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에 빠진 생쥐꼴 여행
나는 날씨요정이다.
랜덤으로 배정되는 여름휴가도 번번이 앞뒤로 폭우가 쏟아졌지만, 휴가가 시작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맑은 하늘이 반겨주었다. 운이 좋게도 여행을 할 때마다 맑은 날씨에 편히 다닐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여름휴가는 달랐다. 장마? 약한 비 한 번 내리고 매일같이 30도를 훌쩍 넘기는 날씨가 지속되었다. 어쩜 7월은 비만 내리던 달이 아니었나? 이번 여름은 이상하리만치 비가 내리지 않았다.
우리 가까운 남원 가자
휴가라고 한다면, 평소 당일치기로 방문하기 어려운 먼 지역으로 다녀왔는데 짝꿍의 제안으로 가까운 남원을 여행지로 골랐다. 아쉬운 맘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딱히 관광지로 가볼 만한 곳이 뭐가 있나 고민을 거듭했지만 마땅히 구경할 만한 곳이 없어 숙소를 좋은 곳으로 잡고 여유롭게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약속 시간에 늦은 짝꿍을 홀로 카페에서 기다리던 중, 무언가 번쩍 거리는 게 느껴졌다.
밖이 보이지 않는 코너였지만 거세게 몰아치는 비바람 소리를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분명 카페에 방문할 때까지만 해도 나는 우산을 편 적이 없는데 입구에 두었던 우산은 이미 몰아치는 비바람에 척척하게 젖어있었다.
광주에 호우주의보가 내려졌다. 근방 지역들도 호우주의보가 내려졌고 급하게 남원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광주보다는 심하지 않음에 안심하고 여행길에 올랐다.
지금껏 내리지 않던 비는 야속하게도 여행을 가기로 한 주차에 내렸다. 그것도 재난 문자를 동반한...
안전문자 알림을 꺼놓은 내 휴대폰은 딱히 울릴 일이 없던 내 휴대폰에서 엄청난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남원도 침수를 주의하라는 알람이 울려댔다.
남원에 도착하고 식당까지 걸어가는 30분이 끔찍하게 길게만 느껴졌다.
젖을 것을 감안하고 쪼리를 신고 왔건만, 한 걸음을 떼기가 무섭게 청바지가 젖어들어갔다. 겨우 우산 하나로 비를 피할 수는 없었다. 모든 것이 홀딱 젖었다. 난 분명 우산을 썼는데..
그나마 맨발로 쪼리라도 신어서 덜했지, 짝꿍은 이 날씨에 운동화를 신고 와서 물웅덩이를 마주칠 때마다 입을 삐죽였다.
이런 재난 상황에 여행이라니, 어이가 없어 황당함에 웃음이 비집고 새어 나왔다.
"허, 나 이런 날씨에 여행 처음 해 봐"
힘겹게 찾아간 식당이 하필 좌식이라 숙소 주변을 돌고 돌았다. 맛집이고 뭐고, 이제는 추위에 언 몸을 녹일 공간이 필요했다.
하필 시간도 2시를 넘어가기 시작해 우리를 받아주는 식당을 찾아 헤맸다.
뜨끈한 국물로 몸을 녹이고 싶었다.
"사장님, 혹시 지금 식사 가능할까요?"
다행히도 식사가 가능하다는 말에 매장으로 들어가 쌀국수를 주문했다.
의자에 걸터앉아 바지 밑단을 쭉 잡자 물을 흠뻑 뱉어낸다. 이런 날씨에 우리 열심히도 걸었구나.
쌀국수는 흡사 우동 같았다. 나 두꺼운 면발 안 좋아하는데... 춥고 배고픈데 뭘 얼마나 가리겠는가. 국물 한 스푼 떠서 입에 넣으니 생각보다 맛있었다. 지친 몸을 움직이며 바닥까지 싹싹 긁어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숙소로 이동했다.
"그래도 배 채웠다고 힘이 난다"
"그러게. 쌀국수 생각보다 엄청 맛있었어"
의도치 않게 우리만의 맛집을 찾아낸 기분이었다. 쌀국수가 이 정도라면 다른 메뉴도 분명 맛있을 것이다.
숙소 체크인 시간에 맞춰 도착해 들어서자, 따뜻한 온돌바닥이 우리를 반겼다. 비록 예쁜 숙소에서 사진을 남기고 싶다는 계획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여독을 풀기엔 너무나 좋은 공간이었다.
야외 자쿠지도 거센 비바람에 즐길 수 없었지만, 우리에겐 실내 자쿠지가 남아있었다.
나름 발 동동거리며 물놀이를 즐겼더니 한껏 웅크려졌던 몸이 풀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런데, 생각보다 이런 날 휴가가 좋은 건지도 몰라."
"왜?"
"광주 지금 침수되고 난리 났잖아. 지하철도 싹 잠기고 다음날 출근 생각하면 오히려 이 상황이 좋을 수 있어"
음. 생각해 보니 그렇네.
지인들이 광주 침수 소식을 듣고 괜찮냐며 연락을 보내왔다.
개중에 우리 집 코앞도 있었다. 역시, 여기는 또 침수가 되었구나. 홀딱 젖고 고생한 여행길이 오히려 추억거리가 되었다.
축축하게 젖은 옷가지들은 온돌 바닥에 하루 종일 펼쳐두니 저녁에 다 말랐다. 바닥은 따뜻하게, 공기는 시원하게.
오히려 숙소에서의 시간을 소중히 여길 수 있어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편의점에서 주류와 간식거리를 사 와서 여유롭게 먹으며 넷플릭스를 시청했다.
한숨 자고 일어나니 언제 비가 왔냐는 듯, 다음날 맑게 갠 날씨가 나를 반겼다.
신나게 야외 공간에서 멍 때리며 시간을 보내다가 체크아웃 시간에 아슬아슬 정리를 끝마쳤지만 말이다.
언제 또 이렇게 물에 빠진 생쥐꼴로 꼬질한 여행을 해보겠는가.
"다음에 여기 또 오자. 그때는 겨울에 와서 야외 자쿠지를 온천처럼 즐겨보는 거야, 어때?"
"좋아, 그러자. 그리고 다음엔 쌀국숫집 가서 양꼬치도 먹어보자. 맛있을 것 같아"
역시 여행은 상황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내가 그리도 싫어했던 폭우 속의 여행이었지만 이 또한 추억으로 만들어줄 수 있는 사람과의 여행이라 즐거운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