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숲에서 영화 읽기 - <조커>
2019년 상영된 <조커>는 포스터부터 불편합니다. 보시다시피 기괴한 광대 분장과 붉은색 슈트, 초록색 머리칼은 누추한 도시의 불안한 빛과 뒤섞여 음산한 기운을 내뿜고 있습니다. 물론 배트맨 시리즈를 즐겨본 이들은 영화 상영을 반겼습니다. DC 캐릭터 빌런 중 하나인 ‘조커'의 서사가 어떻게 펼쳐질지 자못 궁금했을 테니까요. 영화는 그에 어느 정도 답하면서도 슈퍼맨이나 배트맨 같은 슈퍼히어로를 등장시키지 않았습니다. 대신 ‘아서 플렉’의 숨이 멎을 듯한 메마른 웃음을 영화 한가운데에 놓았습니다. 웃음을 참지 못하는 병'(PBA, Pseudobulbar affect)을 앓고 있는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의 고통스럽고 남루한 삶은 관객들을 화면 깊숙이 이끌고 들어갔습니다.
<조커>가 고전이 될 것이라는 누군가의 예상은 과장으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 예상은 ‘호아킨 피닉스'의 기괴함 뒤에 자리한 깊은 우울감, 고독, 그리고 절망을 드러내는 압도적 연기에 기인했습니다. 그가 <글래디에이터>(2000)에서 막시무스 장군에 대한 열등감으로 초조한 눈빛 가득한, 젊은 로마 황제 '코모두스'를 연기했던 배우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배우의 변모가 놀랍기만 했습니다.
‘행복한 얼굴(happy face)'과 기괴함이 공존하는 어둠의 도시인 고담시, 마치 우리가 거주하는 현실의 도시와 같은 공간은 섬뜩한 조커의 가면으로 뒤덮입니다. <배트맨-다크나이트>의 히스 레저가 연기한 '조커'보다 소름 끼치는 이유는 ‘아서 플렉'을 둘러싼 세계의 잔혹함 때문이죠.
'아서'가 마주한 세계는 그에게 폭력적이고 '무례'하기만 합니다. ‘아서‘에게 구원의 길은 없었습니다. 뇌손상에서 기인한 그의 병적 웃음이 터져 나오는 순간 그는 자신이 딛고 선 세계로부터 점점 밀려나고 맙니다. 그저 경멸과 비난의 대상으로 전락할 뿐이었습니다. 분노가 극대화되면서 ‘아서’는 야만의 세계로의 이주를 준비하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의 현실에서도 사회적 약자들을 벼랑 끝으로 밀어내는 폭력을 목격하곤 합니다. 공감능력은 사라지고 자신이 갖고 있는 힘을 크든 작든 난폭하게 휘두르는 현실은 영화 속 세계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 폭력의 깊숙한 자리에는 ‘인간에 대한 무례‘가 들어있습니다. ‘아서’는 지하철에서 자신을 구타하는 상류층 사람들을, 어린 시절 뇌손상을 방치한 어머니를, 총을 건네 자신을 해고에 이르게 한 동료를, 그리고 TV쇼에서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든 코미디언 머레이를 무례한 자로 단정합니다.
'아서'는 ‘사람이 사람한테 어떻게 그렇게 무례할 수 있느냐?‘며 고통스럽게 항변합니다. ‘인간에 대한 무례'가 수시로 자행되고, 그로 인해 인간의 영혼이 어떻게 황폐화되는지 우리는 종종 목격하게 됩니다. 또 그 영혼들이 방치되면서 비극으로 끝나는 결말을 무력하게 바라볼 뿐입니다. ‘아서 플렉'은 무례한 세계로부터 받은 상처에 대해 극한의 분노로 대응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세계로부터 추방돼 야만의 세계로 옮겨온 ‘아서’는 자신만의 춤을 추기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