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 Deposito Reservoir - 저수지를 기억하는 법
“수인성 질병으로 고생하던 마닐라 토착민들의 삶을 개선해 보고자 새로운 상수도 시설을 고안하였던 프란시스코 카리에도 제독과, 훗날 그의 유지를 받들어 실행에 옮긴 수도사 펠릭스 후에르타 덕분에 마닐라에는 19세기 후반 이미 현대화된 상수도 시스템이 도시 안팎에 설치되었다.”
일전의 글을 통하여 언급하였듯 19세기 중엽 마닐라에는 당대의 온갖 진귀한 물건들이 넘쳐났다. 우르다네타 제독에 의하여 귀환 항로가 발견되고 마닐라-아카풀코 무역이 본격화되자 향신료, 도자기, 상아, 칠기, 비단 등 기존의 무역품들에 더하여 각국의 값비싼 재화들이 마닐라로 모여들었다. 중국산 옥, 밀랍, 화약, 인도산 호박, 면화, 양탄자, 그 외 동남아 국가들의 특산물들과 난반 무역을 통해 들어온 일본의 금은보화들이 2천 톤에 달하는 갤리온을 가득 채워 1년, 혹은 2년에 한 번 편서풍을 타고 태평양을 건너 아카풀코로 향하였다.
동서양을 잇는 부의 통로였던 만큼 마닐라는 꽤나 이른 시기에 근대화된 도시의 형태를 갖추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 꼽히는 것이 카리에도 분수(Fuente Carriedo)와 엘 데포시토 지하 저수지(El Despasito Reservoir)이다.
지난 11월 30일, 보니파시오의 날을 기념하여 재개장한 엘 데포시토 지하 저수지는 스페인 식민정이 마닐라에 남긴 가장 큰 건축물로 알려져 있다. 내부는 얼핏 보면 이스탄불의 예레바탄 지하궁전을 떠올리게 한다. (예레바탄 역시 지하 저수지로 사용된 바 있다.) 본 지하 저수지의 복원사업은 2016년에 시작하여 2020년 완료, 당해 대중들에게 공개될 예정이었으나 판데믹으로 인하여 잠정 연기되었다 1년 여를 늦춰 그 공개 시기가 확정되었다.
본 지하저수지는 1882년 완공되었다. 대략 5킬로미터가 떨어진 마리키나 강까지 철로 만든 관을 연결하여 늘 맑은 물을 공급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최대 1500만 갤런의 물을 저장할 수 있었기에, 이후 30만 명에 달하였던 마닐라와 마닐라 인근의 거주민들은 부족함 없이 맑은 물을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물을 신선한 상태로 유지하기 위하여 지상과 연결되는 송풍 시설 또한 갖추었다고 한다. (나름 근대화된 설비라고 하는데 원리가 설명된 글을 찾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이전까지는 파시그 강에 오물과 하수를 흘려보내고 그 물을 그대로 길어다 썼기에 때마다 거주민들이 각 종 수인성 질병들에 시달렸다면, 저수지와 상수도 시설이 정비된 이후에는 상하수도가 완전히 분리되어 이러한 문제들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는 부분이 아닐까 한다.
기술적으로 재미있는 부분이 한 가지 더 있다면 바로 이 지하 저수지 역시 카리에도 제독이 고안하였던 상수도 사업의 주요 과제 중 하나였다는 점이다. 한 세기를 훌쩍 넘어 결실을 맺은 상수도 사업을 두고두고 기리기 위하여 당대의 페르난도 프리모 리베라 제독은 카리에도 제독의 이름을 딴 카리에도 분수를 세웠다. 그리고 지하 저수지에서 카리에도 분수를 연결하여 반영구적으로 물이 솟아나도록 하였다.
엘 데파시토 저수지에는 보다 많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필리핀 독립 전쟁의 서전지로 기록이 되어 있는가 하면, 미군과 일본군이 무기고로 활용하여 그와 관련된 흔적들이 남아있기도 하다. 이후 결핵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한 시설로 이용이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이후에 다뤄볼 예정이다.)
또한 저수지가 위치한 산 후안은 세례자 요한의 이름을 따 명명한 곳이며, 해마다 요한의 축일을 기리고자 바사안이라는 물의 축제를 연다. 흡사 태국이 송크란과 유사한 광경이 펼쳐지는 이 기간 동안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서로에게 물을 끼얹으며 물을 축제를 즐긴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에게 물로써 세례를 베푼 일을 기억함이 종교적 이유라고 한다면, 물의 풍요는 이들이 이렇게 물을 한껏 낭비하며 축제를 즐길 수 있는 여유를 부여한 게 아닐까.
특이하게도 대게의 성인들은 죽음에 이른 날을 축일로 삼는 반면 세례자 요한은 그 생일을 축일로 삼고 있다. 요한의 이름을 딴 산후안에서 정화를 겪고 새로이 태어나는 물의 세례를 몸소 겪는 일로 사람들은 영도로 접어드는 경험을 재현한다. 마치 예수가 그러하였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