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숲에서 영화 읽기 - <더 웨일>
영화 <더 웨일>은 조금 불편합니다. 침침한 실내, 거구의 남자, 게이 포르노와 수음,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듯한 이의 거친 호흡으로 시작하니까요. 불편하고 낯섦을 지나고 나면 '찰리'(브랜든 프레이저 역)의 깊은 눈빛을 만나게 됩니다. 진정을 찾은 '찰리'의 눈빛은 화면 가득히 채워지고, 따뜻하면서도 슬픈 빛은 깊이를 더합니다. 그 눈빛에는 잃어버린 사랑으로 인한 절망, 평화로운 일상의 소중한 기억, 그리고 마지막 희망인 '엘리'(찰리의 딸)대한 찬란한 기대 등이 담깁니다. 그 눈빛의 배우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합니다.
이 영화의 중심에는 찰리의 피폐한 삶이 있습니다. 그는 보행조차 자유롭지 못할 정도로 초고도비만 상태입니다. 찰리의 폭식은 그를 세상으로부터 고립시킵니다. 그 고립은 사랑의 상실에서 기인합니다. 스스로 선택한 은둔, 대학교수 찰리는 동성제자 앨런과 사랑에 빠집니다. 그들은 아름다운 숲길을 걷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사랑을 나눕니다. 복음주의 목사의 아들 앨런, 이미 가정을 이루고 딸 엘리가 있는 찰리, 그들의 사랑은 평탄할 수 없습니다. 현실과의 대립에서 그들의 사랑은 철저히 부정되고 맙니다. 이어진 앨런의 거식증과 극단적 선택으로 그들의 사랑은 끝나고 맙니다. 살아남은 찰리는 사랑하는 대상의 부재를 확인하면서 앨런과 반대로 폭식에 빠지며, 초고도 비만으로 스스로를 어두운 공간에 유폐시킵니다. 그것은 세상과 절연할 수밖에 없는 찰리의 불가피한 선택이었습니다.
찰리의 은둔을 보면서 '망각'의 기능에 대한 롤랑 바르트의 언어가 떠오릅니다. 사랑을 잃고 살아가려면 망각이 기능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망각이 내내 기능하지 못하면 부재하는 사랑으로 인한 고통은 지속됩니다. 앨런이 사라지고 이제 더 이상 찰리에게 사랑하는 대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를 잊지 못한 상태에서 앨런은 여전히 그에게 말을 걸어오는 존재로 남아 있습니다. 바르트는 이런 역설로 표현합니다.
'당신은 떠났고, 또 당신은 여기에 남아 있다'
앨런은 사랑의 대상이라는 지위를 상실한 채 사라지고 없지만, 여전히 찰리에게는 남아 있는 존재입니다. 끊임없이 찰리의 기억 속에 살아서 기억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흡니다. 죽은 앨런은 살아 있는 찰리의 이야기를 듣고, 또 찰리에게 속삭이고 있습니다.
'망각'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망각은 사랑의 부재에 맞서는 유일한 길입니다. 사랑을 잃고 절망하는 이가 그 사랑을 망각하지 못하면 살아갈 길을 잃고 맙니다. 찰리는 앨런의 부재를 망각하지 못한 채 자신을 망가뜨리고 익사 직전까지의 상황으로 자신을 몰고 갑니다. 찰리의 폭식, 그로 인한 비만은 사랑의 부재를 망각하지 못한 찰리가 스스로를 파괴하고자 하는 시도입니다. 마지막으로 맞는 월요일, 삶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음을 직감한 그는 자신의 은둔을 끝내는 길을 8살 때 버린 딸 엘리에게서 찾게 됩니다.
"고래 묘사만 잔뜩 있는 챕터들이 유독 슬펐다. 자신의 넋두리에 지친 독자들을 위한 배려인 걸 아니까"가 찰리의 독백으로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문학 교수 찰리는 자신의 딸 엘리가 중2 때 쓴 <모비딕> 에세이를 극찬합니다. 찰리는 마지막 순간 엘리에게 그 에세이를 읽어줄 것을 간청하고, 엘리의 낭독을 들으며 마지막 발걸음을 뗍니다. 영화 내내 등장하는 종교적 구원은 아니지만 찰리의 마지막 발걸음은 자신이 가야 할 방향으로 향합니다. 절망의 터널을 지나 삶의 마지막에 다다른 이가 남겨질 이들에게 전하는, '사람은 타인에게 무관심할 수 없다'거나 '사람은 놀라운 존재'라는 말은 인간에 대한 깊은 존중으로 받아들여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