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을 대하는 자세

온전한 이별을 고하는 방법

by 오월

"할머니가 오늘, 내일 하신다..."


할머니는 내게 크게 의미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아, 어떤 면으로는 나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기는 했다.

할머니는 나의 어린 시절의 어두운 이면이었다.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기. 나는 누구와도 친하게 지내는 활발한 아이였다.

선생님들의 평가는 언제나 교우관계가 좋았던 아이로 기록되어 있었고 자리배치를 할 때에도 수업에 집중 못하는 산만한 친구들, 혹은 매번 친구들과 다투는 아이를 짝으로 붙여두었다.

그런 아이들과 짝이 되어도 싸우지 않고 함께 잘 지낸 탓이었으리라.


지금은 상상도 못 할 모습이지만, 나는 전학생이 오면 항상 신나서 먼저 말을 건넸다.

새로운 친구가 생겼다는 즐거움도 있었지만 한편으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친구가 어색하게 겉도는 모습을 보기 힘겨워했던 것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것도 내 위선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소풍 갈 때에도 나 이외 친해진 친구가 없던 전학생 친구가 안타까워 먼저 짝꿍이 되기로 했던 친구에게 이번만 다른 친구와 함께 할 수 있겠냐고 했을 때에는 상대 친구와 크게 다투기도 했었다.

(나의 오지랖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 내 잘못이 맞긴 하다.)


학교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같이 놀고 싶은 친구였고 어떠한 장난도 어지간하면 받아주는 친구였다.

크게 화내는 법도 없었고 겉도는 친구가 있다면 먼저 다가가 함께해 주는 친구기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집에서 사랑받지 못한 것을 밖에서 채우려고 했던 나의 결핍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우리 집은 6명, 대가족이었다.

조부모님과 부모님, 그리고 나와 남동생.

아빠는 작업 때문에 1년에 2~3번 정도 볼까 말까였고 엄마 혼자서 5인 식구를 챙기기 바빴다.


할머니는 남아선호사상이 가득했다.

물론 할머니가 나를 지독히 미워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도 어느 정도는 사랑하셨겠지.

하지만 할머니의 사랑은 남동생이 독차지했고 동생은 그 사랑을 당연하게 여기며, 본인의 필요에 따라 이용하곤 했다.


동생은 경쟁심이 너무 심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함께 게임을 하다가도 본인이 패하는 상황이면 짜증을 내고 울면서 판을 엎었다.

나와 동생은 4살 터울로 약간의 나이텀이 있는 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누나가 동생 봐주고 넘어갈 수 있지_ 하겠지만 그때는 나도 너무나 어렸다.

본인 뜻대로 되지 않으면 성질부리며 울기 시작했고 그 소리가 방문을 넘어 할머니 귀로 들어가면 온전히 혼나는 것은 나의 몫이었다.

"할머니, 내가 그런 게 아니라....!"

내 말은 매번 끝을 맺지 못하고 끝이 났다.

할머니는 내 말을 듣지 않고 '우리 손주, 누가 울렸어?'하기 바빴고 타박은 고스란히 나에게 돌아왔다.

억울함에 할머니는 왜 매번 나한테만 뭐라 하냐고 소리를 지르며 창고 방에 들어가 울다 지쳐 잠이 들었다.

어둡고 눅눅한, 온갖 잡동사니가 가득한 그 창고 방은 내가 소리 내어 울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할머니의 말은 정말 가벼웠다. 일의 파장은 생각지 않았고 그저 본인 감정을 있는 대로 풀어내는 사람이었다. 아빠는 할머니의 말만 듣고 엄마에게 잘못을 했다며 타박했고 여러 오해들이 쌓이고 쌓여 결국 이혼을 하게 되었다.

할머니는 나에게도, 엄마에게도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할머니가 돌아가실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도 내 입에서는 냉소적인 말이 터져 나왔다.


"참~ 할머니는 속 편하게 사니까 오래도 사셨네"
"그래도 마지막 가시는 길이니까 날 잡아서 다녀오자"

엄마는 마지막 가시는 길 편히 가시라고 얼굴 한 번 뵙고 오는 게 도리라며 일정 조율을 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끝까지 이기적 이게도 뵈러 가려고 했던 날. 딱 하루를 참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너희 할머니는 끝까지 사람 맘 불편하게 한다.."

막상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니 엄마가 장례식장에 방문하는 건 모양새가 웃기다며 나와 동생만 다녀오라고 했다.


막상 고향에 도착하고 나니, 알러지 반응이 일어나는 것처럼 온통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 투성이었다.

13년 전 할아버지 장례 이후 처음 만나는 친척 동생의 마중, 얼굴 몇 번 본 적 없는 고모와 고모부, 상복을 입고 있는 아빠의 새 부인, 그리고 아주머니의 아들들. 그리고 아빠의 직장 동료들.

모든 것들이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들이었다. 심지어 아주머니와 크게 싸운 이후 처음 만나는 부분이라 어색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식사를 하고는 있지만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 알 턱이 없었다.

할머니의 영정사진에는 내가 모르는 사람이 존재했다.

13년이란 시간, 나는 자연스럽게 자라났다. 키도 자랐고, 생각과 말투도 나이에 맞춰 서서히 자라났다. 나의 변화는 서서히 이루어졌다. 어색할 것이라고는 없었다.

하지만 할머니에게는 아니었나 보다.

내 기억 속의 할머니는 덩치가 있으셨고 동글동글했다. 맘고생 해본 적 없는 사람처럼 그 연세에도 피부가 버석한 것 없이 좋았다.

사진 속 할머니는 웃음기라고는 존재하지 않았고 말랐다. 할머니의 턱이 저렇게 뾰족했었나.


할머니가 조만간 돌아가실지 모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그동안 마음속에 품어뒀던 원망을 살펴보았다.

내가 서비스직에 종사했음에도 어르신들의 말에 왜 그리 뾰족했었나, 그냥 고개 한 번 숙일 수 있는데 왜 부당함을 참을 수 없었나, 그 모든 것들에는 할머니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창고 방에서 소리 내어 울던 어린 시절의 내가 있었다.


그때 때마침 내가 좋아하는 유튜버 '드로우앤드류'님의 채널에서 나의 상황과 딱 맞는 영상 하나가 업로드되었다.

드로우앤드류 < 죽음이 두려우신가요? >


우리는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애도는 어떻게 하는 것인가?


영상을 시청하고, 엄마의 '마지막 도리'를 듣고 생각에 잠겼다.

나도 장례식에 가면 이 마음을 고이 접어 함께 보내야겠다. 염 할 때 함께 보내야겠다 마음먹었다.

할머니에 대한 원망이 컸기에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 공간이 주는 무게감과 함께 느껴지는 상실감은 무어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내 기억 속의 할머니와 다르게 눈을 감고 누워있는 할머니는 정말, 너무나 작았다.


이별이란 우리에게 여러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죽음으로 이별인지, 아니면 개인의 성향에 따른 이별인지.

아무튼 이별이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가 상당히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죽음으로써 이별도, 아니면 다른 형태의 이별들도 '잘' 보내주는 작업이 상대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필요한 작업이라는 걸 느꼈다.

온전히 보내주고 가슴에 묻는 일.


처음 왕따를 경험하고 그때의 사건들은 나를 아프게 하는 것들이었다.

타인에게 아무렇지 않게 말하기까지 수년이 걸렸고 이따금 그때의 기억들이 나를 헤집어놓기도 한다.

혼자서 무언가를 해나가기 위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작업 중 하나가 바로 이별이 아닐까 싶었다.

막연히 해묵은 감정들을 해소하기 위해 기억을 꽁꽁 감추는 게 아니라 차라리 딱 한번 마주 보자.

그 힘들었던 시간을 마주 보고 내가 느꼈던 모든 감정들을 토해낸다. 좋았던 일도, 슬펐던 일도, 힘들었던 일도,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유치한 것이라도 다 토해낸다.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열린 이별도,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꽉 닫힌 이별도.

나는 그때와는 다르고, 이만큼 성장했다고.

이제는 그 시절을 웃어넘길 수 있을 만큼 강해졌고, 앞으로도 더 나아질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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