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 3: 마을
잿빛 산등성이에서 사라진 마을
1. 2030년: 화마(火魔)가 죽인 산
그곳은 첩첩산중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구부러진 길을 한참이나 돌아 들어가야 나오는 고요한 산골 마을이었다. 이른 새벽 산안개가 자욱할 때면 소나무 향이 코끝을 찔렀고, 가을이면 마을 어르신들이 망태기를 메고 올라가 따오던 송이버섯이 마을의 든든한 밥줄이었다. 군청에서는 마을의 특산품인 송이를 활용해 ‘가을 버섯 축제’를 열었다. 조용하던 산골 마을은 TV 프로그램의 홍보 덕분에 시끌벅적해졌다. 군청의 귀농 지원 사업으로 버섯 농장, 버섯을 활용한 건강식품 사업을 하는 청년 농부들도 이사를 왔다. 조용하던 초등학교 분교도 어린아이들 떠드는 소리로 시끌벅적해졌다.
하지만 202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잔인한 가뭄’은 이 모든 풍경을 건조하게 말려버렸다.
2030년 봄, 역대 최장기간 건조특보가 내려진 가운데 작은 불씨 하나가 뒷산을 집어삼켰다. 예전 같으면 며칠 만에 꺼졌을 불길이었으나, 수분기를 완전히 잃은 토양과 바짝 마른 낙엽층은 거대한 도화선이 되었다. 불은 일주일간 꺼지지 않았고, 수령 백 년이 넘는 소나무들의 몸통뿐만 아니라 땅속 깊은 뿌리까지 까맣게 태워버렸다.
불이 꺼진 뒤, 산은 더 이상 우리가 알던 산이 아니었다. 겉보기엔 검게 그을린 나무들이 서 있는 것 같았지만, 지표면 아래에서 흙을 움켜쥐고 있던 뿌리가 썩어 문드러지기 시작했다. 마을의 자부심이었던 송이버섯 군락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산은 거대한 숯더미로 변해 버렸다.
2. 2035년: 죽은 산의 역습
2035년 여름, 가뭄 대신 가혹한 폭우가 내렸다. 7월 한 달간 내린 비의 양이 과거 일 년 치 강수량에 육박했다. 문제는 그 비를 받아낼 ‘산의 근육’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나무뿌리가 썩어 지지력을 잃은 흙덩이들은 물을 머금자마자 거대한 진흙 덩이가 되어 계곡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산사태’라는 단어로는 부족했다. 산 자체가 흘러내리는 붕괴였다. 불에 타 약해진 나무들이 흉기가 되어 마을의 유일한 진입로를 덮쳤고, 계곡 옆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농가들은 순식간에 매몰되었다. 군청은 뒤늦게 사방공사를 시작하려 했으나, 이미 산의 지질 자체가 변해버려 효과가 없었다. 공사를 한다 해도 장비조차 진입하기 어려웠다.
마을 사람들은 군청 근처 운동장 공터에 컨테이너로 조성된 임시 거처에서 2년 넘게 생활해야 했다. 그 사이 두 번의 여름이 찾아왔고, 어김없이 강수량은 전년도 폭우기록을 갈아치웠다. 산은 계속 무너져 내려, 농가가 재건축중이던 공사 현장을 덮어버렸다.
집을 떠난 지 3년째에 겨우 농가로 돌아간 마을 주민들은 이제 비만 오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산이 무너지는 소리가 천둥소리보다 무서웠기 때문이다. 한때 마을의 보물창고였던 산은 이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되어 주민들의 숨통을 조였다. 마을 경제에 활력을 불러왔던 젊은이들은 보상금조차 포기한 채 도시로 떠났고, 남겨진 노인들은 폐허가 된 비닐하우스 옆에서 산을 원망하며 하루를 보냈다.
3. 2040년: 지도에서 사라진 마을
2040년, 마을은 사실상 ‘고립된 섬’이 되었다. 반복되는 산사태로 도로 복구 예산은 바닥이 났다. 군청은 이 지역을 '거주 불능 지역'으로 지정하기에 이르렀다.
마을의 소멸은 행정상의 물리적 소멸보다 ‘기능적 소멸’이 먼저 왔다. 버섯도, 약초도, 농사도 불가능해진 땅에서 경제 활동은 완전히 멈췄다. 초등학교 분교도 문을 닫았다. 마을 입구의 분교는 산사태로 떠내려온 흙더미에 파묻혔다. 가을마다 열렸던 버섯 축제도 박물관 기록물에나 남을 옛일이 되었다. 우체부가 발길을 끊고, 전기가 자주 끊겼다. 마지막 남은 구멍가게가 문을 닫았을 때, 마을의 심장은 멈췄다.
산은 이제 잡목과 가시덤불만이 무성한 기괴한 형상으로 변해, 사람이 살았던 흔적을 천천히 지워나갔다. 한때 TV 프로그램에서 ‘대한민국에서 가장 공기 좋은 버섯 산지’로 소개된 산골 마을은, 이제 지도에서 사라졌다. 전문가들은 이 지역을 ‘대한민국 1호 기후난민 발생지’라 불렀다.
[변화의 조짐]
이 마을은 하루아침에 망한 게 아니다. 가장 중요한 변화의 조짐은 산불로 인해 나무뿌리가 썩은 것이다. 썩은 나무뿌리를 다 뽑고 나무를 새로 심지 않는 이상 산사태를 막기 힘들다. 하지만 그 너른 산의 나무를 다 뽑아 새로 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송이버섯 군락지의 파괴도 중요한 변화의 조짐이다. 이것은 단순한 소득 감소의 문제가 아니라 지역 정체성이 붕괴되는 것이다. 이로 인해 귀농하는 청년 농부들을 유인할 지역의 경쟁력이 사라졌다.
[관성적 → 변화의 사고]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사고 전환을 늦춘다. ‘산불은 잘 끄면 된다’, ‘산은 언젠가 다시 살아난다’, ‘여긴 대대로 살아온 땅이다’는 관성적 사고가 변화를 막는다. ‘농사는 다시 지으면 된다’, ‘작물은 바꾸면 된다’, ‘한두 해만 잘 버티면 된다’는 생각도 모두 관성적 사고다.
변화의 사고로 바뀌는 순간은 ‘여기서 아이를 키울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이다. 청년 농부가 보상금을 포기하고 이탈하는 것은 단순히 ‘이 땅에서 더 이상 뭘 해도 안된다’는 ‘돈 버는 구조’ 때문이 아니다. ‘사는 구조’가 붕괴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변화의 사고에서는 ‘보상금의 금액’이 중요하지 않다.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거주 공간’이 중요하다. 이것은 상황에 따라 다르다. 장 샤를 섬 주민들에게는 ‘안전하게 사는 곳’을 제공하려는 생각이 오히려 관성적 사고였다. 그들에게는 ‘정체성을 지킬 수 있는 곳’이 더 중요했다.
[지금부터 관리해야 하는 지표]
1. 계속 살 수 있다고 믿는 심리적 저항선
(거주 가능성 한계점)
2. 지역 경제 붕괴 관련 경제적 저항선
(경제적 재생산 한계점)
3. 산불/산사태 피해 복구 지원 규모 관련 정책적 저항선
(재정적 지속가능성 임계점)
심리적 저항선은 계속 여기서 살 수 있다는 믿음이 붕괴되는 지점이다. 비 오는 소리만 들어도 두렵고, 산이 자산이 아닌 위협으로 느껴진다면 그 한계선이 붕괴된 것이다.
경제적 저항선은 일종의 생계 지속성에 대한 저항선이다. 농사, 임산물 생산, 축제가 모두 불가능할 때 지역 경제의 엔진이 정지한다. 경제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터전이 붕괴되는 것이다.
정책적 저항선은 ‘더 이상 복구가 어렵다’는 국가적 결단 한계선이다. 사방공사를 포기하고, 도로 복구를 중단하고, 거주 불능 지역으로 지정한다. 해당 마을을 지원 대상에서 장기적인 관리 대상으로 전환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