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닐라, 그리고 필리핀의 정치 이야기
2020년 8월 8일 사망한 알프레도 림 전 마닐라 시장, 그가 두 번의 임기를 마친 후 시장으로 선출된 살아있는 부패의 아이콘 조지프 에스트라다 전 시장, 그리고 에스트라다의 뒤를 이어 2019년 6월 시장으로 선출된 이스코 모레노 현 시장. 짧은 기간 가시적인 성과들을 내보이며 올드 마닐라의 샛별로 떠오른 이 젊은 시장에겐 꽤나 많은 내러티브가 따라붙는다. 필리핀에서도 최빈지로 손꼽히는 톤도 출신, 잔반통에서 남은 음식을 파헤쳐 먹으며 연명하였던 어린 시절, 우연한 기회에 연예 기획사 스카우터의 눈에 띄어 데뷔, 90년대 최고의 쇼호스트였던 제르만 모레노 쇼에 출연, 일약 스타덤에 오른 후 1998년, 스물셋의 나이에 돌연 정계 데뷔, 마닐라 시의원 생활과 공부를 병행하며 보낸 이십 대, 그리고 서른두 살 마닐라 알프레도 림의 러닝 메이트로 마닐라 시장 선거에 출마, 부시장으로 본격적인 정치 커리어 시작. 이후 시장에까지 당선. 압축적으로 나열하듯 그의 이력을 언급하였으나, 이스코 모레노는 그야말로 여느 드라마 못지않은 극적인 삶을 살고 있다.
앞서 알프레도 림과 조지프 에스트라다 전 시장의 이름을 언급한 것은 바로 이스코 모레노의 정치적 특이점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알프레도 림 시장과의 두 번의 임기 이후 그의 대척점에 있던 에스트라다 진영으로 돌연 적을 옮겨 부시장 직에 다시 출마, 당선되어 세 번째 부시장직을 역임한다. 임기 제한으로 인하여 다음 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던 그는 상원의원에 도전하였으나 낙선, 이후 로드리고 두테르테의 부름을 받아 복지부 차관으로 임명된다. 몇 달 지나지 않아 사임한 그는 마닐라 시장직에 도전, 조지프 에스트라다를 물리치고 22대 마닐라 시장에 당선된다. 시장으로 보좌하였던 알프레도 림과 조지프 에스트라다 모두를 물리치고 마닐라의 시장이 된 그는 배신자라는 칭호에 아랑곳 않고 다양한 정책들을 펼쳐나간다. 림 시장이 추구하던 올드 마닐라의 복원 및 환경정비 사업을 계승하는 한편 에스트라다와 유사한 각종 지원금 정책을 통해 마닐라 지역 이들의 마음을 샀다. 판데믹 시기에도 다른 시장들보다 빠른 생활보조금 지원과 백신 확보 및 접종소 마련 등 그의 시정이 주목을 받았다. 퀘존 시에서는 구호 음식을 나르는데 쓰레기 수거용 트럭을 사용하여 시장이 구설에 오르내리는 동안 그는 발로 뛰며 일선에서 구호 활동을 펼쳐 찬사를 받았다. 그의 코로나 확진 소식마저 많은 이들을 감동케 하였다는 풍문이 있었을 만큼 이스코 모레노는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시장임에 틀림이 없다.
이러한 인기의 발로였을까, 그가 2022년 필리핀 대선에 출마한다고 한다. 복싱 8 체급 석권으로 유명한 필리핀의 국민영웅 매니 파귀아오, 군벌 출신 상원의원 판필로 락손이 출마를 결정한 가운데 이스코 모레노 역시 출마 의사를 밝혔다. 출마만 하면 당선이 확실시된다 하였던 현 다바오 시장 사라 두테르테가 노욕의 상왕, 현 필리핀 대통령 로드리고 두테르테와 대립각을 세우는 동안 - 이 부분도 할 말이 많을 듯하다. 어찌 보면 대선의 키를 쥐고 있는 것은 여전히 두테르테 가문일지도 모르기에. 많은 이들이 그들의 다툼을 GoT - Game of Throne에 비유하곤 한다. - 독재자의 아들 마르코스 봉봉이 출마를 선언, 혼돈의 필리핀 2022년 대선은 점입가경으로 치닫는 중이다.
배신의 아이콘, 포퓰리스트, 그리고 기회주의자라는 정적들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에너지 넘치는 젊은 정치가임을, 구태를 바꿀 수 분명한 인물임을 강조하고 있는 이스코 모레노, 그의 행보만 살펴본다면 그는 분명 꽤 괜찮은 정치적 감각을 지니고 있다. 빈민가 출신답게 슬랭 섞인 걸쭉한 따글리쉬로 단상을 휘어잡는 그의 매력은 비단 그의 곱상한 외모에서 나오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다만 그와 비슷한 배경을 지니고 있으면서 정치적으로 상위에서 포지셔닝하고 있는 파퀴아오와 재계의 지원을 담뿍 받고 있는 락신의 존재, 그리고 아직 명확히 노선을 정하지 않은 사라 두테르테의 잠재적 대선 출마 가능성과, 그녀와 연대하며 아직까지도 건재한 아버지의 레거시를 딛고 대선 출마를 선언한 마르커스 봉봉 주니어. 혹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러하다. It's a real Netflix political drama. 어쩌면, 아니, 분명 드라마보다 더 흥미진진할 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