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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잃은 사람과, 버티고 있는 나에게

얼얼한 하루

by 이서명


69세 남성이 술에 취해 찾아와서 2시간가량 상담실에서 화를 내고 고함을 치고 갔다.

지난주에 이어 두 번째다.


그는 왜 화를 냈을까.

나는 왜 그렇게 무력했을까.

그리고 이런 일이 반복되면 나는 과연, 계속 버틸 수 있을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왜 아무것도 안 해주냐고! 내가 언제까지 기다려야 돼?”
화가 섞인 목소리,

비틀거리는 걸음,

닫히는 문.


남겨진 건 알코올 냄새와 복잡한 감정뿐이었다.

화도 나고, 미안했고, 그냥 멍했다.

그가 나간 자리에 쌓여 있는 건 그 사람 한 명의 분노가 아니었다.

도움이 절실하지만 어디에도 말할 곳 없는 사람들의 마음이 거기 있었다.

그 분노는 나를 향한 게 아니었다.

존중받지 못한 삶 전체를 향한 절규였다.

어쩌면 그는 소통을 잃은 게 아니라, 빼앗긴 것인지도 모른다.

평생 묵묵히 일했고, 자식들 키워냈고, 책임을 감당해 왔던 시간들.

그 시간은 ‘기록’되지 않았고, ‘존중’ 받지 못했고,

지금은 ‘증명’하라며 이력서를 요구받는다.

그는 말이 아니라, 명예를 되찾고 싶은 것이다.

“이 나이에 내가 이력서 써야 돼?”
“30년 기계공으로 일했어. 못 만드는 게 없어.”
그 말속엔 “나는 여전히 쓸모 있는 사람이다”라는 절박함이 숨어 있다.


다른 어르신들은 내게 묻는다.
“아무 연락이 없어서요...”
나는 말한다.

“채용공고가 없습니다.”
그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그렇죠… 벌써 3월도 다 가고, 4월인데…”

그 짧은 말 안엔 기회가 줄어드는 시간,

기다려도 변하지 않는 현실,

자신이 점점 사회 밖으로 밀려나는 느낌이 다 담겨 있다.


이 일을 하며 나는 안다.

노인을 상담하는 일이 힘든 이유는,

그들의 ‘현재’만 보는 게 아니라...

그들이 살아온 ‘전 생애’를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라는 걸.

그 무게는 숫자로 측정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그 무게를 온전히 들어줄 수도 없다.

그래서 요즘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이 일에 어떤 태도로 서 있어야 하는가.


나는 이들의 삶을 대신 책임질 수 없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

그들의 말이 다시 태어날 수 있는 통로를 열어주는 사람이 될 수는 있다.

분노 속에 갇힌 말들,

이력서보다 더 많은 생애를 품은 손들,

기다림 속에서 고개 숙인 눈빛들.
그 모든 것을 모아 오늘도 나는
다시 한번 “괜찮습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라는 말을 연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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