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떤 향을 남기고 있는가
화장품을 만들다 보면, 필연적으로 향을 자주 접하게 되지.
비록 내가 조향사는 아니지만 은근히 향을 즐기게 되면서 '조향사'라는 직업에 대한 환상을 가지게 되곤 해.
(뭐 사실 어떤 직업이든 잘 모르는 사람이 밖에서 보면 그럴듯하게 멋져 보이지만 사람 사는 세상, 회사 조직 생활은 다 거진 비슷비슷 하단 걸 알면서도 다른 직업/업종에 대한 호기심은 어쩔 수 없나 봐.)
향기가 내 일상 속 행동에 스리슬쩍 끼어들 때가 있어.
카페 앞을 지나가다 커피의 잔향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커피 생각에 대기줄에 서 있다거나,
세탁한 옷에서 미미하게 느껴지는 코튼 향이 아침을 산뜻하게 만들기도 하지.
딱히 향수를 자주 뿌리는 성격은 아니지만,
왠지 중요한 미팅이 있는 날이면
선물로 받아서 아껴 쓰고 있는 향수를 목 언저리와 손목에 비벼보고
'오늘 파이팅해서 좋은 결과 만들어보자'라며 자기 암시를 걸기도 해.
나를 스쳐 지나간 누군가의 향수 냄새 또는 샴푸 향에 '무슨 향이지?'라는 의문이 생긴다거나,
어디선가 맡아본 듯한 향기에 기억 속 어느 장소, 어떤 사람을 떠올리기도 하지.
다이어트할 때, 가장 힘든 건 음식의 향만 맡아도 그 맛을 기억하는 내 몸이
[내일부터 다이어트]를 속삭이며 유혹하는 걸 참기란 너무 힘들어.
이처럼
향은 인체의 오감 중에서 후각을 통해 뇌를 자극해서
기억을 소환하거나 호기심을 일으키거나 행동을 유발하게 하는
강력한 유혹이고 무의식적으로 몸이 반응하게 만드는 마법과도 같아.
뭐 화장품쟁이라서 특정 향이나 어떤 브랜드를 홍보/광고를 시작하려나 보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일세~(이럴 때 경기도 오산? 이럼 아재 개그 인증!)
내가 향에 대한 지식/정보를 나열할 정도의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향에 관한 어떤 브랜드나 제품을 취급하는 것도 아니고...
이 공간은 그런 공간도 아니고 말이야~~
나는 오늘 내가 남기고 있는 잔향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해.
사업을 하면서 만나왔고, 만나고 있는 사람들이 맡아줬으면 하는 나라는 사람에 대한 잔향에 대해서 말이야.
좀 고딕 하게 표현하자면, 향은 기체로 분산된 분자들의 격렬한 운동이라고 볼 수 있어.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이나 만난 사람들에게
나라는 존재를 알게 모르게 부분적으로 각인되고,
그 만남들이 반복되고 깊어질수록 퍼즐이 맞춰지듯
나라는 사람에 대한 전체를 어렴풋이 가늠하게 만들어주지
분자라는 것은 결국 본체에서 떨어져 나온 파편이야.
그것이 공기 중으로 떠다니다가 코 안에 들어와서 화학적 결합을 통해
신경 시냅스에 전자적 신호를 전환되어 뇌에 이미지와 기억을 인지하게 되는 거지.
그런 면에서 보면,
사람의 잔향을 남기는 것이란
자신의 일부분을 상대방에게 각인시키는 과정이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 같아.
내가 하는 말과 행동부터 에티켓이라던가
습관, 성격이나 직업, 옷차림새나 생김새
심지어 정치색이나 종교, 이념, 사상, 장단점까지
나의 부분들이 [당신]이라는 사람에게 배여 들어 나를 떠올리게 하지.
서울에서 미팅이 있어 찾아가면
지인들은 으레 오는데 고생이 많았다고, 길은 막히지 않았냐고 인사를 해.
그들은 나를 보면서,
춘천이나 파주를 떠올리기 때문이지.
내가 주로 활동/거주하는 지역을 알고 있어서 그래.
또한 약속 장소를 정할 때도,
주로 조용한 카페를 선호해.
식사를 하러 갈 때도,
뼈다귀 해장국이나 국밥집 또는 고추장찌개랑 제육볶음이 맛있는 집을 찾아가지.
꼭 나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내 성향이 어떻다는 걸 어렴풋이 알기에 조금은 영향을 주었다고 봐.
그리고 만남 중에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오고 가는데,
우리가 만났던 때의 이야기,
함께 경험했던 과거를 소환하거나
앞으로 마주하게 될 미래에 대한 상상까지
수다의 주제는 무한하게 뻗어나가지.
그러고 나면 나는 그들과 시간과 공간을 함께 공유한 사이가 되는 거야.
그것이 잔향처럼 남아
나라는 존재뿐만 아니라
그 배경으로 보이는 공간과 함께 나눈 시간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거야.
개인적인 종교관은 불교와 전혀 무관하지만,
사찰에서 자주 보았던 내가 좋아하는 문구가 있어.
"맑고, 향기롭게"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불안함을 느껴.
사람의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는 없다지만,
상대방의 언행을 통해서 어렴풋이 느낄 수는 있어.
적어도 내가 상대방에 대하여 느끼는 것이
어두워서 보이지 않는 흑심인지,
맑게, 투명하게, 자신 있게 느껴지는 건지가
상대방에 대한 호기심을 좌우하잖아.
사람의 잔향에도 악취가 있고, 향기가 있어.
입이 거친 걸 넘어 항상 비속어와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을 가까이하기엔 곤욕스럽지.
그리고 이런저런 분란과 문제의 중심에 항상 서 있는 사람은 만나기 굉장히 부담스러워.
더티하거나 고약한 악취를 풍기는 사람을 만나면
그 냄새가 자신에게도 배일까 봐 멀리하게 되잖아.
우리의 잔향은 맑고, 향기로워야 해.
만날 때마다, 즐겁고 힘이 나고, 기분이 좋은 사람들이 있어.
어딜 가나 환영받고, 만나고 싶은 그런 사람들 말이야.
사람과의 관계에서 진솔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내가 닮고 싶은, 나도 그와 같은 사람이 되고 픈 마음이 들 정도의 매력이 있어야 해.
살다 보니 이러한 이상적인 생각과는 달리,
사기꾼들이나 속이려고 접근하는 사람들이 있어.
그리고 믿었다가 배신을 당하기도 하고,
내가 잘못 오해하기도 하는 경우도 생기지.
어쩌면 요즘 시대에 이렇게 사람 사는 향을 기대한다는 것이
바보스럽기도 하고, 현실감각이 떨어진다고 핀잔받을 수도 있을 거야.
'더 당해봐야 정신 차릴래', '니가 아직 쓴 맛을 덜 봤구나'라고 말이야.
그런데 말이야.
이런 기대와 상상조차 없다면...
정말 세상은 삭막하다 못해 잔인한 거 아닐까?
지극히 개인적으로
근거 없이, 이유 없이...
뜬구름 잡는 이야기인 거 아는데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사람 향기가 잔향으로 넘쳐나는 세상을 꿈꿔본다.
- 이 글을 작성하던 2020년 6월에... 우리 거래처에 지불 미이행으로 민사 소송을 냈던 시점이야. 그리고 또 지난해에 계약했던 마케팅 업체의 계약 미이행으로 환불 요청을 했던 건으로 티격태격하고 있어.
처음과 다른 태도의 상대방을 겪으면서 참 많은 실망과 우리 직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가득해. 물론 코로나라는 예상치 못한 이슈에 거래처 입장에서 지불/환불 능력이 안되고, 상황이 안 좋다는 것은 알기에 최대한 이해하려고 했지만... 점차 상대방이 전화를 피하고, 연락이 안 되어 안절부절못하는 게 나라는 사실에 화가 나기도 했어. 그나마 연결이 간신히 되었을 때, 오히려 '그래서 어쩌라고요'라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끝까지 믿고 싶었어.
우리가 잘못한 게 없는데, 우리가 피해를 감수하고 있으면서도 가슴을 졸이는 게 우리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짜증도 났지. 그러다 민사 소송을 거니까 그제야 상대방 쪽에서 연락을 하더라고. 왜 끝까지 믿어주지 않냐고, 꼭 이렇게 해야겠냐고, 좀만 더 기다려달라고, 알아서 처리해 줄 수 있었는데 왜 일을 복잡하게 만드냐고...
그래. 나도 그럴 수 있었어. 하지만 그러지 않았던 이유는 괘씸했기 때문이야. 하다 못해 먼저 전화 주며 상황을 설명해주거나 이해를 구했다면 다시 생각했겠지. 오히려 목소리 높이고, 할 테면 해봐라란 식으로 나오지 않았다면 나도 굳이 법적인 해결을 진행하지 않았을 거야. 이제는 승소 판결이 나왔고, 강제 집행을 준비하고 있어.
때로는 사람의 잔향이라는 것이 은은하지만 않다는 것을...
강하게 남아 코끝을 자극할 수도 있다는 것을 직접 깨닫게 되었네.
마상을 입어서 속이 쓰리지만, 어물쩍 넘어가지 않도록 잘 마무리하겠습니다.
이렇게 또 경험치 +2가 되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