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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nho Song Nov 17. 2017

Freddie Green (프레디 그린)

Early Jazz 2- Mr. Rhythm

Freddie Green (March 31, 1911 - March 1, 1987)


30년대 스윙 재즈 시대를 대표하는 뮤지션으로 분류되는 Freddie Green (March 31, 1911 - March 1, 1987)은 찰리 크리스천이나 장고 라인하르트와는 달리 솔로 악기로써의 새로운 가능성보다 원래 기타가 가졌던 리듬 악기의 역할에 충실하며 그가 가진 본연의 음악을 묵묵하게 추구하였던, 리듬기타로써의 자신의 길을 완성한 기타리스트로 오늘날 기억된다. 그는 살아생전 리듬기타의 마스터라 불렸으며 그가 연주하였던 반주법은 그 독창성을 인정받아 자신의 이름이 붙은 Freddie Green Comping 스타일이라고도 불리며 컴핑 기타의 교과서로 자리 매김 하였다. 이는 Wes Montgomary 컴핑 스타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오늘날까지도 많은 기타리스트의 컴핑 스타일에 영향을 주었다.



Freddie Green은 Mr. Rhythm이라 불리며 살아생전 리듬기타를 대표하는 뮤지션이었으며 동시에 당시 스윙 빅 밴드를 대표하는 Count Basie의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며 75세로 그가 죽기 전까지 근 50년간을 함께 연주하며 명성을 쌓았다. Count Baise 의 좋은 친구였던 Freddie Green은 Count Basie Big Band에서 독립 직인 리듬악기의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하며 음악을 서포트하였으며 그의 리듬 스타일은 30년대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스윙 리듬 사운드에도 영향을 끼치며 재즈 리듬을 한 단계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오랜 기간 꾸준한 활동으로 우리에겐 더욱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한 Freddie Green의 연주는 스윙 시대와 현대 재즈를 연결하는 역사적 가치를 지닌 의미있는 뮤지션이다. 그의 연주 그 자체로써 가진 상징성은 재즈 역사에서 중요한 한 페이지 일 것이다.




Freddie Green와 그의 Epiphone 기타




Frederick William Green은 1911년 3월 31일 미국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에 있는 Charleston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음악을 접했으며 10대에 어쿠스틱 기타를 잡기 전까지 벤조를 연주하였다. 젊은 Freddie는 그의 친구의 아버지인 Sam Walker로부터 음악을 읽는 법을 배우며 자랐으며 또한 그가 꾸준히 기타를 연주할 수 있게 격려하고 도와주었다. 그의 스승이었던 Sam Walker는 Freddie에게 연주할 기회도 주었으며 이는 어릴 적부터 많은 경험을 쌓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그의 첫 밴드 인 Nighthawks으로 활동하며 이미 기타리스트로의 이름을 알렸으며 또한 후에 Duke Ellington밴드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드럼펫 연주자인 William "Cat" Anderson와 함께 연주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그의 부모님의 죽음으로 그는 뉴욕에 있는 고모네 집으로 이사하게 되고 교육을 받게 되었는데 그곳에서의 생활을 그로 하여금 새로운 음악적 세계에 대한 눈을 뜨게 해주었다. 아직 그가 10 대일 때 이미 그는 뉴욕 근교에 있는 클럽에서 연주하며 돈을 벌었으며 그로 인해 기타리스트로의 명성을 조금씩 쌓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공연 중 전설의 음반 기획자였던 John H. Hammond에 의해 기타리스트로써의 가능성을 인정받고 Count Basie에게 추천을 하게 된다. (John H. Hammond는 찰리 크리스천을 Benny Goodman 밴드에게 추천해준 바로 그 사람이다.)



1937년 Count Basie와 그의 팀 멤버들은 Freddie의 연주를 보러 가게 되는데 그의 연주를 본 Basie는 단숨에 팬이 되었고 다른 멤버들과의 동의와 함께 팀의 멤버로 제안하게 되고 이를 받아들임으로 앞으로 50여 년을 함께 음악 할 이들의 역사적은 운명은 시작된다. Count Basie 밴드에서 그는 주로 Freddie는 리듬기타를 연주하며 다른 악기를 서포트 하였으며 드물게 솔로 연주도 하였다. 리듬 섹션으로의 중요한 파트로서의 리듬기타 역할을 이뤄냈고 그의 밴드와 함께 그가 보여준 “Honeysuckle Rose”, “Pennies From Heaven”, “Swinging At The Daisy Chain”, and “Roseland Shuffle” 곡들에서의 화성적 코드 보이싱은 현대의 기타리스트들도 모방할 만큼의 재즈의 기본 테크닉이 되었다. 1938년 그는 Benny Goodman Big Band와 함께 카네기홀에서 연주하기도 하였으며 이때 보여준 그의 리듬기타 솔로는 많은 재즈 뮤지션에게 그가 새롭게 떠오르는 기타리스트라는 인상을 강하게 주며 많은 연주자들에게 충격과 영향을 주었다.



매 비트마다 빠르게 코드를 바꾸거나 매 비트마다 코드를 울려주는 연주를 보이는 그의 대표적인 컴핑 스타일은 기타 줄을 전체적으로 다 울리지만 특유의 왼손 뮤트 주법으로 몇 개의 스트링만 움직이게 하는 그만의 특유의 테크닉을 주로 사용하였으며 이는 연주 시 "Chunky"라는 소리가 난다고 해서 "Chunky" 리듬 사운드라고 불린다. 그는 다른 오케스트라 사운드와 겹치가나 혹은 불필요한 하모니를 연주하지 않는 선에서 늘 연주를 하였으며 이는 아주 계산적이고 조심스러운 연주를 필요로 하는데 이 때문에 많은 화성적 지식과 경험을 필요로 하기에 그의 연주는 더욱 놀랍고도 대단하게 들리 운다.  




Freddie Green의 노년의 모습



1945년 그는 Count Basie의 서브 밴드인 Kansas City Seven and The All American Rhythm Section에서 연주하기도 하였으며 Count Basie와 함께 이때 녹음한 I'm In The Mood For Love, Sugar Hips and I'll Never Be the Same곡들에서 그가 보여준 스윙감은 Count Basie밴드가 스윙 재즈 밴드의 모범 예시를 제시하며 당시 잊혀가는 스윙 재즈의 정체성을 다시 한번 보여준 곡으로 평가된다.



1950년대 Basie는 당시 재즈 트렌드를 따라 스몰 밴드로 규모를 축소하게 되지만 Freddie는 밴드를 떠나지 않고 남게 됨으로 Basie밴드가 끝이 날 때까지 둘은 함께 하게 된다. 1955년 Freddie는 Freddie Green and his Orchestra (Joe Newman, pianist Nat Pierce, bassist Milt Hinton)라는 팀으로 개인 솔로 앨범 Mr. Rhythm을 발표하게 되는데 이 앨범에서 보여준 리듬기타의 연주를 통해 그는 Mr. Rhythm이라는 별명을 가지게 된다. 그의 음악적 전성기였던 1950년대에 그는 Kenny Burrell, Benny Carter, Herb Ellis, Benny Goodman, Lionel Hampton, Billie Holiday, Sonny Stitt, Jack Teagarden, Joe Turner, Lester Young 등 당대 최고의 뮤지션들과 협연하며 음반 녹음을 하며 무수한 재즈 음반에 기록을 남겼다.



1960- 1970년대 Count Basie 밴드는 다시 빅밴드로 귀향하며 Frank Sinatra, Sarah Vaughn, Ella Fitzgerald, Tony Bennett, Mel Torme, Judy Garland  and Sammy Davis Jr. 등 많은 재즈 보컬리스트들과 작업하기도 하였으며 1975년 그는 이미 재즈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추앙받으며 Herb Ellis, Ray Brown, Jake Hanna and Ross Tompkins와 함께 LP를 녹음하기도 하였다.



평생을 Count Basie와 우정을 쌓으며 함께 연주하였던 Freddie는 1894년 재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하나인 Count Basie가 세상을 뜨면서 자연스레 밴드를 떠나게 되었으며 3년 뒤인 1987년 3월 1일 라스베이거스에서 연주 후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75세의 나이로 그 역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Freddie Green이 처음으로 사용하였던 Epiphone Emperor 모델


추고:  


1940년대 기타의 역사는 찰리 크리스천에 의한 일렉기타의 인기와 일렉트릭 엠프의 발전으로 많은 뮤지션들이 어쿠스틱에서 일렉트릭 기타로 넘어가는 결정적인 시기였는데, 이는 엠프를 통한 일렉기타 연주가 반주자가 아닌 솔로리스트로의 스포트를 받는 기회를 가지게 끔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흐름에 따르지 않고 어쿠스틱 사운드를 고집하였는데 당시 어쿠스틱 기타의 가장 큰 단점이었던 볼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타 줄과 액션을 높이 띄우므로 브릿지 위에 줄에 압박이 증가하게 끔하여 더 큰 에너지가 기타의 바디의 탑으로 모이게 하여 볼륨을 크게 하는 주법을 썼을 만큼 어쿠스틱 사운드에 애착을 강하게 가졌으며 시기 착오적인, 시대에 떨어지는 뮤지션이라 인식에도 불구하고 사이드 맨으로써의 역할을 고수함으로 어쿠스틱 기타의 전통성을 지켰던 오랜 시간 그 자신 스스로 백업 기타리스트가 되었던 그는 진정한 전통성을 가진 기타리스트이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현대까지 그는 자신의 숨겨 음악을 빛나게 한 최고의 리듬 기타리스트로 보편적으로 인정받았으며 오늘날까지 Mr. Rhythm이란 이름으로 불리며 많은 재즈 애호가들에게 그 이름이 오르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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