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겁한 PM
지금까지 일하면서 가장 큰 프로젝트를 맡았다.
누가 봐도 대단해 보이는 일이었다.
"이건 올해 진짜 중요한 일이야"
"이 정도 규모의 프로젝트는 회사에서도 처음일 거야."
모두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는 내가 만든 괴물이다.
좋은 기획이 아니라는 걸, 사실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멈추지 못했던 순간들이,
지금까지 했던 어떤 실패보다 오래 남는다.
프로젝트는 단 한 문장으로 시작됐다.
"사람이 하던 일을 시스템으로 바꿔달라"
처음엔 단순한 효율화라고 생각했다.
내가 제일 잘 하는거다.
하지만 곧 이상함을 감지했다.
효율화가 아니라,
정책조차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시스템을 만들자는 의도였다.
해결해야 할 문제도, 고객도, 성공 지표도 없었다.
"왜 필요한 건가요?"라는 질문에 돌아오는 답은 늘 같았다.
"있으면 좋잖아요."
문제를 모르는 상태에서 답을 만들어내는 건
모래 위에 건물을 짓는 일과 같았다.
내 목소리는 전부 기각되었고
그들의 요청은 전부 기획안에 적혔다.
기준은 없고 예외만 많았다.
2%도 안 되는 엣지 케이스에 끌려다니며
기획은 점점 복잡해졌다.
디자이너와 개발자, 그들도 느꼈다.
나와 같은 프레임워크로 일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내가 처음 던졌던 질문을
이번엔 나에게 그대로 돌려주었다.
"정말 필요한 기능인가요?"
"이건 왜 만들어야 하나요?"
나는 그 질문들을 회피했다.
필요하지 않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그 순간,
나는 더 이상 문제를 해결하는 PM이 아니었다.
그리고 기획이 복잡하다는 건
누군가의 시간을 갉아먹는다는 뜻이었다.
디자이너는 예외 사항이 생길 때마다
수정하고 다시 넘기기를 반복했고,
결국 몸이 버티지 못했다.
개발자는 잘게 쪼개진 마일스톤 속에서
쉼 없이 쫓기듯 숨이 차도록 달려야 했다.
그들을 보면서도
나는 멈추지 못했다.
더 싸웠어야 했다.
더 질문해야 했다.
그런데 비겁하게 순응했다.
힘이 없었다.
아니, 없다고 믿었다.
PM은 데이터와 논리로 설득해야 한다.
그렇게 배웠고 일해왔다.
하지만 그들 앞에서
데이터는 의미가 없었고,
논리는 너무 쉽게 묻혔다.
일 대 다수로 싸울 때
중요한 건 목소리의 크기였다.
나에게도 "이건 잘못된 방향이에요"
이 한 마디를 함께 말해줄 리더가 있었다면,
내가 조금은 덜 비겁했을까.
처음으로 기획서에 적힌 내 이름이 부끄러웠다.
이후에도 회의는 계속됐다.
질문을 던질 때마다 여전히 대답은 흐릿했다.
"할 때도 있고 가끔은 안 하기도 하고 그래요"
"딱히 이유는 없고 그냥 그렇게 해왔어요."
명확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프로젝트는 움직여야 했다.
"단순히 기능의 문제가 아니에요.
로직상 명확한 플래그가 있어야 하고,
기준이 정책으로 정의되지 않으면
제품에 바로 녹이기는 어렵습니다."
이 말에 돌아오는 대답은 이러했다.
"개발하기 어려운 거면 빼요."
견디기 어려운 한 마디였다.
나의 소중한 팀원들을 무시하는 것처럼 들렸다.
개발이 어려운 게 아니었다.
설계가 엉망이고, 정책이 없는 게 문제였다.
누군가를 배려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책임을 회피하려는 얼굴들이 보였다.
그런 모습에 나는 나쁜 마음을 품었다.
'그래. 원하는 대로 다 만들어줄게.
그리고 나중에 안 쓰면 그때 말해야지.
거봐, 이건 처음부터 필요 없었다고.'
그렇게 마음속에 작은 악마를 품은 채
프로젝트를 이어갔다.
지금 돌이켜보면,
슬픔을 견디기 위한 자기 방어였던 것 같다.
분노와 체념이 번갈아 찾아오고,
기획서를 열 때마다 마음이 뒤틀린다.
언젠가 이 감정이 다 지나가면
다시 이 일을 돌아볼 수 있을까.
지금은 모르겠다.
오늘도 기획서를 닫았다.
이건 실패의 회고가 아니다.
스스로를 잃지 않기 위해 남겨두는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