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급변함에 따라 우리들 일상에서도 그 변화들은 피부로 느낄 만큼 가히 속도감 있게 인지되어 다가온다. 생활의 방식도, 사고도, 습관도, 화법도, 갈망도, 추구도... 통틀어 문화라고 일컫는 것들, 그것은 결코 나이가 들면서 지각되는 구별이나 개인적 관점에 따른 차이만이 아닌, 분명 미세한 요소나 성분들이 새롭게 모여 하나의 큰 유행을 이끄는 시대의 양식 즉 새로운, 또 다른 문화로 탄생된다.
한국은 내가 떠날 무렵에 IMF 위기가 닥쳤고, 그 이후 많은 변화를 맞았다. 나는 그동안 괴리를 느낄 만큼 한국과의 교류가 아예 없었던 것도 아니다. 매년 또는 늦어도 이년에 한번 꼴은 고국을 방문하였기 때문에 그 변화의 과정을 익히 감지하고는 있었다. 그렇다고 그 모든 변화를 긍정적 시각으로만 보지도 않았다. 방문 때마다 점점 빠르게 사라지는 것들을 보며 아쉽게 여겼고 낯설게도 느껴졌다. 세계적인 흐름에 합류하여 재빠르게 몰아치는 현대화의 바람은 어느 순간부터 아쉬운 생각이나 이질감을 뛰어넘어 그 변화에 무감각하도록 만들었다. 결국 나는 외국에서 또 다른 타국을 방문하는 것 같았다.
갈 때마다 익숙했던 길은 없어지고 낯선 건물과 신도시가 생겨났다. 매일 먹던 음식조차 달라졌다. 사회적 형상과 삶이 바뀌듯이 사람들의 감정도 표정도 태도도 변해갔다. 그 바뀌고 변하는 것들은 가슴 설레게 하는 새로운 것들이 아니라 내가 프랑스에 살면서 이미 접하거나 혹은 단점으로 여기며 자주 목격하던 것들이 일반적이었다. 그래서 더욱 안타까웠다. 반면, 서양인들에게서 쉬이 찾아보기 힘든 우리만의 아름답고 따뜻한 정과 정서가 없어지는듯하여 씁쓸했다. 그래서 이 모든 변화를 달갑게만 여겨지지가 않았으며 따라서 손들고 환영하는 기분 역시 아니었다.
그러나 오직 부정적인 것만 있는 것도 아니라는 걸 잘 안다. 경제적인 급성장과 동시에 세계적인 위상은 달라졌다. 세계인이 바라보는 한국은 분명 20여 년 전과는 다르다. 그것은 현재 내가 몸소 느낄 뿐만 아니라 내가 미처 느끼지 못하는 사이 사회 저변에서 확산되었다. 비록 지상의 공기처럼 만만 떠 오르지 않았을지언정 서서히 세계인들의 가슴속을 파고들어 하나의 독특한 유행을 만들고 있었다.
유행에 쉽사리 휩쓸리거나 민감하지 않은 프랑스에서도 한국 문화가 젊은 층 사이에서 하나 둘 일정한 형태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의 단순한 현상은, 며칠 전 장을 보러 갔던 파리 시내 한국 식료품점에서 마주치는 고객도 날이 갈수록 한국인보다 프랑스인이 점점 더 많아진다는 것이다. 파리의 한국식당도 매일반이다.
그리고 내가 얼마 전에 겪은 소소한 에피소드 하나는 코로나 19 백신 이차 접종하러 생-드니 프랑스 종합 경기장에 갔을 때다. 일차 접종 시와 마찬가지로 정해진 절차에 따라 순조롭게 진행되는 가운데 백신을 투입하고 증명서를 받기 전 마지막 과정 한 단계 앞에서 컴퓨터에 기록을 한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중 내 차례가 왔고, 젊은 남성 직원은 나에게 오라는 눈짓을 한다. 의자에 다가가 앉으면서 동시에 서로 "봉쥬르(Bonjour)" 인사를 했다.
"싸바(ça va, 좋아요)?" 의례적인 인사지만 젊은이가 내게 물어서 나 또한 "싸바?, 에 뷰(ça va? et vous, 좋아요, 당신도 괜찮나요")? 하고 답했다.
"고맙네요. 그렇게 말해주니 기분 좋네요. 여기서 그런 한마디 들으면 힘이 되거던요."
"고맙긴요. 당연한 걸 가지고... 힘드시죠?"
"하지만 괜찮아요. 당신처럼 친절한 사람도 있으니까 견딜만해요. 당신은 한국인이군요?"
"예, 한국인이랍니다."
"난 한국을 좋아해요. 그래서 꼭 여행을 가려고 합니다."
"어머나, 그래요. 한국은 매우 현대적이랍니다"
나는 혹여 그가 방문해서 실망이라도 할까 봐 미리 고백하듯 말했다.
"물론 파리에 비하면 그렇겠죠. 하지만 난 현대적인걸 좋아해요. 그리고 내 친구가 서울에서 6개월 살았거던요"
"그렇군요. 한국사람들 친절하며 정도 많고 좋은 교육을 받아 예의도 바르지요. 여행객들에게 안전한 곳이랍니다. 꼭 방문하시길 기대합니다"
나는 비로소 자부심을 가지며 간단명료 요약해서 전했다.
그는 조용한 언행으로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내게 친절함을 잃지 않았다. 이렇게 한국을 좋아하는 프랑스 남성에게 호의적인 배려를 받고 보니 나도 모르게 한국인이라는 자긍심이 생겨났다.
물론 이러한 자잘한 일들은 몇 년 전부터 내 주변에서 조금씩 다가오기는 했지만, 한갓 일각의 유행에 젖어 앞선 호기심 많은 몇몇 젊은이들의 편향적 기호라고 나 자신 편협적 시각으로만 보고 가볍게 취급했다. 아니면 나와 대화를 위해 겨우 찾은 소재라고도 여겼다. 그런데 경제와 대중문화 부분에서뿐만 아니라 교육적 차원의 교환, 교류를 가지는 경향도 늘어났으며, 당연히 한국문화를 비롯한 한국에 대한 전반적 관심도가 높아지는 걸 깨달았다. 그동안 큰 이웃 나라에 끼어 또는 묻혀 잘 드러나지 않았던 우리의 아름다운 정서적, 문화적 산물이 경제적 발전과 더불어 다양한 곳에서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가까이는 어느 곳에서나 손쉽게 찾아볼 수 있는 한국 음식부터 자동차, 전자제품 그리고 나아가 문화, 예술 부분까지. 역시 새로운 파동이다.
사실 20여 년 전, 내가 프랑스 땅을 처음 밟을 당시만 해도 한국에 대한 일반인들의 지식은 무 외한에 가까웠다. 단 일회라도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거나 역사와 문화를 아는 사람은 매우 특수한 경우였다. 길 가다 누가 보아도 내 모습이 동양인이라는 건 확실하지만 한국인이냐고 묻어오는 사람은 극히 일부분. 아니 솔직히 없었다. 대체로 중국과 일본이 극동 아시아의 전부라고 여겼다.
하루는 한국 유학생 동생과 학생식당에 점심을 먹으러 갔다. 학생식당은 뷔페식으로 음식값이 싸면서 편리해 간혹 일반인들이 이용하기도 한다. 우리는 자리를 잡고 앉아 식사를 하면서 당연히 한국어로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런데 옆 좌석에 앉아있던 중년 남성이 한참 동안 신기한 듯 우리 대화를 엿듣는가 하더니 대뜸 우리에게 "당신들은 일본인이냐? 중국인이냐?"며 물어왔다. 우리는 양쪽 다 아니라고 했더니, "그럼 베트남인이냐?"라고 묻는다.
나는 그때 프랑스에 도착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이 바라보는 한국의 이미지나 위상도 모를뿐더러, 한국땅을 벗어난지도 짧은 나머지 한창 근거 없이 우월적이고 국수주의적 사고방식에 깃들어 있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대한민국이 최고라 듣고, 믿었고, 생각했던 게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남성이 중국과 일본을 말할 때까지는 그런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생각해도 경제대국의 일본과 큰 대지를 가진 중국을 우선 떠올리리라는 건 인지 상정. 또한 프랑스는 미국처럼 한국 교포가 많지도 않은 나라니까. 그런데 베트남인이냐고 물었을 때는 그만 기분이 상했다. '아니, 한국을 두고 베트남을 먼저 말하다니, 하물며 한국을 베트남보다 작게 취급하는가? 그보다도 덜 알려져 있단 말인가?, 이 사람 정말 세계관이 작군!'이라 생각하며 약간 불쾌했지만 내색은 않고 "아뇨, 우리는 한국인입니다" 아주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랬더니 돌아오는 답은 "아, 고요한 아침의 나라!" 마치 한국을 잘 안다는 듯 자랑스럽게 말한다.
나는 그 표현에 너무 어이가 없었다. 그 문장은 내 유년시절에나 들었음직한, 지금 거의 사용조차 않는 골동품 같은, 구한말을 지칭하던 표현이다. '아니 이 캐캐 묵은 표현! 겨우 그 정도밖에 떠올릴 수 없는가? 한국에 대한 지식이 이렇게 미미한가?' 하고 내심 충격적이고 속상했다.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등은 프랑스 식민지배하에 있었던 역사적 연관성으로 프랑스인들에게 보다 잘 알려져 있었음)
비록 그 남성은 둘째치고 나중에 깨달은 바지만, 프랑스 일반인들도 한국을 떠올릴 때면 88 올림픽과 남북 분단국 정도가 전부였다. 당시 프랑스 라디오나 티브이 뉴스에서 한국소식은 북한보다도 듣기가 어려운 먼 나라였다. 물론 거의 없었지만 행여 짤막한 단어라도 듣는 날이면 기쁨에 반갑고 뿌듯한 나머지 흡사 금의환향한 듯 들뜬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십여 년이 지난 현재는 어떤가? 아직도 이웃나라만큼 자주는 아니지만 때때로 직, 간접적으로 격상된 한국의 모습을 접하게 되었다.
어느 날 남편과 그 전제로 오늘날 프랑스인들이 한국문화를 대하는 인상과 상향된 이미지에 관해 나눌 기회가 있었다.
"당신은 일본을 통해 극동 아시아 문화를 알고 바라보았지만, 오늘날 프랑스 젊은이들은 한국문화를 통해 이색적인 현대문화를 동경하고 아시아를 보고 느끼고 있어"
"그런가 봐, 그동안 한국이 급부상을 거듭했지"
사실 남편의 소년 시절은 시아버지께서 프랑스 병사로 인도차이나에 주둔할 당시 찍었던 앙코르 와트를 비롯한 베트남 사진들을 보면서 미지의 나라 아시아를 알아갔다. 그의 청년시절에는 일본 영화를 보면서 아시아 문화에 대한 꿈과 희망을 키웠다. <Akira Kurosawa 아키라 쿠로사와) 감독의 "라쇼몽", "7인의 사무라이", <Kenji Mizoguchi 미조구치 겐지> 감독의 "산쇼 다유", "치카마츠 이야기", "신 헤이케 이야기", <Yasujiro Ozu 오쥬 야스지로>의 "도쿄 이야기" 같은 이국적인 풍경과 문화는 그의 풍부한 젊은 감성에 커다란 신선한 자극제 역할과 정신적 윤활유가 되었다. 그것은 새로움의 발견이었고 동경이었다. 이후 일본 정원이나 명상 등을 좋아하며 심취하는 계기를 주었다. 마치 내가 프랑스 인상주의 그림을 통해 프랑스를 만났듯이.
오늘날 프랑스 젊은이들이 한국의 대중문화를 통해 아시아를 맛보며, 느끼고, 깨달으며 그들의 예민한 감성에 자극제로써 그들의 열정에 홍예 같은 향연을 피워 올리는 윤활유가 아닐까?