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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과 옆집 사이

by 다나 김선자




옆집과 옆집 사이는 다름 아닌 우리 집이다. 이들은 길 건너도 아니고 공터나 뜰 너머도 아닌 바로 양쪽 담장과 정원 울타리를 따라 길쭉하게 나란히 붙어있다. 그래서 서로의 삶에 직, 간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대지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기다란 경사진 땅 위에 절반쯤 건물이 차지하고 나머지 반은 테라스를 비롯하여 정원이 연결되어 있다. 정원에는 옆집과의 경계선을 담벼락이 아닌 철망과 더불어 울타리 나무로 그어져 있다. 그리하여 옆집 및 우리 정원에서 일어나는 일이 마치 한집 같은 느낌을 준다. 즉 내밀하지가 못하다는 뜻이다. 특히 폭이 좁은 우리 집 정원은 양쪽 집 넓은 정원에 샌드위치 모양으로 꼭 끼어 더 이상 물러설 수가 없지만 덕분에 도둑이 침입할 염려 또한 적다. 그리고 이웃집 좌우 정원을 포함해 드넓은 시각적 공간과 함께 원시림 같은 풍부한 자연을 맘껏 즐길 수는 있다. 하지만 조용하고 은밀한 생활을 좋아하는 우리는 지난해 테라스 오른쪽 담을 아예 쌓아 올렸다.


옆집이란 참으로 가깝고도 먼 관계다. 그만큼 옆집과 다복하게 지낸다는 소리가 듣기 힘든 이유이기도 하다. 특히나 개인주의 성향인 프랑스에서 옆집과 좋은 이웃을 맺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집을 구할 때는 옆집과 이웃에 대한 정보도 집 그 자체의 상태 못지않게 중요한 요점이 된다. 어떤 이웃을 만나느냐에 따라 충분히 내 삶의 질이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집이란 안락한 삶을 영위하는 데 있어서 기본적 생활 조건이며 건강과도 직결된다. 가령 몰상식한 수준을 벗어난 범죄행위나 지나치게 이기주의적이지 않는 이웃을 만나는 것 또한 행운이다. 그러므로 이웃 간에 화목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지켜야 하는 예의와 규범 또한 각자 서로가 가져야 하는 노력과 몫이다.


우리는 불과 며칠 전에 떠난 팔 년 된 오른쪽 옆집과 썩 친밀한 관계의 이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등을 진 사이도 아니다. 서로 왕래가 없었을 뿐 마주치면 인사를 나누는 정도다. 우리가 성격상 사회성이 뛰어난 것도 아니지만 그들 또한 성품 있는 사람들도 아니었다. 서로 다른 고유의 독특한 성질을 가진 우리는 기호와 성향이 다를뿐더러 세대 또한 차이점이다. 이 또한 어느 누구의 탓도 아닌, 상호 간 삶의 방식과 방향, 취미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젊은 주인 고띠에는 유별난 목청을 가져 평소 목소리조차도 날카롭게 돌아가는 전기 절단기 소리 같았다. 거기다가 넘쳐나는 젊은 에너지가 마치 웅변을 토하듯 우렁차서 동네를 가득 메울 정도다.

우리는 야외용 안락의자에 드러누워 맑은 공기를 마시며 조용히 책 읽기를 좋아하는 반면 그들은 정원 살롱에서 친구들과 수다 떠는 걸 좋아한다. 이렇게 서로 다른 생활 방식은 우리의 간극을 더욱 넓혀 놓았다.

봄, 여름, 가을 맑은 날 정원 생활이 잦아지는 동안 우리는 그들 수다와 높은 목청을 피해 또는 그들 동향을 살피며 안팎으로 이리저리 옮겨 다니느라 이 시간을 제대로 행복하게 즐길 수가 없었다.

또한 그 아내의 오만과 도도한 콧대는 에펠탑을 버금가며, 스모비즘(속물근성) 성향에 우월감은 마치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줄 안다. 그래서 가까이하기에 낯설고 언제나 찬바람이 쌩하게 지나가는 듯했다.

일찍 퇴근한 그녀는 자주 친구들과 정원 살롱에서 하루를 마감하며, 주말 저녁은 밤늦게까지 별을 이고 수다를 즐긴다. 비록 떠들썩한 파티가 아니더라도 우리 삶에 모자람 없는 장애 요소였다. 왜냐하면 그들의 정원 살롱이 우리 집과의 경계선 한발 건너에 차려져 있기 때문이다. 해가 긴 저녁나절 우리도 테라스에서 책 읽거나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으며 자연을 벗 삼아 멍청히 시간 보내는 것만큼 세상을 품은 듯 흥나는 일도 없는데 그들의 재잘거리는 수다 소리가 이를 망쳐놓기가 일쑤다.

물론 살롱을 차린 땅이 반반하고 아늑한 면도 없지는 않지만 이웃에 대한 배려나 우리를 전혀 의식하지 않은 행동임에도 분명하다. 만약 일반적 사고방식이라면 넓고 넓은 정원 가운데서 굳이 우리 곁에 살롱을 꾸미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비껴 날 곳이 없지만 그들 정원은 우리보다 세배나 넓지 않던가. 우리와 동떨어진 곳에다 얼마든지 은밀하고 아늑한 공간을 꾸밀 수도 있을 터인데...!

사실 그들 부부가 막 이사 왔을 당시에는 서로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 주의사항에 대한 소통도 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말이 무색게 됐다. 인간의 아량이란 남 사정에 새겨듣는 한정적인 능력과 쉬이 잊히는 점을 감안해서 더 이상 건의하지도 않고 인내하며 지냈다. 그러나 도저히 참지 못할 상황이 겹치고 그 정도가 강해져 말할 기회를 엿보던 중에 어느 날 우리들은 각자 정원에서 마주쳤다. 나는 이때다 싶어 농담조로 에둘러서 말했다.

"당신들 대화를 안 듣고 싶은데도 너무 잘 들려서 괴롭다"

"괜찮아요 상관없어요"

그렇게 그녀는 받아넘긴다.

솔직히 나는 우리를 위해 조심해 달라는 뜻을 기분 상하지 않도록 한 말인데 자신을 배려하는 뜻으로 잘못 이해했던 것 같다. 차라리 직접적으로 말할걸 너무 예의 지킨 내 간접화법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이같이 서로의 기호도 성향도 생활리듬도 다르니 이후 달리 방법을 찾아낸 게 담장을 쌓는 것이었다.


왼쪽 옆집 터줏대감 마담 미슈 역시 오래된 이웃으로 가깝지만 먼 사이나 마찬가지다. 역시 서로의 성격과 기호의 차이라고 해 두는 게 좋겠다. 해마다 자신의 정원 호두나무에서 수확한 호두를 나눠주거나 체리를 따 먹게도 하고, 얼마 전에는 내가 몸살 났다는 소리에 정원에서 작약 봉우리를 꺾어 선물을 할 정도 인정도 있지만 가끔 깐깐하고 몰상식한 모습도 나타난다. 지금은 그 행동 또한 드문 하고 성격도 한풀 꺾였지만 예전에는 만만찮았다.

마담 미슈는 우리 집 나무가 자기네 땅에 약간이라도 침입하는 꼴을 못 본다. 자기 영역을 철저히 지키는 성격이다. 거기다 더하여 자기 집 담장 너머로 가지가 뻗으면 잘라서 곧바로 우리 집으로 되레 던져 놓는다. 낙엽이 떨어져도 매일반이다. 이러한 행위는 그 자체가 비상식적이고 그야말로 안하무인 격이다.

오래전 어느 날은 우리 정원에 자란 잡초에다 제초제를 뿌려 노랗게 죽게 만들었다. 바쁜 남편이 미처 깎지 못해 잔디보다 키가 더 자란 풀이다. 아무리 보기가 흉했을망정 자신의 정원으로 넘어간 것도 아닌데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처사였다. 설마 풀씨가 날아올까 미리 염려한 것인지 아니면 눈에 거슬려 도저히 참고 볼 수가 없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정도가 지나친 엄연한 권리 침해일 뿐 아니라 법에 저촉되는 행위로 충분히 분쟁 거리가 될 수 있는 소지다. 하지만 시끄러운 게 싫은 우리가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그녀의 오만불손 몰염치한 행동에 우리는 말할 수 없이 불쾌했다.

이제 나이가 들어 남편을 여윈 그녀도 떨어지는 기력만큼 정원 일이 무력해져 지금은 그녀의 처지가 오히려 예전 우리와 역전된 실상이다.

한 치 앞도 헤아리지 못하는 인간의 어리석음!


이렇듯 땅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갈등은 어떤 문화권에 살던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가 하면 혐오감으로 서로 간에 씻지 못할 커다란 상처를 낳게도 한다. 극단적으로는 이웃과 원수지간이 될 수도 있다.

여기서 두 가지 예를 들어보면, 첫째 아주 오래전 내 부모님이 겪은 몰지각하고 파렴치한 이웃의 이야기다.

우리 가족이 살던 고향집 뒤쪽 방앗간 주인은 어진 부모님 몰래 바로 뒷집과 작당하여 부모님 땅을 자신의 명의로 슬쩍 옮겨놓았던 것이다. 건물을 제외한 뒷집 땅은 내 부모님 소유였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부모님께서 되돌려 놓기를 요구했으나 철면피한 그들과 대화로서 풀리지 않음을 깨달았다. 결국 부모님께서는 고심 끝에 법정 싸움까지 가서야 그 땅을 되찾았다. 그때 부모님은 가족처럼 생각하며 지냈던 뒷집에게 당한 배신감으로 상심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들 역시도 방앗간 댁의 꾐에 넘어갔던 것이다.

두 번째는 프랑스에서 남편 사촌이 겪은 일 역시 매한가지다. 정년퇴직 후 시골에서 농사짓고 싶었던 사촌은 아주 오래전에 프랑스 중부지방에 농가 딸린 넓은 땅을 사서 주말 집으로 이용했었다. 그런데 그 옆집 주인이 친분 있던 마을 시장 및 경관과 함께 짜고서 사촌의 집터 경계선 일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와 같이 작은 시골마을에서는 작배 하고 외지인을 따돌리거나 외면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물론 다 그런 것도 아니지만 파리지앵을 탐탁지 않게 여겨 경계하거나 질투심에서 생기는 폐쇄적인 행위다.

그리하여 사촌은 그 먼 거리를 오가며 지역 고문서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현명함과 지혜로움을 발휘해 대단한 집념으로 찾아낸 토지에 관한 모든 서류와 증빙자료를 제출한 결과 그 땅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 힘겨운 소송으로 입은 고단했던 마음의 상처가 그 동네에 대한 미련과 정마저 떼어 내었다. 그 이후 사촌은 정년퇴직을 했음에도 농사는커녕 트랙터까지 사놓고 그곳을 자주 찾지 않게 되었다. 지금은 그의 트랙터가 사촌 대신 그 땅을 지키며 버티고 서 있다.


그렇게 옆집 팔 년 이웃은 이사를 가고 새로운 이웃이 이사를 온다. 새 이웃과 첫 대면 인사를 했다. 이전 주인과는 사뭇 다른 평범하고 서민적인 인상을 받았다. 다행히도 첫 만남은 순조롭다. 하물며 두고 볼 일이지만 젊은 부부는 예의도 바르고 친절했다.

이웃이란 염치없이 무례하고 불손한 사람도 문제지만 도도한 척 오만하고 우월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과도 결코 좋은 관계를 이룰 수가 없다. 원만한 이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대에 대한 배려와 존중 그리고 예의가 필수 불가결하다. 우리도 이웃도 서로가 지켜야 하는 공중도덕이며 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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