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 1: 도시
평당 최고가 아파트의 몰락
1. 2035년: ‘침수차의 무덤’이라는 오명
2020년, 2025년, 2027년, 2029년, 2030년, 2031년, 2032년, 2033년, 2034년.
대한민국에서 가장 땅값 높은 동네. 전철역과 연결된 35층 주상복합 아파트 지하 주차장이 폭우에 침수된 해이다.
처음 몇 번의 침수 때에는 인명피해도 있었다. 하지만 주민들은 집값이 내려갈까 봐 피해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는 것도 꺼렸다. 몇 번의 침수가 반복되고, 침수 주기가 짧아지자 입주자대표회의에서는 차수문 설치가 논의되었다. 하지만 상습 침수 아파트로 낙인 찍히면 ‘집값이 떨어진다’는 주민들의 반대로, 차수문 설치는 번번이 무산되었다, 지하 주차장의 외제차들이 흙탕물에 잠기는 동안에도, 지상의 집값 그래프는 위태롭게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상황이 순식간에 변했다. 한 집, 두 집, 값을 10억 이상 내린 급매물이 나오기 시작하자, 너도나도 급매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 동안은 집값 하락을 우려해서 주민들끼리 매도가를 내리지 않기로 약속하고 서로 단속을 했다. 하지만, 누군가 약속을 깨버린 것이다. 주변에서 평당가가 가장 높았던 이 주상복합 아파트의 평균 매도 호가가 순식간에 10억이 떨어지더니 몇 달 사이 20억 가까이 더 빠졌다. 첫 급매물이 나온 후 몇 달 사이에 매도 호가가 기존 집값 대비 반 토막이 났다.
1층 상가 대부분도 ‘마이너스 피’가 붙은 채 급매물로 나왔다. 1층 상가는 한때 전체 주상복합 상가 중에서 가장 비싼 임대료를 자랑하던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1층 임대료가 2층의 반값이다. 그런데도 대부분이 공실이고, 임대가 나간 곳도 부동산이 들어와 있거나, 계절성 팝업 스토어가 운영 중이다.
아파트 주민들은 전전긍긍했지만, 의외로 외부 사람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이미 예견된 일이 벌어졌다는 반응이다. 부동산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 사이에선 몇 년 전부터 이 아파트에 대한 소문이 이미 돌만큼 돌았다. 몇 년 전에는 유튜브에서도 이 아파트에 대한 영상도 돌았다. 몇 년 전 지하 주차장 침수 때는 방수문을 설치한 지하 변전실도 완전히 침수되었다. 전력이 복구되는 2주간 정전과 단수를 겪었다. 이때 엘리베이터가 멈춘 35층 펜트하우스까지 생수통을 짊어지고 계단을 올라가는 택배 기사의 영상이 유튜브에 퍼졌다. 지하 주차장에 고급 외제차들이 모두 침수된 영상도 함께 퍼졌다. 누군가 유튜브에서 이 아파트 지하 주차장을 ‘침수차의 무덤’이라 칭했고, 그때부터 부동산을 좀 아는 사람들은 이곳을 ‘침수차의 무덤’이라 불렀다.
입주민들은 그런 표현에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이미 지하 주차장은 ‘우기(6월~9월)’ 동안 폐쇄되는 것이 관례가 되어 왔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여름이 오면 차를 다른 지역의 공용 주차장에 맡기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불편을 감수해 왔다. 이렇게 잘 적응하고 있는데, ‘침수차의 무덤’이라니.억울했다. 그러는 사이, 지하 공간은 점차 곰팡내가 진동하는 ‘유령 공간’으로 변했다.
입주민들이 더 억울해한 것은 구청의 반응이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침수 피해가 나면 구청은 피해 복구를 적극 지원했다. 구청으로서도 이 주상복합 아파트는 부촌의 상징같은 곳이었다. 그런데 구청의 표현이 달라졌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구청이 침수 피해에 대한 보도자료를 낼 때, ‘일시적인 피해’라는 점을 강조했다. 구청은 주민들에게도 ‘신속 복구를 지원’하고, ‘모든 주민의 불편이 없게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해왔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장기적으로 관리’하겠다, ‘선별적으로 지원’하겠다는 표현을 쓰기 시작했다. 심지어 입주자대표회의의 일부 위원이 구의원과 아파트 주민의 이주대책을 논의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이 주상복합 아파트의 재건축 이전부터 원주민으로 쭉 살았던 주민들은 더 억울해했다. 원래 설계에 반영된 대로 배수펌프도 설치했고, 지하주차장이 침수될 때마다 주민들 비용으로 청소도 하고, 이미 자기 소유의 외제차도 침수 피해를 보아 두 번이나 바꿨는데, 왜 그런 것은 알아주지 않는 것인가. 저지대에 빗물 터널 설치와 하수관 증설을 몇 년째 미루고 있었던 것은 시와 구청 아닌가.
2. 2050년: 유령 마천루
해수욕장 산책로 주변에서 가장 높은 100층 주상복합의 입주자들이 80층 커뮤니티 센터에 모였다. 재건축을 논의하기 위해서다. 바다가 한눈에 내려 보이는 커뮤니티 센터 전망과는 달리, 부동산 개발업자의 설명 내용은 암울했다. 첫째, 해수면 상승으로 10년 뒤 해수욕장의 영구 폐장이 결정되면서, 인근 지역 부동산 가치가 급격히 하락하고 있다. 둘째, 매년 반복되는 해일 피해로 1~5층 상가 공실률이 높고, 2030년의 방파제 보강공사로 바다가 보이지 않아 상가 주변의 상권이 완전히 죽었다. 셋째, 주상복합이 건축된 지 30년이 되어 재건축이 필요하지만, 현재로서는 불가능한 상황이다. 그 이유는 철거비용이 일반 아파트 대비 3~5배 들어 철거부터가 적자이다. 용적률도 건축 당시 최대치를 받았기 때문에 수익을 만들 구조가 없다. 내진, 풍하중, 비틀림 등 안전 기준이 까다로워 일부만 고치거나 구조를 바꾸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나마 이 주상복합보다 10~20년 뒤에 세워진 인근 주상복합은 모듈형으로 지어져서 일부 층의 재건축이 가능하지만, 이 주상복합이 지어질 때는 그런 기술이 없었다.
부동산 개발업자의 결론은 첫째, 외벽과 상하수도 설비를 교체하고, 엘리베이터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한다. 둘째, 1~3층 상가를 골조를 건드리지 않은 채 철거하고 필로티 형태로 바꾸어, 바닷물에 잠길 때를 대비한다. 셋째, 4층을 주 출입구로 변경하여 해수면 상승 후 출입이 가능하게 한다. 넷째, 인근 고지대와 4층을 연결하는 다리를 건설하고, 고지대에 외부 주차장을 짓는다. 현재 지하 주차장은 외부 주차장 건설 후 시멘트를 가득 채워 바닷물 속에서도 건물 하중을 버티게 한다. 마지막으로, 이 전체 공사에 드는 비용은 향후 5~30층을 상가와 호텔로 분양한 후 충당하고, 부족분은 입주자들이 분담한다.
입주민들은 기가 차서 한동안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얼마 후, 한 집, 두 집, 조용히 이사를 나갔다. 하지만 주택연금에 가입한 집은 이사를 나갈 수 없었다. 이 주상복합은 건축 후 한때 서울 한강뷰 아파트에 육박하는 평당가를 찍었다. 당연히 그때에는 공시가격이 높아 주택연금 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3년 연속 해일 피해가 발생한 10년 전, 공시가격이 급격히 내려가면서 주택연금 대상이 되었다. 그때 은퇴한 노인들이 살던 집들이 주택연금에 가입했다.
몇 달이 지나고, 또 한 번의 해일 피해를 겪은 후 주상복합은 주택연금 가입 가구를 제외한 거의 모든 집이 이사를 나갔다. 마치 유령도시처럼 변해버렸다. 그런데 주택연금을 담당하는 공사에서 등기우편이 왔다. 2060년의 해수욕장 영구 폐장이 결정된 후, 공사에서 주상복합의 거주 안전성에 대한 평가를 진행했다고 한다. 평가 결과 위험성이 높아 ‘거주 부적격’ 평가가 내려졌다. 이에 따라, ‘주택연금 가입자가 다른 주택으로 이주하여도 연금 지급을 지속한다’는 내용의 등기였다. ‘주택연금은 거주를 전제로 한다’는 강력한 원칙을 깬 첫 사례가 나왔다. 이제 남은 입주자들도 이사를 나갈 수 있게 되었다.
[변화의 조짐]
사람들의 표현이 바뀌기 시작한다. ‘복구는 됐는데..’, ‘저는 괜찮은데, 아이 때문에...’, ‘입지는 좋은데...’. 이런 표현을 쓰기 시작한다.
금융시장도 빠르게 반응한다. 동일 지역 내에서도 저층과 고층의 담보를 차등한다거나 지하주차장 구조에 따른 평가 차이를 둔다. ‘가격은 인정하지만, 출구가 불안하다’는 신호이다.
[관성 → 변화적 사고]
사람들이 관성적 사고를 한다 해서, 그것을 ‘누가 나쁘고, 잘못했다’라고 비판할 수는 없다.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늦게 움직이기 때문이다. 누구 한두 명의 잘못이 아니다.
이 상황에서 관성적 사고는 ‘설마 매년 이러겠어?’, ‘그래도 여긴 입지가 좋잖아’, ‘가격은 결국 회복할거야’, ‘국가가 결국 복구해 줄 거야’와 같은 생각이다. 이것은 이성적 판단이 아니라 심리적 자기방어다. 집은 자산이기 이전에 힘들게 살아온 삶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변화적 사고는 ‘살(買) 수는 있지만, 살(住)지는 않는다.’는 생각이다. 집의 가치가 자산가치, 학군에서 거주 안전성으로 바뀐다.
[지금부터 관리해야 하는 지표]
1. 실거주 회피 관련 심리적 저항선
(소비자 수용 한계점)
2. 담보 가치/유동성 할인 관련 경제적 저항선
(시장 리스크 감내 한계점)
3. 반복 피해 지역 복구 비용 관련 정책적 저항선
(재정적 지속가능성 임계점)
심리적(소비자)/ 경제적(시장)/ 정책적(정부) 저항선은 연쇄 반응을 일으킨다. 심리적 저항선은 실거주를 회피하는 정도이다. 학군/ 생활 인프라에 대한 질문보다 침수 이력이나 보험에 대한 질문이 증가한다. 한 때, 관성적 사고는 ‘역세권/ 바다 조망은 결국 오른다’는 인식이다. 하지만 그 관성보다 ‘투자는 몰라도, 나는 여기서 살지는 않을래’라는 인식이 더 강해지면 저항선이 생긴다. 경제적 저항선은 ‘은행, 보험, 연금이 부동산의 가치를 어떻게 보는가’이다. 기존의 관성적 사고는 ‘고가 아파트는 금융 친화적 자산’이었다. 하지만 전환 사고는 ‘현금화가 어려운 자산’이다. 정책적 저항선은 정부가 더 이상 ‘원상복구’를 전제로 말하지 않는 순간이다. 기존의 관성적 사고는 ‘결국 정부가 주민 안전과 복구를 책임진다’였다. 하지만 전환 사고는 ‘반복 피해에 대해서는 정부도 계속 감당하지 못한다’이다.
이 세 가지 저항선이 연쇄 반응을 일으킨다는 의미는 다음과 같다.
심리적 저항선(소비자) → 경제적 저항선(시장) →
정책적 저항선(정부) → 심리적 저항선 고착/재붕괴
첫째, 소비자의 미묘한 회피가 시작된다. 사람들은 아직 ‘위험하다’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실거주 비율이 줄고, 공실률이 높아지고, 계약 기간이 짧아진다(심리적 저항선).
둘째, 금융이 빠르게 반응한다. ‘10년 뒤에도 자산가치가 유지될까?’라는 질문이 등장하는 순간, LTV(주택담보인정비율)가 줄고, 보험 조건이 바뀌고, 담보 평가가 보수화된다(경제적 저항선).
셋째, 정책 언어가 바뀐다. ‘복구’ 대신 ‘관리’라는 표현을 쓰고, ‘재건’ 대신 ‘전환’, ‘지원’ 대신 ‘선별’이라는 언어를 쓴다. 이때부터 정부는 ‘개인자산’의 보호가 아니라 ‘정책 예산’의 효율성을 기본값으로 둔다(정책적 저항선).
넷째, 정부의 신호가 소비자의 저항을 고착화하거나 재붕괴시킨다. 실거주가 완전히 이탈하고 투자 수요도 급감한다. ‘언젠간 회복된다’는 서사가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