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대체 누구시길래

우연에 대한 소고

by Phillip

사진을 정리하다 우연히, 정말 우연히 찍힌 사진 한 장을 발견하였다. 기억도 갈무리해둘 겸 재빨리 글을 한편 적어두려 한다.


#쉬어감에 이유는 없다.


절친 W군이 사진에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카메라를 새로 장만하더니, 삼각대 마저 새것으로 바꿔버렸다. 그리곤 기존에 사용하던 삼각대를 내게 쾌척하였다. 감사합니다.


삼각대가 생긴 기념으로 부모님이 계신 제주로 향하였다. 난 사진 찍는 걸 좋아하니까. 일을 그만둔지 한 달 반밖에 안되었던 시기, 몸도 마음도 허했다. 오랜 시간 해오던 일을 그만두었기에 생긴 병이 아니다. 자각은 분명하였다. 혹사로 인한 결핍이 그 원인이다. 마냥 게으른 삶을 살아 보고팠다.


이런 삶은 어떨까. 저런 삶은 어떨까. 스스로 묻고 답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주변인들의 시간은 여전히 빠르게 흐르고 있기에 나의 시간만 더디게 갈리 만무하다. 난 원래 자신과의 타협에 능한 편이다. 느린 삶, 느린 삶을 살아보자. 너도 나도 느리게 걷자고 난린데, 나도 동참해보자. 게으름 대신 느림으로, 단어 하나만 바꾸는 거다.


그렇게 2014년의 봄은 시작되었다. 느지막이 잠에서 깨어 더딘 걸음으로 동네를 한 바퀴 돈다. 아점을 먹고 자전거에 올라 역시 동네 한 바퀴를 돈다. 걷는 이보다는 빠르게, 그러나 뛰는 이보다는 빠르지 않게. 추력이 모자라 균형을 잃지 않을 만큼만 속도를 낸다. 느린 만큼 시야가 넓어진다. 여기저기에 관심이 쏠린다. 잠시 한눈을 팔아도 좋다. 얼마든 쉬어가도 좋다.



#당신은 대체 누구시길래


오후면 카메라를 들쳐 메고 이곳저곳을 향하였다. 급할 이유는 전혀 없다. 삼각대도 생겼겠다 장노출에 도전해보기로 하였다. 장노출로 사진을 찍으려면 셔터를 눌러놓고 지긋이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길다. 그래도 상관없다. 사진도 느릿느릿 찍어보자.


삼각대에 카메라를 올려놓고 이곳저곳으로 헤드를 돌려 본다. 한 컷에 20초, 30초, 40초. 조리개를 풀었다 조이며 셔터 스피드를 조정해본다. 모르겠다. 대충 찍자. 적당히 노출값을 높여 놓고 셔터를 누른다.


응? 웬 여자가 앵글로 들어와 있다. 지켜본다. 사진을 찍는다. 미동도 하지 않는다. 찰칵. 한 컷이 넘어간다. 그리고 유유히 앵글 밖으로 걸어나간다. 아니, 이렇게 완벽한 타이밍에 들어와서 완벽한 타이밍에 사라지다니. 작은 번짐도 없이 그녀는 내 사진에 오롯이 담겼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 우연한 선물, 혹은 우연의 선물


집에 와서 사진을 확인하곤 다시 작은 미소를 머금었다. 정말로 제대로 담겼네. 그리 긴 노출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윤곽이며 선이며 모두 뚜렷하다. 무슨 대단한 작품이 나온 것도 아니고, 사진 속의 피사체와 인연이 맺어진 것도 아닌데, 그냥 즐거웠다. 잠시 마나 느린 삶을 택한 나에게 우연이 쥐어준 선물처럼 느껴졌다. 소소한 일로 이리도 행복해한 게 얼마만인가. 그렇게 한참을 실없이 웃었다.


왜, 그런 일, 그런 일이 있지 않은가. 괜히 기억해두고 싶은 기억. 지금 와서 생각해봐도 참 별일이 아니었다. 다만 그때 그렇게 멍청히 웃으며 즐거워하던 순간의 기억이며 느낌이 매우 소중하다. 다시 급박한 삶을 살아내고 있기에, 내 삶에 다시 오지 못할 순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뭐, 그래,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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