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심사'라는 걸 당하게 되는데...
가끔 심사위원으로 제안받곤 해. 유명하거나 잘 나가서 그런 건 아니니까 오해는 하지 마. 단지, 그동안 우리를 도와주셨던 여러 고마운 분들께서 창업자의 입장에서 경험한 고충과 어려움, 문제점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거침없이 하는 내 오지랖 능력이 필요해서 부른 거고, 내 입장에서는 그간 감사한 일들에 대한 은혜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수락한 경우들이 있어.
솔직하게 까고 말해서는 심사위원이라는 자리에 처음에는 경험해 보고 싶기도 했고, 심사료도 받아서 용돈을 마련하고자 하는 점이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도 부인 못 하겠어. 그렇지만 거절한 경우가 더 많아. 본업이 바쁜 것도 있지만... 약간은 내 고질적인 개똥철학이 있기 때문이지. 그 이야기를 나누고자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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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참 많은 자리에서 알게 모르게 평가를 받고 있어. 학창 시절 때는 수능 점수로, 교내 성적표로, 생활기록부로 일상이 평가되었고 취업할 때는 스펙과 학교, 심한 곳은 가족사항에 전세인지 자가인지 아버지, 어머니 뭐하시는지를 기입한 이력서와 소설 같아야 하던 자소서를 면접관이 훑어봤지. 취업을 하고 나서도 평가는 계속되지. 회사에게 직장상사를 통해 인사고과, 성과평가, 업무실적에 의하여 '나'라는 존재가치를 증명해야 했지.
그리고 창업하면서 작게는 공모전에서부터 R&D 과제, 투자유치를 위한 IR 발표, 사무공간 연장, 영업, 인허가, 융자, 기술평가 등 정말 많은 평가와 심사를 받는 일을 경험하게 되지. 일주일에 세 번이나 심사를 받는 경우도 있었어.
경쟁이라는 틀에서는 결국 우열을 가릴 수밖에 없기에 심사하고, 평가하는 과정이 있을 수밖에 없어. 그리고 그것 자체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 오히려 공정한 심사, 형평성과 제3자 입장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인사이트와 조언들은 진심으로 중요하고 필요하다고.
그만큼 심사받는 입장에서도 더 준비를 하게 되고, 더 다듬게 되고, 더 보완하고, 더 치열하게 되기에 전체적으로는 성장하고 발전하는 기회가 되잖아.
하지만 과연 심사위원들은 그만큼 준비되어 있을까?
엊그제는 누군가를 심사하는 자리였고,
어제는 다른 누군가에게 심사받는 자리에 있었고,
오늘은 일상적인 회사일을 하고 있지.
세상은 재미있게도 넓으면서 좁다는 거야.
얼마 전 내가 심사한 곳들 중 몇 곳은 아는 곳이더라. 잘 알기에 심사가 쉽더라고.
어떻게 잘 아냐면, 평판도 들은 바 있고, 그곳들과 협력했던 대표들도 알고, 나도 한 때는 그들 앞에 섰었거든(그래! 창업자들이라면 얼핏 들어봤을 만한 곳들을 만났어) 그래서 그들이 제출한 발표자료들을 보면서 헛웃음이 나오더라고. 여기저기서 덕지덕지 복붙 한 내용, 불리한 부분은 살짝 덮어버린 내용...(뜨끔한 곳도 있을 거야.)
할 말이 많은데... 내가 그들 앞에서 심사받았던 때에 이런저런 지적질 했던 기준으로 그들을 보면, '표리부동'이란 사자성어가 떠올라. 그대들은 그렇지 못하면서 상대방에게는 그러라고 하는 건 부조리 아닌가? 뭐 어쨌든 그래도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하니까 동일한 기준에서 심사를 하면서 느낀 건...
'아무리 잘 준비하고, 괜찮은 회사도 심사대상이 되면 긴장하는구나' 라는 것과 자료에 비해 발표에서 어눌하게 제대로 표현 못하는 경우도 있고, 자료에 비해서 말빨로 넘어가려는 케이스들도 있더라고. 그게 심사 자리에서 보면 느껴져.
여기서 미리 결론을 스포 하자면,
난다 긴다 하는 곳들도 허점들이 있는 게 당연한 거야. IR peach Deck을 살펴봐봐. 5분 또는 10분 내에 모든 걸 다 표현하고 설명하는 게 쉽지는 않은 일이야. 분명 가볍게 넘어갈 부분도 생기고, 설명이 미흡한 부분도 생겨. 그러니 너무 결벽스럽게 완벽함을 보이려 하기보다는 조금은 마음을 풀고 발표해.
부족한 건 Q&A 타임에 부연 설명하면 되는 거고, 심사위원들이 잘 알아주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게 잘못된 사업이라는 뜻은 아냐. 어쩌면 기교나 퍼포먼스에서 부족한 것이 진심과 본질을 가려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할 경우도 있어. 그건 네 잘못이라기보다는 그런 것에 현혹되거나 본질을 바라보지 못하는 심사위원의 무능함이니까 어디서, 어떤 곳에서 발표 피칭을 제대로 못 했다고 너무 자책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심사받을 때는 떨리는 입장에서 평가받는 느낌이 새롭더라. 투자부터, R&D, 공모전, 유통/영업 관련 발표에 좀 익숙해졌다 했는데, 얼마 전에 심사위원이었다 보니 나의 발표자료와 발표 자세에 대해서 다시 돌아보게 되더라고.
다시 말하지만, 참 재미있지 않니?
내가 심사위원 제안을 거절하는 대부분의 상황은 '내가 준비 안 되었기' 때문이야.
창업자의 입장에서 정부기관의 프로그램이나 투자/교육 기관을 평가하는 심사 요청은 마음 편하게 참여하지. 우리 시각으로 그들을 보고, 평가하는 건 꽤 쉬운 일이야. 왜냐면 그들이 우리를 알 듯이 우리도 그들 하고 있는 사업내용들을 알고, 경험해 봤기에 허와 실을 잘 파악하고 있거든.
내가 거절하는 대부분의 심사위원 자리는 '창업자'로써 '창업자'를 평가하는 자리야. 취지는 좋다고 생각해. 아무래도 창업을 경험한 당사자가 더 그 현실을 잘 알기에 한 두 명 정도는 선배(?) 창업자가 심사를 하는 게 더 평가를 하기 적절하지 않냐는 거지.
맞아! 교수님들이나 기관 관계자나 전문 심사위원이라는 분들이 기술이나 여러 평가지표들에서 자신들의 전문성 기준으로 살펴보는 반면에, 먼저 그 길을 걸었던 창업자의 시각에서 바라본 '심사받는 창업자'는 또 다른 시각에서의 평가와 통찰이 가능하지.
그리고 다양한 심사위원의 시각이 반영된 평가일수록 더 보편적으로 인정받을 결과를 도출할 수 있어.
사실 선정된 심사위원은 관리감독자로부터 통제/제한받게 되지. 심사 자리에 자세히 보면 한쪽 구석에는 어떤 사람이 심사위원들을 유심히 보고 있는 사람이 있을 거야. 민간기관에서는 꼭 그런 분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일반적인 공공기관, 공적인 심사 자리 같은 곳에는 꼭 관리 감독관이 함께 배석해야 해.
또한, 심사위원이 심사자와 결탁할 수도 있고, 오해를 살 수 있으니까 심사장에 가기 전에는 누가 올지에 대한 사전 정보를 철저하게 비밀로 붙이지. 또한, 심사위원으로 초빙되면 심사 당일까지도 자신이 심사를 한다는 걸 공개하면 안 되지. 외부 간섭이나 청탁을 막기 위함이고 공정성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이야.
그리고 때로 국가과제의 심사의 경우, 심사위원들을 특정 공간에 몰아넣고 외부 접촉을 최대한 막고, 심사하도록 해. 호텔방에 단체로 가둬놓고 심사한다는 말은 우스개 소리가 아냐. 심사장에 하루 종일 또는 심사 기간 내내 반강제적으로 같이 지내야 하는 의무가 있지.
심사하는 자리에 가기 전에는 그들이 누군지를 몰라. 그건 역으로 그리 많은 인맥이 있지도 않고, 다른 분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에 대한 관심이 없거나, 두루두루 많은 분야에 박학다식하지 못 한 나와 같은 사람에게는 제대로 된 심사할 능력(순발력)이 없는 사람들에겐 어려운 문제야.
왜 순발력이냐고? 평소에 어느 정도 상식과 배경지식이 넓은 사람들은 어느 누구, 어떤 분야에 대하여 이야기 나눌 때도 막힘없이 술술 이야기할 수 있기에 순발력이 뛰어난 거지. 심사위원으로서 잘 알지 못하는 심사자를 만나더라도 그 배경과 시장, 주변 지인들을 통해 들었던 해당 산업에 대한 지식 등의 간접경험들을 순간적으로 꺼내들 수 있거든.
'창업자'가 심사위원으로서 '창업자'를 평가하는 심사 자리에 제안받는다면, 적어도 위에 언급한 정도의 내공이 심후한 분들이어야 한다고 생각해. 평소에 준비된 사람들 말이야. 경험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크게 난다고 생각하는 분야가 바로 심사역이야. 그리고 조심스러운 자리이면서 나대기보다는 하나라도 더 깊이 생각하고 심도 있게 살펴봐야 하는 자리지.
그런 철학을 가진 내가 뭐라고 같은 창업자들을 평가할 수 있을까?
내가 심사를 받는 위치에서 어이없었던 질문들이 있었어. 제출한 서류에 이미 다 기록해 둔 내용을 지적하면서 압박하는 경우를 자주 보지(확인을 위해서 되묻는 게 아니라 전혀 모르고 묻는 질문 말이야).
그건 심사위원이 심사자에 대한 자료를 제대로 읽어보지도 못했다는 거야. 심사 현장에서 제공하는 심사 대상자들이 제출한 서류들을 읽을 시간이 없다고? 그런 핑계 말고 그냥 그런 노력조차 깜빡했다고 이실직고하는 게 어때? 심사위원은 심사 당일에 먼저 가서 현장에서 배포하는 자료를 숙지할 시간을 가지도록 되어 있어. 네가 딱 시간에 맞춰 들어왔거나 다른 심사위원들에게 얼굴 남기려고 인사한다고 시간이 없었겠지. 심사위원끼리 웃고 떠드는 시간, 인사 나누는 시간이 중요한 게 아닌데 그거에 정신 팔려서 정작 본 목적인 심사자들의 자료는 대충 넘어간 거잖아.
다시 말해
준. 비. 가. 안. 된. 능. 력. 없. 이. 자. 리. 만. 차. 지. 한. 잉. 여. 심. 사. 위. 원이라는 거지.
내가 만나본 참 심사위원으로서 자질이 없었고, 자각이 없었던 사람들에게 받은 질문들이 이런 거였어.
"이걸 하려면 인허가가 필요한 걸로 알고 있는데 그게 쉽지 않을 텐데 어떻게 대응하실 거죠?
-> '그래! 인허가 그래서 다 받아놨다고 너희가 정해 준 양식란에 작성했고, 그 증빙자료 뒷장에 다 붙여 놨잖아!'
"이거 시장이 있기는 한 건가요? 못 들어 본 것 같은데..."
-> '마! 시장에 먼저 뛰어들어서 유사 서비스하고 있는 곳도 있고, 네가 못 들어봤다고 없는 거 아니다!"
"혹시 OOO이라고 알아요? 이 쪽에선 핫한 스타트업인데..."
"모르겠는데요"
"아니, 이쪽 하면서 OOO을 어떻게 모를 수가 있죠?
-> 'OOO 이 얼마나 유명한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뛰는 필드에서는 거기 몰라... 기껏해야 마케팅으로 한 두번 언급된 OOO 모른다는 게 이상한 거냐?"
이런 일이 왜 생길까? 심사위원이라는 자리에서 그래도 뭔가 끄집어내거나 좀 아는 척(?) 좀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어서 무리수를 두는 거야. 그 자리에 올라온 대표들은 그래도 나름대로 자기 사업영역에 대해서 잘 안다는 사람들인데 그들 앞에서 권위를 내세우거나 무리한 질문을 하는 건 꽤나 바보 놀이 같아.
웃기지 않니?
본인들의 업계도 아닌데 알량한 지식으로 남의 업계를 지적한다는 게...
마치 화장품 하는 내가 심사위원으로 주워들은 걸로 IT 하는 대표의 사업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거라면 누가 그걸 인정해 줄 수 있어?
그렇지? 인정 못하겠지? 그래서 내가 어설프게 심사 안 하는 거고, 이런 자리에서 헛소리하는 젊은 꼰대들은 어설픈 애들이라는 거야. 왠지 그런 자리에 불러주니까 뭐가 된 거 같니? 예전에 그렇게 심사받던 때에 무슨 트라우마라도 있어서 배운 대로 똑같이 누군가에게 되갚고 싶어?
예전에 대학생 창업자들 해커톤 자리에서 심사이자 멘토라는 분들을 관찰한 적이 있어. 그 자리에는 그냥 어떻게 돌아가는지 한 발 물러선 참석자로 배석한 거였는데... 좀 별로더라고.
무박 2일로 엄청 고생하면서 만든 발표 자료로 긴장한 모습이 역력한 발표자들을 상대로 쉽게 웃고, 비아냥으로 들리는 듯한 지적질이 참 마음에 안 들더라고. 중간에 자기들끼리 시시덕거리는 모습이 서로 친해서 그런 건지, 뭔 재미난 이야기를 나누는지는 몰라도, 그 자리에서는 부적절한 행동으로 보였어. 설령 서로 친한 사람들이더라도 그 앞에 선 사람들에게는 예의가 아니지.
그렇게 봤었던 심사위원이었던 분 중 한 분을 다른 장소에서 만나게 되었어. 한창 나도 공모전 수상이력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창업 공모전, 아이디어 대회에 나갔던 때가 있는데 그 자리에서 같은 심사 대상자로 올라왔더라고. 공개 심사라 그의 발표를 보게 됐는데... 흠... 이런 느낌이라면 좀 이해가 잘 될까?
"...."
(더 이상 설명은 생략한다)
그러니까 심사하는 자리에 있다고 섣불리 갑질 하거나 무시하진 말아야 해.
언제 너를 평가하는 사람이 될 수 있어.
언제 나도 평가받는 사람이 될 수 있어.
그러니 서로 갑질 하지 말아야 하는 거야.
그러니 서로 예의는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
나 역시도 이번에 느낀 점이 많았어.
내 행동, 내 말 한마디 한마디 한 번 더 생각하고 상대방에게
어떻게 비추어질는지,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하는 훈련으로 완전한 습관화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어.
글을 쓰고, 몇 번을 지웠다 적었다를 반복했어.
결국 나도 이런 글을 남긴다는 게 마음이 편하지는 않거든.
어떤 사람들은 이 글을 보고 기분이 나쁠 수도 있고,
역으로 "너는 뭔데, 니 까짓게 뭔데 너도 지적질이냐!"라고 반문할 수 있는 빌미가 있거든.
(뭐 그렇게 반문한다는 것은 스스로가 내가 언급한 부류의 사람이라는 반증이기도 하니까 딱히 그런 역공에 신경 쓰지는 않아. 이 글을 쓰면서 쫌 까칠하네)
그 딴 것은 눈곱만큼도 신경 안 쓰이지만
내 마음에 걸리는 것은...
정성껏, 공정한 평가, 신중한 심사, 발표를 진심으로 듣고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하려고 하는
선량하고 열심인 심사위원들에게도 잘못된 시선으로 바라볼까 봐 찜찜한 거지.
물론 경력이 있고, 심사를 업으로 하는 분들이라고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적어도 만나봤던 많은 심사들 중에는 왜 그분들이 심사를 하는지 단박에 알게 되더라.
꿰뚫는 질문과 핵심이 되는 포인트를 찾는 통찰력도 그렇고,
상대를 대하는 예의와 배려하는 자세로 심사하는 분들도 많아(이런 분들이 진짜 어른이지).
그러니까 그 때 그때 달라. 니가 만난 심사위원이 자질이 충만하든 아니면 자격미달이든 그건 일회성이니까 너무 깊이 매몰될 필요 없어. 진짜 심사는 고객들이 해 주는거니까 그 때 본 게임에서 잘 평가 받도록 지금은 모든 게 연습게임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더 편할거야.
몇 번 평가 받으면서 까였다고 의기소침해 하지 말고!
딱 오늘까지만 맥주 한 잔 마시고 푹 자렴.
그리고 내일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