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에서 온 구두, 피카딜리
구두는 여자에게 로망이다. 여배우들이 아무리 키가 작아도 티 나지 않는 것은 높고 아슬아슬한 킬힐이 있어서고, 시사회장에서 와이드팬츠를 펄럭이면서 등장할 수 있는 것도 하이힐 덕분이다. 여자에게 구두가 없었다면 세상은 얼마나 심심했을까.
대학에 들어가서야 굽 있는 구두를 신어봤다. 아마도 5cm 남짓이었겠지만, 운동화 말고 구두를 신어본 게 처음이라 무척 낯설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다양한 구두를 신게 됐다. 굽이 높은 하이 힐, 중간 굽인 미들 힐, 그리고 낮은 플랫 슈즈까지. 수많은 구두를 신었고, 지금도 신고 있다.
여자의 다리가 가장 예뻐 보이는 구두 높이는 7cm라고 한다. 나도 7cm 굽을 좋아한다. 그렇지만 어지간히 좋은 신발이 아니고서는 발이나 허리가 아파서 하루 내 신을 수 없는 높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침마다 신발장 앞에서 갈등한다. 낮은 걸 신으면 편한데 다리가 굵어 보이고, 높은 걸 신으면 다리가 아픈데 예뻐 보인다. 예뻐 보이는 7cm? 평범하지만 편한 5cm? ... 일주일 가운데 다섯 번은 예뻐 보이는 쪽을 택하지만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후회한다. 그냥 낮은 걸로 신을 걸, 하고 말이다.
그런데 십 수 년 해온 내 갈등을 해결해준 구두를 드디어 만났다. 피카딜리, 이름도 낯설다. 브라질에서 왔다고 한다. 브라질? 브라질은 또 뭐야, 했다. 알고 보니 브라질은 신발을 잘 만들기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나라였다. 이렇게 저렇게 고민하다가 한 번 사보자 했다. 많이 팔릴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하면서.
구두가 왔다. 5cm 검정 구두, 그냥 심플하다. 검정색 에나멜, P 로고가 구두 옆선에 자그마하게 붙어있다. 너무 밋밋한가. 살짝 후회가 되려는데, 구두에 발을 집어넣는 순간 발바닥이 그렇게 아늑할 수가 없다. 처음 느껴보는 감촉이었다. 아, 이렇게 편할 수가. 왜 이제야 알았지?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나와 비슷한 키, 비슷한 몸매의 여성이 여럿인 사무실에 피카딜리를 가져갔다. 피카딜리를 돌아가면서 신어보았다. 그리고 함께 외쳤다. 와, 너무 편하다. 이건 진짜 신세계네. ... 어디 거야? 설명해주니, 다들 입을 모아 말한다. 브라질에서 이렇게 구두를 잘 만들어?
피카딜리를 만난 다음 내게 구두는 딱 두 부류로 나뉜다. 피카딜리와 아닌 구두. 그만큼 발이 편한 구두는 내 평생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전에는 옷에 맞춰 구두를 신었지만, 피카딜리 검정 에나멜을 만난 다음은 어떤 옷을 입어도 피카딜리다. 청바지에 운동화? 아니, 청바지에 피카딜리, 원피스에 하이힐? 아니, 원피스에 피카딜리가 된 것이다.
허리 아프고 발이 자주 아픈 여성들이여, 신어보면 알 것이다. 지난 가을, 겨울 피카딜리 검정 에나멜 5cm를 마르고 닳도록 신었다. 너무 이것 하나만 신다보니 벗겨지고 닳아서 아쉽고 마음이 아플 따름이다. 올봄에는 누드톤 7cm를 구입해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