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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보

by 다나 김선자



지상에 아름다운 빛 하나가 꺼졌다. 결국 그렇게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났다. 이미 예견된 결론이지만 안타까운 마음을 어찌할 수 없다. 남편의 상심함이 크다. 하기야 나도 이처럼 애석한데 그의 마음은 오죽하겠는가. 다시는 볼 수도, 대화도 소통도 무엇을 함께 나눌 수도 할 수도 없는 게 바로 죽음이다. 그래서 슬프다.

그는 내 남편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철학적 신념의 빛이셨던 분이다. 그 밝고 명료한 빛은 남편의 삶에 태양이 되어 비타민 같은 에너지가 되었다. 프랑스 하이데게리안의 대부 프랑소와 페디에(François Fédier), 그가 있었기에 남편은 물론 하이데게리안들에게는 따스한 호시절이었다.

그런데 오늘 그의 육신이 이승을 하직하는 날, 그를 위한 애도의 미사가 파리 생-뱅상(église Saint-Vincent de Paul) 성당에서 열린다. 그리고 그는 앞서간 가족들 곁에서 고요히 잠들 것이다.

남편은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엄숙하게 작별을 고하며... 그분 가시는 길, 피치 못할 사정으로 나의 동석은 없었지만, 그를 배웅하러 성당 미사에 참석했다. 생전에 못다 한 마음도 전하겠지!


앞서 우리가 두 번씩이나 그를 떠나보내는 본의 아닌 해프닝을 벌렸다. 참으로 웃지 못할 아이러니한 일이었으나 그 덕분에 오늘의 충격을 최소화시키는 처방책은 되었다.

무슨 일인가? 사월의 물고기(poisson d'avril, 만우절) 다음날, 바람이 몹시 불던 화창한 봄, 체리꽃이 하얗게 깨어나던 날, 우리에게 비보가 날아들었다. 믿고 싶지 않았으나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는 벌써 일 년 가까이 병원신세를 지면서 세상과 동료들을 멀리하고 있었다. 모든 암이 그러하나 특히 남성에게 흔히 나타나는 전립선암은, 만약 초기에 발견해서 집중적인 치료를 받는다면 치명적이지 않았을 텐데, 알게 모르게 방치되었었나 보다.

비보가 날아든 날, 우리에게 화사했던 봄햇살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봄도 돌아왔고 꽃들도 만발하건만 싸늘한 바람만이 가슴팍을 스며들었다. 이제 더 이상 그때 같은 봄날도 싱그러운 향기도 없을 것만 같았다. 아쉬움과 미련이 슬픔과 후회로 다가왔다. 추억이 고스란히 그리움으로 남겨진 채 그는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났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영원한 곳으로.

그래서 우리는 하루 종일 우울했었다.

이틀 후, 프랑소와가 아직 떠나지 않았다는 새로운 소식이 도착했다. 그제의 비보는 한 친구가 잘못 들고 전해진 오보였던 것이다. 이런, 결례스런 참담한 착오를... 만우절에도 못다 할 실수... 그렇지만 그의 생명은 이미 다한 거나 다름없었다. 겨우 산소 호흡기에 의지한 그는 모든 출판물 제작권과 업적을 유서 작성 중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 재차 날아온 비보, 앞의 충격에 비할 수야 없지만 우리는 또다시 비통한 하루를 보냈다. 결국은 가셨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또 그릇된 정보였다. 어찌 두 번씩이나 이런 일이... 어디서부터 오해가 발생했는지 참으로 한탄스럽기 짝이 없었다. 지역 봉쇄로 대면도 못한 상태에서 전화상으로만 오가다 보니 오류만 난무한 고장 난 소식통이었다.

그 사유야 어찌 되었던 그의 죽음은 그만큼 우리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애달픈 사연이고 슬픈 사건이었다. 또한 남다른 그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보 부고를 거듭한 지 한 달 남짓 그는 마침내 영면하셨다.


프랑소와 페디에(François Fédier), 그는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그리고 절친인 쟝 보프레(Jean Beaufret)의 제자였고, 하이데거 철학 테스트에 관한 해석과 번역에 있어서 비교할 수 없을 일인자로서 그 일에 평생을 바쳤다. 그는 하이데거 철학의 프랑스 번역 출판 계승 책임자로서, 하이데게리안의 대표적 상징일 뿐 아니라, 명석한 두뇌와 현명한 철학적 사유를 가진, 이 시대의 유일무이 한 진정한 철학자이자 이 시대의 빛이라고 내 남편은 그를 말한다. 그는 자신의 신념에 충실했고, 겸손한 철학자로서 공적 사회의 권력과 명성에 유혹되거나 농락당하지 않았고, 어리석은 농간에 빠지지 않았다. 그는 오직 스승 마르틴 하이데거의 정신을, 사상을, 철학을 위해 헌신했다.

그는 내 남편의 철학 석사 논문에도 도움을 주셨던 사유의 스승인 동시에 지도자로서 선배 같은 길벗이고 동행인이었다. 내 남편은 대화의 달인이자 해박한 그와 함께 가지는 대화를 참으로 유쾌하게 여긴다.

또한 그가 내게는 미식가로 기억된다. 그의 기호는 유별났고, 무슨 음식이던, 어떤 자리던지 맛나게 시식하는 모습이 아련하게 그려진다. 케이크를 좋아하던 그를 위해 힘겨울 정도로 배우자 모니끄가 빵을 자주 굽는다고도 했다. 하지만 우리가 그의 집을 방문할 때면 언제나 모니끄가 아닌 그가 친절하게 직접 차를 끓어내는 자상하고 소탈한 분이셨다.

어느 나른한 봄날 우리가 그들 부부를 점심식사에 초대했을 때, 식사를 마친 그는 식곤증으로 이층 작업실에서 낮잠까지 잤던 기억도 생생하다. 그리고 우리의 전시가 있는 날이면 빠짐없이 참석하여 자리를 지켜주셨던 분이다.


나는 재작년 파리 그의 아파트에 들러서 마신 차와 그 맛난 비스킷도 잊을 수 없다. 그게 마지막 대면이 될 줄도 미처 몰랐다. 어찌 알았겠는가! 알았던들 무엇이 달라졌을까마는 이렇게 불현듯 이별을 맞고 보니 모든 것이 애잔하다. 그가 막 출간한 책을 선물하려 우리에게 들러라고 했었다. 그날 그 사인도, 그 책도, 그 모습도, 그 대화도, 그 차도 비스킷도, 숨소리도, 미소도 그의 마지막 선물이 될 줄이야. 그때까지만 해도 그에게 어둠은 보이지 않았는데, 얼마 후 열린 우리 전시회에 참석치 않아 의아했었다. 이미 그의 암은 진행되었고, 그리고 입원 소식을 들었다.

그날 책 첫 장에 내 이름과 남편 이름을 손수 기입하여 선물한 그 책은 지금 그의 다른 저서들과 그리고 그와 하이데거가 함께 찍은 사진이 나란히 우리 책장에서 빛이 되어 밝힌다.


몇 년 동안 그에게 맞닥뜨린 일련의 사건들, 그가 힘들게 겪으며 견디어낸 시간들, 혹시나 그 사건의 충격 여파로 인한 스트레스가 그의 건강을 해치는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하니 더더욱 가슴이 메이도록 애석하다. 이제 와서 미련인들 남아도 돌이킬 수는 없다.


2014년 초에 출간된 마르틴 하이데거의 "까이에르 노와, Cahiers noirs, 검은 노트" 내용 중에 안티세미뜨(antisémite, 반유대주의)적인 표현이 담겨 유럽 철학가들 사이에 자못 충격을 주었고, 따라서 많은 논란과 스캔들이 일었다. 물론 하이데게이안들 사이에서도 찬반 논쟁이 생겨났으며, 페디에는 그 많은 논쟁의 중심에서 흔들림 없이 정당한 논리적 해석으로 하이데거를 대신하여 반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엇갈린 해석과 의견 충돌로 인해 함께 걸어온 절친과 제자들이 그에게서 등을 돌리는 불상사를 낳았다. 그렇게 모두가 떠난 자리에 그는 홀로 서 있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하이데거 철학을 위한 수비적 방패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연구와 저서에만 몰두했었다.


사실 독일 현대 철학가 하이데거에게서 안티세미뜨(antisémite, 반유대주의)에 대한 논란은 처음이 아니다. 그동안 끊임없는 비판과 논쟁 속에 있었고, 암울했던 시대의 불운한 단면이기도 하다.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철학을 가리키던 하이데거는 당시 공직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한때 히틀러 정권을 비껴 날수는 없었다. 하지만 얼마 후 그는 나치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며 배지를 떼어내고 떠났으나, 그의 반대편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은 그의 철학 전체가 부정되게끔 만들면서 그를 공격했었다. 그런 와중에 "검은 노트" 속 안티세미뜨란 단어가 그동안 특별히 증명할 방법이 없었던 논란에 좋은 미끼의 근거가 되었고, 마침내 그들의 집중적 화살이 쏟아져 나왔다.


오늘의 비보가 그 원인에 결과이지는 않았을까? 남편을 비롯한 하이데게리안들이 가진 추측이고 안타까움이며 그들에게 죄책감마저 안겨 주었다. 그럼에도 그 논란은 또 다른 논쟁으로 남겨졌을 뿐. 마르틴 하이데거도, 절친 보프레도 떠난 지가 이미 수십 년, 이제 최고의 제자 프랑소와 페디에도 없는 지금, 그 누가 바닷속 깊고 드넓은 세계처럼 그 심오한 철학자의 정신과 사유를, 사상을, 하이데거의 철학을 보다 명확히 해석해 줄 것인가?

철학을 전혀 모르는 나 역시 바라건대, 하이데거 철학적 사상과 정신의 근본적인 원리나 깊이를 왜곡하지 않고서 올바르게 해석되기를, 비록 반대적인 해석자일지라도 논란을 중점에 둔 논쟁으로 그가 잠깐 걸친 옷이 우선되지 않기를.


끝으로 하이데게리안의 일원으로 페디에 곁에 있던 내 남편과 친구 프레데리크가 나눈 대화를 옮겨 보면 프랑소와 페디에 인물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듯하다.

프레데리끄는 괴테의 문장을 인용해 그를 표현했다.

Goethe:"Face aux grandes supériorités d'un autre il n'y a pas d'autre moyen de salut que l'amour"

뜻을 풀이하면, 굉장히 탁월한 철학자 하이데거의 사상 앞에서는 그것을 진정으로 사랑하여 심취하는 것만이 자신을 구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페디에가 진정으로 하이데거 철학을 헌신함에 이른 말로 풀이된다.

내 남편은 이와 같이 답한다. c'est en ceci que Fédier n'est pas Derrida*.

페디에는 하이데거 사상의 가지를 주워다 자신의 집을 만든 데리다와는 달리 하이데거 철학을 진솔되게 심취하여 정통으로 헌신했음을 두고 비교한다. 남편은 덧붙여 페디에의 위대함과 명석함은 결코 그 어떤 저명한 철학자보다 더 강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또한 프랑소와 페디에를 두고 발자크의 소설 <상실된 환각들, Illusions perdues>에 나오는 Daniel d'Arthez 란 인물에 비교하여 권력과 명성보다는 오로지 저서와 연구에 몰두한 진정한 철학자라고 일컫는다.

나는 여기서 추가로 '심미안이 없으면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것 또한 불가능하듯이, 깨닫은 자만이 아는 것이다' 이 말을 그에게 바치고 싶다.


*Jacques Derrida(쟈크 데리다)는 프랑스 철학자로서 하이데거 사상의 계보에서 "해체론"을 말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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