기억이 난다. 몹쓸 기억력이다.

위스키 한 잔을 쭉~ 마신다. 벌써 주부장 애창곡 리스트는 이문세를 지나, 유재하를 지나, 김광석의 ‘외사랑’까지 왔다.

MZ에게는 ‘팀 정체성’이 더 중요하다. 회사는 정체성을 규정하기에 너무 멀고 추상적이다. 그래서 ‘회사’가 아닌 ‘단위 집단’에 정체성을 둔다. 예를 들면 MZ는 ‘대기업 OO전자의 직원’이라는 정체성은 잘 갖지 않는다. 회사는 경력 관리 차원에서 갈아탈 수 있는 플랫폼(정거장)일 뿐이다.

반면 MZ가 팀 정체성을 가질 확률이 높은 이유는 팀에서 수행하는 구체적인 업무에 ‘사회적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회적 의미란 ‘밖에서 내가 어떻게 보이느냐’이다. 예를 들면 마케팅팀에서 내가 하고 있는 업무가 IT 서비스의 스쿼드 마케팅(Squad Marketing)이라면, 이런 역할은 마케팅 업계의 MZ들 사이에서 소위 핫(Hot) 한 역할이다. (요즘은 힙 한 이란 표현을 쓴다는데) 참고로 스쿼드는 군대 용어로 ‘소규모 팀’을 뜻하는데, 마케팅 용어로는 ‘소규모 자율팀’을 뜻한다. 한 스쿼드가 특정 서비스의 마케팅을 맡으면, 그 안의 마케터(Marketer)는 A부터 Z까지 마케팅의 전 과정을 자율적으로 실행한다. 따라서 ‘OO서비스 스쿼드의 마케터’는 MZ의 사회적 얼굴이며, 곧 MZ의 가치가 된다. 이 정체성이 없으면 MZ는 ‘이 팀에 왜 남아야 하지?’라는 질문이 바로 나온다.

혹시 독자분 중에 ‘나는 우리 팀원이 김대리처럼 얘기하는 걸 들어본 적 없다’고 말하는 분도 있을 것이다. 자기 자랑은 아니지만 김대리가 마케팅팀의 정체성을 가졌다는 건, 나름 주부장이 팀 관리를 잘했다는 얘기다. 그런 의문을 제기하는 독자분의 팀원들은 한 번도 ‘사회적 의미가 있는 팀 정체성’을 가져보지 못한 것이다.

혹시 또 독자분 중에 ‘팀 정체성이 그렇게 중요해?’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분도 있을 것이다. 답을 말씀드리면, 그렇게 중요하다. 팀 정체성이 없으면, ‘책임감’이 사라진다. 사회적 정체성 이론의 아주 중요한 명제는 ‘사람은 나로 행동할 때 보다 우리로 인식될 때 훨씬 책임 있게 행동한다’는 것이다. MZ가 이런 행동을 보일 때가 있다. ‘그건 제 업무 범위가 아닌데요’, ‘이건 팀 이슈가 아니라 OOO대리의 개인 이슈 아닌가요?’, ‘저는 제가 맡은 일은 다 끝냈어요’ 팀원들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열정’이나 ‘태도’의 문제가 아니다. 정체성의 문제다. 내가 팀에 정체성을 느끼지 않으면, 팀의 실패도 남의 일이다. 갈등 해결은 관리자의 일이지 내 일이 아니다. 팀 성과를 위한 추가 노력은 ‘호구 짓’이다.

팀 정체성은 ‘번아웃’도 막을 수 있다. 사람은 의미 있는 집단에 소속되어 일할 때, 스트레스는 있어도 덜 소진 된다. MZ 직원의 번아웃은 일이 많아서도 있겠지만, 더 근본적으로 ‘이걸 왜 하는지 모르겠고’, ‘이 성과가 누구에게 남는지도 모르겠고’, ‘나만 소모되는 느낌’일 때 오는 것이다.

팀 정체성에 관해 두 가지 살펴볼 점이 있다.

첫 번째는 ‘사람’이 좋아서 소속감을 느끼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여기서 ‘사람도 중요하다’며 반박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유튜브에는 실리콘밸리의 혁신 기업에서 일하던 분들의 인터뷰 영상이 많이 있다. 영상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말이, ‘최고의 천재들과 한 팀에서 일해 좋았다’라는 말이다. 사람 중심의 팀 정체성이다.

실리콘밸리 혁신 기업이라면 그럴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저 말의 의미는 말을 하는 본인도 ‘천재’라는 얘기 아닌가. (반은 자기 자랑이다) 물론 실리콘밸리 혁신 기업에 다녔으니 자랑할 만하다. 그러니까 유튜브 영상도 찍는 것이다. 어쨌든 여기는 대한민국이고, 또 대기업이다. 각 팀에 최고의 천재는, 아쉽지만 거의 없다. MZ 또한 그런 혁신적 인재와의 협업을 기대하고 대기업에 들어오지 않는다.

두 번째 살펴볼 점은 정체성과 ‘심리적 안전감(Safety)’은 다르다는 것이다. 이 둘을 많은 리더가 혼동한다. 명확히 구분하자. 심리적 안전감은 ‘말해도 혼나지 않는다’는 느낌 이다. 질문해도 무시당하지 않고, 실패해도 인신공격을 받지 않는다. 즉, 심리적 안전감은 ‘말할 수 있는 환경’에 관한 개념이다. 반면 팀 정체성은 ‘속하고 싶은 이유’다. ‘나는 이 팀 사람이다’, ‘이 팀의 성공은 나의 성공이다’, ‘이 팀의 기준에 맞추고 싶다’는 감정이다.

다행인 것은, 적어도 주부장은 회의실에서 본인이 뱉은 말 때문에 회의가 망했다는 걸 인지했다. 하지만 꼰대 부장은 이 상황에서 본인이 회의를 망쳤다고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요즘 애들 참~ 말 안 듣네’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말을 안 듣는 게 아니다. 방금 당신이 ‘이 팀에 나를 걸 이유’를 없앤 것이다. 꼰대 부장이 나쁜 말버릇으로 권위를 세우는 동안 팀 정체성은 무너진다.

팀 정체성을 무너뜨리는 부장의 나쁜 말버릇을 정리해본다. 부장 스스로 선한 의도로 말했겠지만, 결과는 파괴적이다.

첫째, ‘각자가 맡은 일을 잘하면 돼’라는 표현이다. 부장의 의도는 팀원 각자의 책임감을 높이려는 것이다. 하지만 MZ의 해석은 ‘이 팀에는 우리가 없구나, 그럼 나도 내 것만 하면 되겠네’이다. 팀 정체성이 붕괴되기 시작한다. 물론 팀 전체 목표와 개인 역할은 구분되어야 하고, 개인의 기여에 따른 평가도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하지만 우선은 팀 정체성을 공고히 한 뒤 개인 기여를 따져야 팀워크가 가능하다.

둘째, ‘회사는 다 이런 거야’라는 표현이다. 부장의 의도는 조직의 현실을 일깨워주려는 것이다. 하지만 MZ는 ‘그러면 이 팀은 바꿀 의지도, 색깔도 없는 거네’라고 해석한다. 팀이 ‘의미 없는 하위조직’으로 전락하게 된다.

셋째, ‘그건 네 경력에 도움 안 돼’ 같은 표현이다. 부장의 의도는 본인 생각에 비효율적이거나 비생산적인 업무로부터 팀원을 보호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MZ는 ‘그럼 이 팀은 내 경력 관리와는 별개라는 말이네?’라고 해석한다. 팀 경력이 공백기로 인식되는 순간이다.

꼭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팀 정체성은 워크숍으로 생기는게 아니라는 점이다. 매일 반복되는 리더의 말이 쌓여서 만들어지고, 무심코 리더가 던진 말 하나로 무너진다.

이제 팀 정체성을 확립하는 세 가지 장치를 정리해 보자. 핵심 원칙은 이렇다. 정체성은 ‘우리는 이런 팀이다’는 말이 매주, 매달, 매 분기 반복해서 증명될 때 굳어진다.

이 과정을 우리 같은 사무직의 핵심 업무 세 가지, 회의, 평가, 보고 관점에서 정리해보자.

첫째, ‘회의’를 ‘정체성 확인 시간’으로 활용하자. 정체성을 떨어뜨리는 회의는 팀원들이 개인별 진행 상황을 나열하는 회의다. 회의가 끝나면 개인별 과제에 대한 부장의 질타나 지시만 남는다. ‘우리가 뭘 하는 팀인지’는 남지 않는다. 보통 이런 회의는 부장의 이런 말로 시작된다. ‘각자 진행 상황을 말해 봐.’ 심지어 정해진 순번을 따라 각자 돌아가며 보고 하도록 미리 세팅해놓기도 한다.

반면 정체성이 생기는 회의는 시작 질문부터 다르다. ‘이번 주 우리 팀이 해결하려는 핵심 문제는 뭐지?’ 개인 업무에서 팀 미션으로 프레임을 바꾸는 질문이다.

부장이 의사결정을 할 때도 ‘우리 기준’이라는 표현을 쓰면 좋다. 예를 들면, ‘이 안은 우리 팀 기준에 안 맞아’, 혹은 ‘우리가 추구하는 방식이 뭐였지?’ 이런 표현이다.

회의의 마무리는 ‘책임자’ 선정이 아니라 ‘집단 선언’을 해야 한다. 예를 들면 ‘그럼 이 건은 김대리가 맡아’ 이런 마무리는 좋지 않다. (물론 보통의 회의에서 책임자를 정하는 건 중요하다. 역할과 책임을 명확히 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지금은 ‘정체성을 확립하는 회의’에 관해 얘기하는 중이다. 머리가 복잡하겠지만, 부장이 월급을 더 받는 이유는, 그때 그때 상황에 맞는 관리기법을 쓰라는 이유도 있다.) 어쨋든 ‘이건 우리 팀이 이번 달에 책임지는 과제야’, 이런 표현은 개인 부담이 아닌 집단적 책임을 형성한다. 다시 정리하자면 팀 정체성을 위한 회의는 각자 업무를 공유하는 자리가 아니다. ‘우리가 한 팀이다’를 재확인하는 반복 의식이 돼야 한다.

둘째, 개인 평가 위에 ‘팀 정체성 평가’를 얹어야 한다. 평가에서 팀이 사라지면 정체성은 금세 사라진다. ‘개인 KPI 100%’, ‘팀 성과는 참고용으로’, ‘협업 성과는 가산점으로’ 할 경우, MZ는 ‘결국 각자도생이네’라고 판단할 것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개인 평가 항목에 ‘팀 기여’ 문항을 넣는 방법이 있다. 예를 들면, ‘본인은 팀의 어떤 문제 해결에 기여했는가’ 같은 문항이다. 팀장이 개인 성과에 대해 피드백을 줄 때도 ‘너는 OO성과를 냈다’고 평가하는 것보다 ‘너의 OO성과는 우리 팀 전략 OOO에 이러한 기여를 했다’고 피드백을 주는 게 좋다. 같은 맥락에서, 실패한 기획에 대해 피드백을 줄 때도 ‘너는 왜 실패했는가?’를 묻지 말고 ‘이 실패에서 우리 팀 방식의 한계는 뭐라고 생각해?’라고 물어보면 좋겠다. 실패도 팀 정체성을 강화하는 학습 자산이 될 수 있다.

셋째, 성과 보고가 아닌, ‘팀 스토리 보고’로 바꿔보자. 팀정체성 없는 보고는 개인 성과를 나열하거나, ‘누가 했는지’ 강조하는 보고다. 팀은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된다. 반면 팀 정체성을 강화하는 보고는 ‘우리 팀은 이번 분기에 OO을 시도했고’처럼 팀이 행위의 주체가 된다. 그리고 ‘결과’보다 ‘팀의 선택 이유’를 설명한다. 예를 들면 ‘우리 팀은 이런 맥락에서 이런 선택을 했다’는 표현이다. 물론 실패를 보고할 때도 있다. 이때에도 실패를 팀 이름으로 보고해보자. ‘우리 팀은 OO시도에서 실패했고, 이걸 배웠다’는 표현이다.


위스키 한 잔을 쭉~ 마시고, 바 벽면에 적힌 이름들을 훑어본다. 주과장 시절 함께 했던 사람 중 상당수가 떠났다. 그들이 떠났을 때 우리 팀의 정체성은 어떻게 되었던가. 가장 먼저 상무님이 떠났을 때 팀의 정체성이 크게 무너졌다. 그 후 부장님이 지금의 상무님으로 승진하고, 더 이상 우리 팀 일에 세세하게 관여하지 않으면서 또 한 번 팀의 정체성이 바뀌었다.

만약 지금 주부장이 계열사 발령을 받거나 권고사직을 하게 된다면, 마케팅팀의 정체성은 어떻게 될 것인가? 부장이 떠났을 때 무너지는 팀은 팀 정체성이 아닌 ‘부장 정체성’에 의존한 팀이다. 이런 팀은 부장이 떠나면 결정이 멈추고, 책임을 미루고, ‘부장님이 계시면 물어봤을 텐데’라는 말을 한다.

반면 부장이 떠나도 작동하는 팀은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첫째, 팀의 판단 기준이 팀원들 몸에 배어 있다. 둘째, 의사결정 권한이 역할 단위로 분산되어 있다. 예를 들면 ‘이 영역은 김대리가 결정하는 영역’, 이런 식이다. 셋째, 갈등 해결 방식이 공유되어 있다. 예를 들면, 어떤 갈등이 생겼을 때, ‘우리는 공개적으로 이야기해 왔잖아’라는 식이다.

결국, 팀 정체성이 완성되었는지는 사람이 떠난 뒤에 알 수 있다. 마케팅팀의 정체성이 완성되었는지도 언젠가 주부장이 떠난 뒤에야 밝혀질지 모른다. 그런데 요즈음은 조직개편과 희망퇴직도 빈번해졌고, MZ들의 이직률도 높아졌다. 따라서 ‘사람이 떠났을 때 정체성을 지키는 법’에 대해서도 연습이 필요하다.

조직개편 상황에서 어설픈 부장의 말 한마디가 팀 정체성을 즉시 붕괴시킬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표현은 안 된다. ‘회사 사정이 이래서 어쩔 수 없어.’ 오히려 다음과 같은 표현을 통해 팀의 존속 가치를 지켜야 한다. ‘개편이 있더라도 우리 팀의 정체성은 유지한다.’

평가 결과에 따라 팀원을 내보내야 하는 상황도 있다. 이럴 때에는 평가를 ‘관계’ 문제에서 ‘구조’ 문제로 전환하는 게 필요하다. ‘이 팀이 너랑은 잘 안 맞는 것 같아’ 이런 표현은 개인 성향이나 관계 문제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오히려 ‘우리 팀이 요구하는 역할과 기준이 너의 성과와 간극이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좋다.

만약 나가는 사람이 느꼈던 팀 정체성이 의미 있었다면, 그 정체성은 분명 개인 경력으로 환원될 것이다. 반면 정체성을 느끼지 못했다면, 그 사람은 다른 회사 면접에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팀이 워낙 바빠서 정신이 없었어요.’ 그 사람은 팀에 ‘잠시 속해 있었을 뿐’이다.

개인의 경력으로 환원된 팀 정체성은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첫째, 팀의 판단 기준을 ‘내 언어’로 말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우린 항상 문제를 이렇게 정의했어요’ 같은 표현이다. 둘째, 과업이 아니라 ‘영향’을 설명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저는 자료 정리 담당이었어요’ 이런 과업이 아니라, ‘제가 이 구조를 잡지 않았으면, 팀의 의사결정이 늦어졌을 거에요’ 같은 영향이다.

끝으로, 조직 개편 상황에서는 남은 사람들에게도 분명히 말해야 한다. ‘이번 결정은 우리 팀의 기준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다.’ 이 선언은 팀의 기준을 낮추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라벨지에 보드마커로 ‘주OO’이라 큼지막하게 적힌 위스키병을 다시 보관 선반에 올려놓는다. 오늘은 여기까지다. 바 사장님과 내일을 기약하고, 비록 1.5층이지만 굴러떨어지면 죽을 것 같은 좁은 계단을 조심조심 내려온다.

사람에 충성하고, 사람에게 정체성을 느끼던 시절이 지났다.아쉽지만, 현실을 받아들일 때다. 내일 출근하면 김대리와 함께 우리 마케팅팀 기준에 맞는 새로운 론칭 기획안을 마련 해야겠다.

상무님을 설득하는 건 내 몫이다. 여기 다시 모셔와 오랜 만에 벽에다가 이름 한 번 적어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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